수양과 교양
수양(修養)과 교양(敎養)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 ‘맑고 밝고 훈훈한 카페 덕화만발 가족’ 중에 청니(靑泥) 김병래 선생님이 계십니다. 부산에서 오랜 세월 아나운서로 일하시다가 퇴임하신 분이지요. 이 청니 선생님이 어제 수양과 교양에 대해서 물어 오셨습니다.
【덕산님!

날마다 이렇게 좋은 글을 보내주시는 덕산님도 지극정성이 아니고는 할 수 없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습니다. 덕산님이야 말로 살아있는 부처님이 아닌가 합니다.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인간의 ‘수양과 교양’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기회가 되면 가르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교양이 있다는 사람과 수양이 됐다고 하는 사람을 구분하기가 참 어려운 세상인가 봅니다.】

고맙습니다. 그러나 저 또한 수양과 교양이 미숙한 사람이라 청니 선생님의 질문에 답을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그리고 설마 청니 선생님이 수양과 교양을 몰라 질문을 하셨겠습니까? 아마 청니 선생님께서는 수양과 교양이 부족한 저를 질책하시는 것 같은 감이 들어 여간 조심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수양이란 몸과 마음을 닦아 기르는 것을 이릅니다. 그러니까 수양은 ‘정신을 수양하고, 사리를 연구하며, 작업취사를 잘 하는 것’을 말 하는 것이지요.

첫째, 정신수양(精神收養)입니다.

정신이라 함은 마음이 두렷하고 고요하여 분별 심(分別心)과 주착 심(主着心)이 없는 경지를 이릅니다. 그리고 수양이라 함은 안으로 분별 심과 주착 심을 없이 하며, 밖으로 산란하게 하는 경계(境界)에 끌리지 아니하여 두렷하고 고요한 정신을 양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사리연구(事理硏究)입니다.

사(事)라 함은 인간의 시비이해(是非利害)를 이름이요, 이(理)는 천조(天造)의 대소유무(大小有無)를 이릅니다. 여기서 대(大)라 함은 우주만유의 본체를 이름이요, 소(小)라 함은 만상(萬象)이 형형색색으로 구별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유무(有無)라 함은 천지의 춘하추동 사시(四時) 순환과, 풍운우로상설(風雲雨露霜雪)과 만물의 생로병사와, 흥망성쇠(興亡盛衰)의 변태(變態)를 이릅니다. 또한 연구라 함은 사리를 연마하고 궁구(窮究)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셋째. 작업취사(作業取捨)입니다.

작업이라 함은 무슨 일에나 ‘안 ‧ 이 ‧ 비 ‧ 설 ‧ 신 ‧ 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의 작용함을 이름이요, 취사라 함은 정의(正義)는 취하고 불의(不義)는 버림을 말합니다.

이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를 우리는 삼학(三學)이라 합니다. 이 삼학을 공부하여 생기는 힘을 삼대 력(三大力)이라 하고, 삼대 력이 최고로 수승(殊勝)한 분이 바로 부처님이십니다. 이 삼학을 닦으면 마음에 자주(自主)의 힘이 생기고, 천만 사리를 분석하고 판단하는데 걸림이 없는 지혜의 힘이 생깁니다. 그리고 모든 일을 응용할 때에 정의는 용기 있게 취하고, 불의는 용맹 있게 버리는 실행의 힘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그럼 교양이란무엇일까요? 지식, 정서, 도덕 등을 바탕으로 길러진 고상하고 원만한 품성을 말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교양 있는 사람이란 대체로 지식이 많고 점잖은 사람을 칭하는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 있을 때 조금만 설쳐도 ‘배운 사람이 왜 그 모양이야!’ 라며 무안을 주며 행동을 나무랍니다.

우리는 교양이란 말을 비교적 자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양이란 뜻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바로 대답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받은 모든 교육을 통해서 얻은 학식과 지식 등을 토대로 수양을 쌓아서 얻은 것이 언어 행동 지식 등에서 유형무형으로 나타나는 것이 교양이 아닐까요?

노자(老子)는 인간수양(人間修養)의 근본(根本)을 물이 가진 일곱 가지의 덕목(水有七德)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1. 겸손(謙遜)입니다. 물은 언제나 낮은 곳을 찾아 흐르지요.

2. 지혜(智慧)입니다. 막히면 돌아갈 줄 아는 지혜가 있습니다.

3. 포용력(包容力)입니다. 청탁(淸濁)을 가리지 않습니다.

4. 융통성(融通性)입니다. 어떤 그릇에나 담깁니다.

5. 인내(忍耐)입니다. 바위도 뚫는 끈기가 있습니다.

6. 용기(勇氣)입니다. 장엄한 폭포처럼 몸을 던집니다.

7. 대의(大義)입니다. 유유히 흘러 바다를 이루지요.

어떻습니까? 가장 아름다운 인생은 물처럼 사는 것(上善若水)이라 하였습니다. 교양은 상식을 바탕으로 하고 지어지는 집입니다. 그래서 상식이 부족하면 교양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거나 남을 불쾌하게 하거나 손해나게 하는 사람은 그가 누구이던 ‘교양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남들의 처지나 기분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중심으로, 제멋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들도 모두 교양 없는 인간들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교양 있는 사람은 같은 말이라도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에 열 올리지 않고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교양인은 말할 때도 상대방을 보며 말합니다. 서로 눈이 맞아야 마음도 통하게 되지요. 한번 한 말을 두 번 다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은 일관성 있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잃으면 진실도 거짓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말을 독점하지 말고 상대방에게도 말할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또한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것입니다. 이대로만 하면 어디에서나 우리는 교양 없는 인간으로 취급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말 한 마디에도 죄와 복이 왕래합니다. 그러므로 수양 인이나 교양 있는 사람은 한 마디 말이라도 함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청니 김병래 선생님은 소위 수양을 했다는 사람의 행실과 교양을 갖추었다는 사람들의 막무가내 식 행태를 보시고 하도 답답하여 이 질문을 하셨을 것입니다. 말씀하신 질문의 요지를 잘 알면서도 저의 수양과 교양이 미치지 못해 이 정도의 답을 할 수 밖에 없음이 너무 부끄럽네요!

단기 4352년, 불기 2563년, 서기 2019년, 원기 104년 1월 29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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