制服中傷(제복중상) 중상모략에 대처하다. 근거 없는 중상모략이라면 무대응, 무방비가 가장 좋은 책략이다. 사사건건 대꾸하는 사람치고 큰 인물이 없는 법이다.

이정랑 언론인 (중국 고전 연구가)

중상모략에 대처한다.

아무런 정신적 준비와 방어 조치가 없는 상태에서 ‘중상모략(中傷謀略)’이라는 화살에 맞는다면 후회막급이다. 따라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가공할 중상에 대응할 대책을 마련한다. 권모술수(權謀術數)가 소용돌이치는 사회에서 중상에 대응하는 숱한 대책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창이 있으면 방패가 생겨나고, 유도탄이라는 신무기가 나오면 즉시 그 유도탄을 막는 새로운 군사시설이 생겨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마찬가지로 중상에 대해서도 그에 맞설 수 있는 대책이 있다.

한나라 초기에 직불의(直不疑)라는 인물이 승진을 하자 누군가가 샘이나 헐뜯었다.

“듣자 하니 직불의가 자기 형수와 간통을 했다더군.”

이 헛소문은 얼마 되지 않아 직불의의 귀에까지 전해졌다. 사실 직불의 에게는 형님이 없었다. 그러니 세상에 있지도 않은 형수와 간통 운운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직불의가 이 유언비어(流言蜚語)를 나서서 잠재우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저 혼잣말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나한테 형님이라고는 없는데 어떻게 그런 말이‧‧‧‧‧‧,”

유언비어나 헛소문에 대해서는 변명하면 할수록 그 전파 속도가 더욱 빨라진다. 직불의는 중상에 대해 근본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그에 대한 중상은 어느덧 수그러들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직불의는 몇몇 사람과 함께 같은 집에 살고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휴가차 왔다가 동료의 돈을 자기 것인 줄 알고 가져가버렸다. 돈이 없어진 것을 안 돈 주인은 직불의를 의심했다. 직불의는 돈 주인에게 사과하고 배상까지 했다. 얼마 후 돈을 잘못 가져간 사람이 집으로 돌아와서 돈 주인에게 되돌려주었다. 직불의를 의심했던 돈 주인은 자신이 너무 경솔했음을 깨닫고는 미안해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직불의는 보통사람이 아니다’는 평가가 급속히 퍼져나갔다.

이상은 무방비의 방비이지, 무책략의 책략이 아니다. 천천히 생각해 보면 오히려 가장 좋은 중상 대응법이라고 할 수 있다. 직불의는 격렬한 경쟁 속에서 줄곧 이런 태도로 처신하여 어사대부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사사건건 대꾸했더라면 그런 중책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이 이야기의 끝에다 이렇게 썼다.

“이름 내세우기를 좋아하지 않아 세상 사람들이 그를 장자(長者)라 불렀다.”

즉, 본인은 비록 명리를 탐내지 않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를 덕이 높고 고상한 사람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직불의의 태도는 중상모략에 대처하는 방법의 면에서는 비정상이었다. 일반적으로는 중상에 걸려들 가능성이 있는지 미리 예측해서 사전에 대책과 준비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식양(息壤)의 맹세’가 이 방면의 전형적인 사례에 속할 것이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자.

진(秦)나라의 상국 감무(甘茂)와 소진(蘇秦) 그리고 장의(張儀)는 같은 시대 사람들이었는데, 모두 전국시대의 유명한 모략가로서 교묘하게 정적을 공격하는가 하면 늘 다른 사람의 중상에 걸려들지 않도록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인물들이었다.

진나라는 늘 한(韓)나라의 요충지인 의양(宜陽)을 손에 넣고 싶어 했다. 진나라 왕은 이 일을 감무에게 맡겼다. 감무는 위(魏)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한나라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작전 지역이 각국의 이해관계와 세력이 복잡하게 얽힌 지역이었다. 게다가 진나라 내부의 실권자들은 각기 나름대로 다른 국가들과 이런저런 이해관계를 맺고 있어, 감무를 중상 모략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진나라 군대가 한나라로 진공하기에 앞서 감무는 식양(息壤)에서 진나라 왕을 만나 재차 자신에 대한 신뢰여부를 확인했다(당초 감무는 의양 정벌을 반대했다).

“저는 외국에서 들어온 신하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리자(樗里子-어머니가 한나라의 공주)와 공손석(公孫奭-본래 한나라의 공자)이 한나라를 지키기 위해 저의 방책을 이러쿵저러쿵 비방하면 왕께서도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의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왕께서는 위나라 왕을 속이게 되고 저는 공중치(公仲侈-한나라의 재상)의 원망을 사게 될 것입니다.”

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짐은 두 사람의 비방을 결코 듣지 않겠다는 걸 그대에게 맹세하겠다.”

드디어 감무는 병사를 이끌고 의양을 쳤지만 5개월이 지났는데도 함락시키지 못하자, 저리자와 공손석은 기다렸다는 듯 감무를 비방하고 나섰다. 진나라 왕은 감무를 불러들여 전쟁을 그만두려 했다. 이에 감무는 말했다.

“식양의 맹세를 잊으셨단 말입니까?”

진나라 왕은 감무를 다시 신임했고, 감무는 적군 6만을 죽이고 마침내 의양을 함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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