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덕권 칼럼니스트

많은 사람을 대하다 보면 유독 위엄(威嚴)이 있어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 얼마나 수행을 쌓았기에 저리도 위엄을 느끼게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진정한 위엄이란 어떤 것일까요? 온화하면서 흐트러짐이 없고, 엄숙하면서 고요한 것은 위엄을 갖춘 기운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개인을 생각하지 않고 사사로움을 위하여 재물을 사용하거나 욕심내지 않는 것은 의로움이 위엄을 갖춘 것이며, 언제나 정직을 말하고 청렴결백을 주장하는 것은 말이 위엄을 갖춘 것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따르고 존경하는 위엄은 겉으로 드러난 힘과 권력이 아닙니다. 살아오는 동안 몸에 베인 신념과 행동, 그리고 정신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면서 나오는 수행의 향기입니다.

그럼 진정한 수행자의 향기는 어떤 것일까요? 원불교의 소태산(少太山) 부처님께서는 수행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원상(一圓相)을 수행의 표본으로 하고, 그 진리를 체(體)받아서 자기의 인격을 양성하나니, 일원상의 진리를 깨달아 천지 만물의 시종 본말과 인간의 생 · 로 · 병 · 사와 인과보응의 이치를 걸림 없이 알자는 것이며, 또는 일원과 같이 마음 가운데에 아무 사심(私心)이 없고 애욕(愛慾)과 탐착(貪着)에 기울고 굽히는 바가 없이 항상 두렷한 성품 자리를 양성하자는 것이며,

또는 일원과 같이 모든 경계(境界)를 대하여 마음을 쓸 때 희 · 로 · 애 · 락과 원 · 근 ⦁친 · 소에 끌리지 아니하고 모든 일을 오직 바르고 공변되게 처리하자는 것이니, 일원의 원리를 깨닫는 것은 견성(見性)이요, 일원의 체성을 지키는 것은 양성(養性)이요, 일원과 같이 원만한 실행을 하는 것은 솔성(率性)인 바, 우리 공부의 요도(要道)인 정신 수양 · 사리 연구 · 작업 취사도 이것이요,

옛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계 · 정 · 혜(戒定慧) 삼학도 이것으로서, 수양은 정(定)이며 양성(養性)이요, 연구는 혜(慧)며 견성(見性)이요, 취사(取捨)는 계(戒)며 솔성(率性)이라, 이 공부를 지성(至誠)으로 하면 학식 있고 없는 데에도 관계가 없으며 총명 있고 없는 데에도 관계가 없으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 성불함을 얻으리라.」

일원상의 수행은 원불교에서 행하는 수행법입니다. 소태산 부처님께서는 일원의 진리가 곧 제불제성(諸佛諸聖)의 증득(證得)하신 자리이고, 우리 모든 중생의 본래 마음임을 깨치시고 그 진리를 일원상으로 상징하여 나타내심과 동시에 이를 수행토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일원상의 수행은 그 진리를 깨쳐 얻자는 것이고, 제불 제성의 증득한 자리에 나도 계합(契合)하자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내 스스로 지니고 있는 마니보주(摩尼寶珠)를 증득하여 활용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원상 수행의 목적은 신통묘술(神通妙術)을 얻거나 다른 기이한 행적을 나투기 위함에 있지 않고 오직 나의 본래 참마음을 발견하여 회복하자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성자가 다른 분이 아닙니다. 그 마음을 찾고, 그 마음을 기르고, 그 마음을 노복(奴僕) 같이 쓰는 사람이 바로 부처요 성자인 것입니다.

그럼 수행하고자 하는 사람의 기본자세는 어떤 것일까요?

첫째, 일원상의 진리를 믿어야 합니다.

오직 진리를 다 깨닫지 못한 중생으로서 그 진리 세계에 들어가기로 하면 굳건한 신앙이 자리 잡혀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근원이 없는 물과 같아서 메마르기 쉽고 뿌리 없는 나무와 같아서 대지 기운을 흡수하여 자랄 수 없는 것이지요.

둘째,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일원상 수행을 하고자 하는 사람, 즉 일원의 진리를 체득하고자 하는 이는 그 진리를 믿고 표본을 삼아서 먼저 표본과 똑같은 그 마음을 알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을 알아야 마음을 기를 수도 있고 쓸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셋째,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양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양성공부(養性工夫)요, 정(定)이며 수양공부입니다. 수심결(修心訣)에 ‘성태장양(聖胎長養)’이란 말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를 낳았지만 오래 길러서 완전한 성인이 된 뒤라야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듯이, 불보살의 마음은 생겼지만 오래 오래 공을 쌓아서 그 마음에 완실한 힘을 얻어야 비로소 부처의 인격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지요.

넷째,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솔성공부(率性工夫)요 계(戒)며 작업취사(作業取捨) 공부입니다. 수행의 구경(究竟) 목적은 자비로써 세상을 구제하는데 있습니다. 안으로 일원상과 같은 마음을 찾고 그 마음을 보존했을지라도, 밖으로 육근(六根 : 眼耳鼻舌身意)을 작용할 때에 조금도 원근친소나 희로애락에 끌리지 않고 과불급이 없는 중도 행을 나투어야 천하를 유익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완전한 진리의 실천자가 되는 것은 성품의 체용(體用)을 다 증득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솔성공부는 공부의 구경이자 성불의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견성을 하고 양성을 해도 솔성에 어긋나면 그 사람은 부처가 아닙니다.
그러니 안으로 원근친소와 희로애락이 끊어진 청정(淸淨)한 자리에 바탕 하여 밖으로 천하를 위하는 큰 공심(公心)으로 중도(中道)를 행하는데 노력해서 무위이화(無爲而化)의 대덕(大德)이 나타나도록 마음에 공을 쌓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오래 오래 공을 들이면 드디어 육근 동작이 다 법으로 화하여 만 중생이 본받을 만한 지경에 이르게 되어 부처의 인격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조금 어려우신가요? 이 네 가지를 알고 닦으며 실천해야 비로소 진정한 위엄을 갖추어 수행의 향기를 내뿜을 수 있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지 않을 까요!

단기 4351년, 불기 2562년, 서기 2018년, 원기 103년 11월 12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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