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양균[서경원 평화민주당 의원의 비서관]

1988년 서경원 당시 평화민주당 의원의 비서관이었던 방양균씨는 이른바 ‘서경원 방북 사건’에 연루돼 간첩죄로 7년간 옥살이를 했다. 2001년 1월 검찰 재수사로 서경원 방북 사건 자체가 ‘강압수사에 의한 조작’으로 드러났지만, 그의 재심 신청은 기각됐다. 올해 안에 재심 재청구를 할 계획이라는 그는 30년에 걸친 투쟁을 마무리할 수 있을까.

“검사님은 내가 소나 돼지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전에 날조된 각본대로 나에게 진술을 받아쓰게 하지 않았습니까?” 1989년 12월6일 서울형사지법 대법정에서 열린 구형 공판에서 방양균씨는 이렇게 외쳤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서경원 의원 방북사건’(이하 서경원 사건)은 6공 시절 대표적인 용공조작 사건 중 하나다. 당시 평화민주당 소속이었던 서경원 의원이 1988년 8월19∼21일 북한을 방문해 북한 쪽으로부터 5만 달러를 받고, 이 가운데 1만 달러를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에게 전달했다는 것이 국가안전기획부와 공안검찰이 내세운 사건의 뼈대였다.

당시 서 의원의 비서관이던 방씨는 북한 공작원에게 1만 달러를 받아왔다는 혐의 등(국가보안법상 이적행위)으로 구속 기소돼 7년 징역을 살았다. 당시 기소된 16명 가운데 서 의원을 빼고 실형을 산 사람은 그가 유일하다. 방씨에게 서경원 사건은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유린한 사건이었다. 사건 발생으로부터 29년이 흘렀다. 당시 34살이었던 방씨는 이제 환갑이 지났다. 그 사이 군부정권이 막을 내렸고 6명의 대통령이 새로 뽑혔다. 사면·복권장(1999년 2월)을 받았고 광주민주화항쟁에 참여한 공을 인정받아 국가유공자증서(2003년 2월)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아직 법적으로 ‘간첩’이라는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있다. 2001년 1월 검찰 재수사로 서경원 사건 자체가 ‘강압수사에 의한 조작’으로 드러났고, 2010년 그는 다시 재판을 해달라며 재심을 청구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2016년 12월 이를 기각했다. 그는 올해 안에 재심을 재청구할 계획이다.

“검사 고문이 더 지독했다”

지난 4일 광주에서 상경한 그를 서울 서초구 서울고속버스터미널 근처에서 만났다. 그는 중간중간 말을 잇지 못했다. 안기부에서 21일, 검찰에서 23일, 모두 44일간의 악몽 같았던 조사를 겪은 뒤부터 누군가 따지듯 물으면 그는 말을 못하게 돼버린다고 했다. “에, 거부가 와 버려요. 무엇이 확 눌러서 생각을 못하게 막아버려요.”

―첫번째 재심 신청이 기각됐는데.

“그렇게 (고문을) 당하고 이렇게 또 (법원에서) 수모를 당했다. 2010년 12월에 재심을 청구했는데 2015년 10월에야 재심 개시 여부를 결정하는 재판을 시작하더니 두 달 뒤 서울고법에서 기각을 선고하고 2016년 12월 대법원도 그대로 결정했다. 기각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요즘 뉴스를 보니 ‘양승태 대법원’이 상고법원을 추진하려고 여러 재판 개입을 했다고 하는데, 그 영향이지 않나 의심되기도 한다. 서경원 사건은 김기춘 당시 검찰총장이 직접 챙긴 사건이다. 보통 재심이라는 게 ‘고문, 불법체포, 변호사 접견금지’ 중에 하나만 있어도 개시가 받아들여지고 무죄가 선고되는데, 나는 이 세 가지에 모두 해당했다. 그런데 법원이 검찰에서 제출한 당시 서류 하나만 믿고, ‘가혹 행위가 있었다고 단정하기 부족하다’고 판단해 버렸다.”

검찰이 법원에 낸 진술서는 방씨 공소장에 첨부된, 기소 하루 전인 1989년 8월11일 작성된 ‘변호인 접견 결과’라는 서류였다. 당시 변호사(박상천·조승형·강철선) 등 3명이 방씨를 접견하는 자리에 안○○ 검사, 고○○ 수사관이 입회해 있었다. 서류 내용은 방씨가 △안기부·검찰에서 가혹행위를 당한 사실이 없고 △조사 과정에서 하루 6시간 이상 충분히 잤고 △검찰이 기소한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끊임없이 “고문 끝에 한 허위자백”이라고 주장했지만, ‘과거 검찰’이 작성한 이 다섯 쪽짜리 서류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2015∼16년 재심 과정에서 검찰은 같은 서류를 들이밀었고 여전히 효력이 있었다.

―그 서류 내용대로 말한 적이 없다는 말인가.

“검찰에서 날조한 서류다. 나한테 불리한 내용인데, 내가 왜 굳이 변호인을 만나 그런 말을 했겠나. 당시 안 검사의 지시로 사건 관련해서는 묻고 답하지 않겠다고 각서를 쓴 뒤 겨우 진행된 접견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변호사가 가혹 행위 여부를 물어보니 당황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이런 사실은 강철선 변호사가 국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그대로 증언하기까지 했다. 1989년 9월 작성된 신체감정서에서도 고문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자신의 오른손과 왼쪽 눈썹 옆을 보여주며) 아직도 이렇게 자국이 남아 있다.”

1989년 9월8일 작성된 방씨의 신체감정서는 당시 서울대 의대 이정빈 교수가 작성했다. 여기에는 ‘야전침대에 사용하는 막대기나 각목같이 각이 있다면 피감정인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상황에서 열창(피부가 찢긴 상처)이 생길 수 있고 이의 치유로 본 반흔(상처가 나은 뒤 생긴 자국)이 생길 수 있다’(오른손), ‘주먹으로 비껴 맞아 표피 박탈이 있었다면 본 소견과 같은 홍반성 색소 침착이 생길 수 있다’(왼쪽 눈썹 옆)고 적혀 있다.

“거기다 2001년 서경원 사건 재수사를 해서 검찰 스스로도 ‘김대중 총재가 흰 종이에 쌓인 1만 달러를 전달 받는 걸 봤다’는 내 진술은 거짓이고, 안기부의 가혹 행위 때문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런데 검찰이 나서서 구제해 주기는커녕 ‘고문을 안 했다’고 주장하고 법원은 또 그 말만 듣고 내 말은 못 믿겠다니, 너무 억울해서 잠이 안 온다.”

2001년 1월 검찰은 안기부 수사국장을 지낸 정형근 당시 한나라당 의원을 재판에 넘기면서 ‘김대중 대통령 북한 공작금 1만 달러 수수설’은 사실이 아니며 서 전 의원과 방씨가 당시 안기부에서 가혹 행위를 당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또 2010년 7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방씨 사건에 대한 본 조사에는 착수하지 않았지만, 통지서를 통해 ‘신청인이 안기부 남산 분실에 영장 없이 체포 연행된 후 가혹 행위를 당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검사에게 고문을 당했다고, 당시 교도소 안에서 검사를 고소했는데.

“1993년에 아무런 자료도 구할 수 없어 오로지 기억으로만 안기부 직원 김○○과 고소 당시 한 지검의 공안부장으로 재직 중이던 안○○ 검사를 독직폭행 혐의 등으로 고소했다. 역시나 검찰이 무혐의 처분을 해서, 재정신청(검찰의 불기소처분에 불복해 법원에 처분의 옳고 그름을 가려달라고 신청하는 것)을 했지만 법원이 기각했다. 간첩사건 2심 때 ‘대한민국 법은 엿장수법’이라고 최후진술을 했는데 그 지론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방씨는 1989년 6월29일 오전에 의원회관에서 체포됐는데 48시간이 훌쩍 지난 7월2일 새벽 1시50분에 구속영장이 집행됐다. 불법구금이었다. 이후 안기부에서 21일 동안 고문과 함께 조사를 받고 검찰로 넘겨졌다. 방씨는 검찰이 안기부와 다를 바 없었다고 말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1989년 7월21일 서울지검 공안부로 넘어와 안 검사를 처음 만났을 때 ‘검사님 사실은 제가 고문 때문에 허위자백을 했습니다’라고 했다. 안 검사가 저를 뜯어보더니 ‘그러면 내가 도와줄 길이 없네’라며 수사관에게 형법 98조(간첩죄 부분)를 읽으라고 했다. 그러면서 ‘간첩죄는 7년 이상 징역, 무기, 사형인데 너는 사형을 면할 수 없어. 협조하면 사형만은 면하게 해 줄게’라고 했다. 그래도 검사는 정의의 보루라고 생각했는데…. 안기부에서 야전침대 각목으로 맞고 뺨을 맞다가 기절도 했지만 나는 검사 고문이 안기부 고문보다 훨씬 지독했다고 생각한다.

3일 동안 잠을 안 자 봤나. 수갑을 찬 채로 대변을 보고 밥 먹어 봤나. 정강이를 까이고 목덜미도 맞았다. 서소문 옛 검찰청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때가 7∼8월 삼복 더위였다. 검찰에서 총 23일 동안 조사를 받으면서 13일을 구치소도 안 보내주고 씻지도 못하고 양치질도 못 하고 하루에 한 두 시간 잘까 말까하며 검사실에서 그렇게 조사를 받았다. 무법천지였다. 변호사 접견을 하게 해달라고 하니 ‘간첩을 누가 변호하려 하느냐. 이미 알아보니 너를 변호할 사람은 없더라’며 막았다.”

변호인 접견은 수사기관의 처분은 물론 법원의 결정으로도 제한할 수 없다는 것이 확립된 판례다. 당시 김기춘 검찰총장이 직접 검사들을 지휘하는 등 무리하게 조사를 했던 정황들도 제시된 상태다. 김경회 당시 서울지검장은 훗날 회고록에서 김기춘 총장이 공안부 부장검사로부터 직보를 받았고, 안기부에서 밝히지 못한 ‘김대중 1만 달러 수수’ 자백을 받아 득의만면했다고 회상했다.

“김기춘이 지휘한 조작사건”

―서 전 의원과는 어떻게 같이 일하게 됐나. 방북 사실은 언제 알았나.

“선거운동을 할 때 돕다가 눈에 띄어 1988년 5월25일부터 비서관을 했다. 방북한 지 한참 지난 1989년 6월23일에야 서 의원이 비서진에 방북 사실을 알려서 알게 됐다. 최측근 공작원처럼 돼 있었지만, 사실 1989년 6월은 이미 사표를 내기로 한 상태였다. 5급이었던 나에게 7급 비서관으로 옮겨가라고 해서 그냥 나가겠다고 했다. 그런 내가 무슨 서 의원의 특파 공작원을 했겠나.”

이런 내용은 1989년 12월6일 법정에서 서 전 의원 쪽 이상수 변호사가 방씨를 상대로 한 증인신문 조서에도 남아 있다. 당시 이 변호사가 “작년(1988년) 9월 중순 서 의원 방북 사실을 알고 그에게 포섭돼 북한 공작원으로부터 돈까지 받아왔다면, 서 의원이 증인을 홀대하면서 사실상 그만두라는 가혹한 조치까지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가”라고 묻자 방씨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당시 검찰은 당신이 1988년 11월에 독일에 간 게 북한 공작금 수령 목적이라고 했는데.

“서 의원이 독일에서 교포 후원인인 ‘이 선생’을 만나서 돈을 받아오라고 했다. 그냥 후원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안기부에서는 ‘이 선생이 북한 사람이고 북한 사투리를 썼던 거 아니냐’해서 ‘서울말을 썼다’고 하니 구타를 한 뒤에 또 물었다. ‘인상 착의가 어떻게 되냐’고 해서 ‘잘 모르겠다’고 하면 또 고문을 했다. 당시에 김병기라고 반공드라마에 자주 나오던 배우가 있는데 그 사람이 방송에서 색안경을 끼고 나왔다. 그냥 그 외모를 말해줬다. 안 그러면 또 맞으니까. 그래서 판결문에 ‘이 선생’이 색안경을 낀 것으로 된 거다. 얼마나 우스운 일이냐. 독일에 갔을 때 나는 서 의원이 그 전에 방북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그런데 안기부에서는 그때 이미 내가 서 의원하고 간첩교육을 받고 조국통일 사업을 하기로 해서 독일에 갔다고 했다.”

―나중에라도 서 전 의원이 방북한 이유에 대해 말하던가.

“나한테는 얘기가 없었다. 그런데 당시는 남북교류가 활발해지려던 때였다. 노태우 대통령도 7·7선언 때 남북교류를 실현하자고 했다. 문익환 목사도 임수경씨도 그래서 간 거다. 서 의원이 1989년 3월에 인터뷰해서 7월에 실린 [한겨레] 기사를 보면 서 의원이 김일성을 만나 부자세습제를 없애라는 말까지 했다. 그게 단순 방북이지 어떻게 간첩활동인가. 서경원 사건은 노태우 정권이 공약이었던 중간선거를 피하고 정국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만든 조작사건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1988년 7월7일 특별선언을 통해 “남과 북은 분단의 벽을 헐고 모든 부문에 걸쳐 교류를 실현해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또 서 의원은 1989년 같은 [한겨레] 인터뷰에서 김 주석에게 △김수환 추기경 방북 허락 △휴전선 과격 방송 삼가 △남파간첩 있다면 중지 △군사시설 서로 개방 △부자세습제는 민족통일 걸림돌 등에 대해 역설했다고 밝혔다.

“서 의원은 방북이라도 하고 북한에서 돈도 받았다지만 나는 뭔가. 실정법을 하나도 어기지 않았는데 7년을 꽉 채워 살았다. 서 의원도 1998년에 사면되면서 8년만 징역을 살았다.”

―재심을 재청구한다고 했는데 새롭게 낼 증거들이 있나.

“첫번째 재심 신청 때는 주로 과거사정리위원회 자료를 냈다. 2001년 검찰 재수사 결과도 제출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검찰 재수사 결과, 검찰이 변호인 접견을 막은 것과 영장 없이 48시간 넘게 구금한 것을 입증할 증거들을 추가로 제출할 계획이다”

방씨는 출소 뒤 한때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생활을 할 정도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광주전남 양심수 후원회 부회장, 광주전남 고문조작 피해자 모임 대표, 한국 앰네스티 36그룹 대표 등을 지내는 등 인권운동가 활동을 계속 해왔다. 또 여러 고문 피해자들의 재심을 도와 무죄를 끌어냈다. 그 중 ‘박순애 간첩조작 사건’은 재심 재청구 끝에 무죄가 선고된 경우다. 그는 30년에 걸친 투쟁을 마무리할 수 있을까.  [한겨레= 글·사진 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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