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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7충사 순국선열추모제 민주화운동원로회의 주최

기사승인 2018.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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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외세 자주화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 조국사랑 한 길을 결의하다

7충사추모제 초상화 민주화운동원로회의 / 사진 = 문해청 기자

[뉴스프리존,대구=문해청 기자] 지난 17일(음력 9월 9일) 중구 민주화운동원로회의 사무실에서 추석명절에 제사를 모시지 못했던 순국선열추모제를 개최했다. 매년 민주화운동원로회의(의장 강창덕 92세)에서 주최하여 지역 특정 정파 없이 민족민중민주진보를 표방하는 각 단체에서 참가해서 결의를 다짐했다.

추모제는 범민련남측본부대경연합 한기명 의장, 자주통일운동가 권오봉 선생님, 자주통일운동가 김병길 선생님,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강보향 공동대표, 더불어 민주당 대구 중남구위원회 진호만 부위원장, 민중당 대구 황순규 위원장, 이대동 (전) 위원장,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곽병인 사무처장, 대경진보연대 김선우 집행위원장, 노무현재단대경지역위원회 손혁수 사무처장, 6. 15 대경본부 이창욱 사무처장, 4. 9 인혁열사계승사업회 김선희 사무차장, 노무현재단대경지역위원회 김용만 공동대표의 사회로 진행했다.  

먼저 기사의 시작은 7충사 순국선열추모제를 주최했던 강창덕 선생을 소개하고 다음은 7충사의 각 인물이 투쟁했던 삶을 서술한다. 뉴스프리존 "사람들 이야기"로 조국이 침탈당하고 위태로울 때 자주독립운동 조국사랑으로 투쟁에 투신한 인물의 삶을 통해 반외세 자주화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의 역사와 건강한 삶을 알아 가고 참 된 의미를 세우는데 있다.

강창덕 고문 / 사진 = 문해청 기자

이번 추모제를 주최한 강창덕 선생은 1927년 경북 경산에서 태어났다. 광복 전 1944년 17살 나이로 만주독립군 활동을 얘기하다 반일사상 고취 혐의로 구속됐고 1945년에는 일본해군지원병 입대를 피해 도피하다 구속됐다. 광복 후인 1947년 학생웅변대회에서는 미군정 포고령위반 혐의로, 1952년에는 평화통일을 주장하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1961년에는 반공법제정반대 집회 등으로 2차례 구속되기도 했다. 이어 건국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1956년 영남일보 공채 1기로 입사에 정치부 기자로 사회 첫발을 내딛었고 2년 뒤 대구매일신문사로 옮겼다.

그러다 1960년 사회당 경북도당 선전·조직위원장을 시작으로 1967년 '반독재 재야민주세력 단일후보추진위원회' 활동과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대구경북상임공동의장, 1993년 경산민우회 초대회장을 지내며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구속돼 고문을 받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82년 형집행정지로 출소할 때까지 8년 넘게 복역했다. 그러나 2006년 국무총리실 소속 '민주화운동 명예회복·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받아 2007년 서울중앙지방법원 재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평화뉴스 인용)

녹두장군 전봉준

7충사 중에 1째 인물은 녹두장군 전봉준이다. 전봉준 장군은 반외세 자주화 민족해방 민중혁명 정신으로 동학투쟁 이끈 장수다. 동학운동은 보국안민의 실천으로 동학혁명을 실천하려고 했다. 1894년 2월 15일(음력 1월 10일). 전북 고부(정읍)에서 1천여 명의 학학 농민군이 봉기를 했다. 탐관오리 조병갑의 폭정에 시달리다 결국 폭발을 한 것이다. 당시 조선 조정은 일본, 러시아, 청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일본 상인은 쌀을 마음대로 빼돌렸고, 탐관오리는 그들과 결탁해 백성을 쥐어 쫬고, 그 탐관오리 중 한 명이 조병관이었다.

전봉준장군이 이끄는 농민군은 고부 관아를 접수했다. 정부는 사태 해결을 약속을 했고, 농민은, 순수 해산했다. 정부는 이내 태도를 바꿔 주모자를 색출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전봉준은 사회를 바꿔야 농민이 살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

2개월이 조금 더 지난 4월 24일(음력 3월 2일), 마침내 전봉준이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내걸고 봉기를 했다. 1차 동학운동 / 동학혁명이 시작되었다. 보국안민은 나라에 충성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다른 지역의 동학 농민들도 속속 봉기에 가담을 하였고, 순식간에 농민군은 1만여 명으로 불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이 그들 앞에서 외쳤다. "충성으로 왜적을 몰아내자! 서울로 진격해 부패한 조정의 관료들을 몰아내자! 혼탁한 세상을 구해 백성을 편안케 하자!" 농민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관군을 몇 차례 대파한 끝에 5월 31일(음력 4월 27일)에는 자주성을 함락시켰다.

7충사추모제 더불어 민주당 중남구지역위원회 진호만 부위원장 / 사진 = 문해청 기자

호남 일대가 농민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하지만 더 이상 전투하기 힘든 상황에 직면했다. 정부군이 전주성을 포위한 데다 청과 일본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벌일 거라는 소문이 돌기를 시작했다. 결국 농민군은 정부와 타협하게 된다.

농민군은 12개 항목으로 돼 있는 폐정개혁안을 정부에 제출한다. 탐관오리를 처벌하고 노비문서를 태우며, 과부의 재혼을 허용하고 토지 제도를 개혁한다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정부가 개혁안을 받아들이자 농민군은 6월 11일(음력 5월 8일) 해산을 했다. 그 대신 전라도 53개 지역에 집강소를 설치해 개혁을 추진했다.

얼마 후 청일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일본은 그 틈을 타서 조선 조정을 장악한 뒤 민씨 세력을 축출하고 친일 내각을 만든다, 친일 내각은 일본의 지시에 따라 "조선은 완전 독립국이다! 라고 선언한다. 틀린 말은 아니 지만 이 말에 숨은 뜻은 조선은 독립국이니 청은 조선에서 물러나라 조선은 일본이 간여한다.

이런 숨은 뜻이 있는 것이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굳어지고 있었다. 일본을 제어할 세력이 없었다. 나라꼴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10월 12일(음력 9월 14일) 농민들이 삼례에 다시 모여 대책을 논의하게 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인용)

임시정부 주석 김구

2번 째 인물은 김구로서 1876(고종 13)∼1949. 독립운동가 · 정치가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아명은 창암(昌巖), 본명은 김창수(金昌洙), 개명하여 김구(金龜, 金九), 법명은 원종(圓宗), 환속 후에는 김두래(金斗來)로 고쳤다.

자는 연상(蓮上), 초호(初號)는 연하(蓮下), 호는 백범(白凡). 황해도 해주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 출신. 김순영(淳永)의 7대 독자이며,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

인조 때 삼정승을 지낸 방조(傍祖) 김자점(金自點)이 권세 다툼에서 청병(淸兵)을 끌어들였다는 역모죄로 효종의 친국을 받고 1651년 사형 당하자, 화를 피하여 선조 되는 사람이 그 곳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김구의 생애 및 활동사항은 4세 때 심한 천연두를 앓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9세에 한글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아버지의 열성으로 집안에 서당을 세우기도 했다.

14세에 『통감』·『사략』과 병서를 즐겨 읽었으며, 15세에는 정문재(鄭文哉)의 서당에서 본격적인 한학수업에 정진했다. 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벼슬자리를 사고파는 부패된 세태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 사람으로 뽑혀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과도 만났다.

19세에 팔봉접주(八峰接主)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海州城)을 공략했는데, 이 사건으로 1895년 신천 안태훈(安泰勳)의 집에 은거하며, 당시 그의 아들 중근(重根)과도 함께 지냈다. 또한, 해서지방의 선비 고능선(高能善) 문하에서 훈도를 받았고, 솟구치는 항일의식을 참지 못하여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부대에 몸담아 일본군 토벌에 나서기도 했다.

을미사변에 충격을 받고 귀향을 결심,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鴟河浦)에서 왜병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21세의 의혈청년으로 국모의 원한을 푸는 첫 거사를 결행했다.

그 해 5월 집에서 은신중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고, 7월 인천 감리영(監理營)에 이감되었으며, 다음해인 1897년 사형을 확정했다. 사형집행 직전 고종황제의 특사로 집행이 중지되었으나, 석방이 되지 않아 이듬해 봄에 탈옥했다.

삼남일대를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고, 1899년 서울 새절(봉원사)을 거쳐 평양 근교 대보산(大寶山) 영천암(靈泉庵)의 주지가 되었다가 몇 달 만에 환속했다.

수사망을 피해 다니면서도 황해도 장연에서 봉양학교(鳳陽學校) 설립을 비롯하여, 교단 일선에서 계몽 · 교화사업을 전개하였으며, 20대 후반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진남포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Evert靑年會) 총무로 일했다.

이런 가운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상동교회 지사들의 조약반대 전국대회에 참석했으며, 이동녕(李東寧)·이준(李儁)·전덕기(全德基) 등과 을사조약의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서 읍소했다. 한편,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하여 구국대열에 앞장섰다. 1906년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 총감으로 학교설립을 추진하여, 다음해 안악에 양산학교(楊山學校)를 세웠다.

7충사추모제 민중당 대구 이대동 (전) 위원장(우측) 황순규 위원장(좌측)  / 사진 = 문해청 기자

1909년 전국 강습소 순회에 나서서 애국심 고취에 열성을 다하는 한편, 재령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이 되었다. 그때 비밀단체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으로 구국운동에도 가담했다. 그 해 가을 안중근의 거사에 연좌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 뒤 1911년 1월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모의 혐의로 안명근(安明根)사건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선고받았다. 1914년 7월 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 이감되었다가 가출옥하였다. 자유의 몸이 되자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東山坪) 농장관리인으로 농촌부흥운동에 주력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했다.

이듬해 헌법을 제정,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치면서 국무위원이 되었다. 1929년 재중국 거류민단 단장을 역임했다. 1930년 이동녕·이시영(李始榮)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했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의혈청년들로 하여금 직접 왜적 수뇌의 도륙항전(屠戮抗戰)에 투신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했다.

이에 중국군 김홍일(金弘壹) 및 상해병공창 송식마(宋式驫)의 무기공급과 은밀한 거사준비에 따라, 1932년 1·8이봉창의거와 4·29윤봉길의거를 주도한 바 있는데, 윤봉길(尹奉吉)의 상해의거가 성공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1933년 장개석(蔣介石)을 만나 한·중 양국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중국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를 광복군 무관양성소로 사용하도록 합의했다. 이것은 주목받을 성과였으며, 독립운동가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1934년 임시정부 국무령에 재임되었고, 1940년 3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에 취임했다.

같은해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을 임명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즈음하여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면서 임전태세에 돌입했다.

1942년 7월 임시정부와 중국정부 간에 광복군 지원에 대한 정식협정이 체결되어, 광복군은 중국 각 처에서 연합군과 항일공동작전에 나설 수 있었다. 그 뒤 개정된 헌법에 따라 1944년 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되고, 부주석에 김규식(金奎植), 국무위원에 이시영 · 박찬역 등이 함께 취임했다.

그리고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산시성[陜西省]시안[西安]과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한국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면서 미육군전략처와 제휴하여 비밀특수공작훈련을 실시하는 등, 중국 본토와 한반도 수복의 군사훈련을 추진하고 지휘하던 중 시안에서 8·15광복을 맞았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 일동과 함께 제1진으로 환국했다. 그 해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의 신탁통치결의가 있자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적극 앞장섰다. 오직 자주독립의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광복정계를 영도해 나갔다.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의 부총재에 취임하였고, 1947년 비상국민회의가 국민회의로 개편되자 부주석이 되었다. 그 해 6월 30일 일본에서 운구해온 윤봉길·이봉창(李奉昌)·백정기(白貞基) 등 세 의사의 유골을 첫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손수 봉안했다.

이를 전후하여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민주의원(民主議院)·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李承晩)·김규식과 함께 이끌었다. 1947년 11월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을 지지하면서, 그의 논설 「나의 소원」에서 밝히기를 “완전자주독립노선만이 통일정부 수립을 가능하게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1948년 초 북한이 국제연합의 남북한총선거감시위원단인 국제연합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함으로써, 선거가능지역인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김구는 남한만의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수립방침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 해 2월 10일「3천만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성명서를 통하여 마음속의 38선을 무너뜨리고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강력히 호소했다. 분단된 상태의 건국보다는 통일을 우선시하여 5·10제헌국회의원선거를 거부하기로 방침을 굳히고, 그 해 4월 19일 남북협상차 평양으로 향했다.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金枓奉) 등이 남북협상 4자회담에 임하였으나, 민족통일정부 수립 실패의 시련을 맛보고 그 해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다. 그 뒤 한국독립당의 정비와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일에 주력하며 구국통일의 역군 양성에 힘썼다.

남북한 단독정부가 그 해 8월 15일과 9월 9일에 서울과 평양에 각각 세워진 뒤에도 민족분단의 비애를 딛고 민족통일운동을 재야에서 전개하던 가운데, 이듬해 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에 있던 자택 경교장(京橋莊: 지금 삼성강북의료원 건물)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용] 김구 [金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인용)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

3번 째 인물은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이다. 출생은 고종 16년(1879)이고 사망은 1962년이다. 할아버지는 김도영(金道永)이고 아버지는 김호림(金頀林)이며 어머니는 인동장씨(仁同張氏)이다. 본관은 의성(義城)이고 자(字)는 문좌(文佐)이다.

일제의 감시 아래 한때는 우(愚)로 개명하였고 일제의 고문으로 다리를 다친 뒤에는 벽옹(躄翁)이라는 별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고종42년(1905) 을사보호늑약이 체결되자 스승인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리고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매국오적을 성토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07년 7월 정미7조약이 체결되자 “나라가 곧망하겠다. 지금 문을 닫고 글만 읽을 때가 아니다” 라고 생각하여 1908년 대한협회의 지부를 성주 향 사당에 설치하고 총무를 맡아 활동했다.

1909년 일진회(一進會)가 한일합병론을 제창하자 중추원에 그들의 반역을 성토하는 글을 보냈다. 단연회(斷煙會) 기금으로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설립하여 신교육을 시도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을 규합해서 본인과 곽종석, 김복한 등 137명의 유림대표들 연명으로 파리장서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김창숙은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파리장서를 번역하여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제출하고 외국 공관이나 중국 요인들 에게도 이 사실을 알렸다.

당시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수립 논의가 일어나자 참여하여 경북을 대표하는 의원이 되었고 1924년 만주와 몽고 접경지대의 황무지를 빌려서 개간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을 추진했다. 그곳에 군정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조달문제로 국내에 잠입하여 모금운동을 전개하다가 탄로 나자 다시 출국했다.

망명한 한국청년들의 교육에 힘써 능월(凌越)·오산(吳山) 등의 도움을 받아 50여 명의 학생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영어·중국어 강습을 받도록 주선했다. 독립운동을 고양시키기 위해 신채호(申采浩) 등과 독립운동지인 <천고天鼓>를 발행했고 이어 박은식(朴殷植) 등과 협력하여 <사민일보四民日報>도 발간했다.

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해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했으며,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27년 신병으로 상해 공공조계(公共租界)의 영국인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일본 영사관원에게 붙잡혀 본국으로 압송했다.

그 뒤 14년의 형을 선고받아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수사과정에서 발생한 고문과 수형생활로 인해 두 다리가 마비되어 형집행정지를 받고 출옥했다. 출옥한 뒤에도 창씨개명에 반대하는 등 항일의 자세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7충사추모제 진보연대 김선우 집행위원장 / 사진 = 문해청 기자

1945년 일제 말기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에 참여한 사실이 광복 직전인 7월에 발각되어 구속되었으며 왜관경찰서에서 광복을 맞이했다. 1946년 봄 서울에서 개최된 전국유림대회에서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 위원장으로 선출되고 성균관장을 겸임했다.

이어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하고자 성균관대학기성회를 결성했다. 이석구(李錫九)로부터 재단법인 학린회(學鄰會)의 토지재산을 기부 받고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병합하여 1946년 9월 25일 성균관대학설립을 인가받고 초대학장에 취임했다.

그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으며, 6·25 전쟁 이후 대통령 이승만의 하야 경고문사건으로 부산형무소에 40일간 수감되기도 했다. 1953년 2월 6일 전국에 흩어져 있는 향교재단을 규합하여 성균관대학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받고 초대총장에 취임했으나 1955년 재단 내 분규로 사임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심산만초心山謾草>와 <벽옹만초躄翁謾草>, 자서전인 <벽옹칠십삼년회상기躄翁七十三年回想記>가 있다. 1962년 사망하자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고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네이버블로그 인용)

진보당수 죽산 조봉암

4번 째 인물은 죽산 조봉암(曺奉岩, 1898년 9월 25일 ~ 1959년 7월 31일)이다.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에서 창녕 조씨인 아버지 조창규(曺昌奎)와 어머니 유씨(劉氏)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911년 그는 강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 농업보습학교로 진학했다. 졸업한 후 극심한 가난으로 중학 진학을 포기하고, 생계를 위해 조봉암은 강화군청 사환으로 복무했다. 19128년 대서보조원으로 활동했다.

1919년 잠두교회 청년단의 중심이 되어 3월 18일 강화의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이 날 아버지가 사망해서 시위 현장에서 떠나 체포는 면했으나, 4월 주동자로 결국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수개월간 복역하였다. 복역 중 심한 고문과 학대에 시달리면서 그의 생에 큰 전환기를 맞이했다. 1920년 서울로 상경하여 YMCA 중학부에서 수학하다가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준비한다는 혐의로 평양경찰서에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1921년 7월 7일 일본으로 건너가 엿장수를 하며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입학하고, 주오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였다. 박열, 김약수 등과 아나키스트 모임 흑도회(黑濤會)에 조직했지만 관념적 유희에 그쳐 실망하게 된다.

보다 강력한 조직력이 있어야만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공산주의에 입각한 독립 쟁취를 목표로 변화했다. 러시아혁명을 주도한 볼셰비즘의 영향으로 북성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하다가 1922년 여름에 귀국했다.

1922년 10월 소련에서 열린 베르흐네우딘스크 대회에 한국인 공산주의자 대표로 참석했고, 12월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 속성과에 입학하였다. 1923년 여름 폐결핵으로 중퇴하고, 9월 비밀리에 국내에 잠입했다.

1924년 신흥청년동맹을 결성하고 해주, 평양, 인천등지에서 강연활동을 하였고, 6월 동지인 김조이와 결혼했다. 9월 조선일보 기자가 되었다. 1925년 4월 17일 경성에서 열린 조선공산당의 조직에 참여하고, 4월 18일 서울에서 박헌영, 김단야(金丹冶) 등과 박헌영 집에서 비밀리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하고 간부가 됐다.

1925년 4월말 조선공산당을 승인받기 위하여 모스크바로 출국했다. 도중에 상하이에서 여운형을 방문했다. 8월 모스크바에서 도착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공산당을 승인받는다.

1926년 1월 상하이로 가서 김찬, 김단야 등과 함꼐 조선공산당 해외부를 설치했다. 5월 만주로 건너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조직하고, 책임비서에 선출되었다. 1926년 7월 재상하이 코민테른 극동부 조선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27년 1월 김이옥이 상하이로 찾아와 동거했고, 4월에 임정 요인들을 상대로 민족유일당 운동을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4월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 장쑤성위원회 산하 한인지부를 조직하고 책임자가 되었다.

1928년 9월 30일 김이옥이 딸 호정을 출산했다. 1931년 1월 중국공산당 상하이지부 서기가 되었다. 1932년 9월 28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 프랑스공원에서 체포되었고 12월 고국으로 압송되었다.

1933년 김이옥, 조호정 모녀가 귀국했지만 10월 26일 강화도에서 김이옥 여사가 돌아가셨다. 12월 27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7년을 선고받았다. 고문으로 상한 손가락 7개를 동상으로 잃어야 했다. 1939년 7월 석방되어 인천으로 왔고, 김조이와 재결합하였다.

공산주의와 결별하고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면서 1945년 1월 예비구금령으로 구속, 헌병대 감방에 갇혔고, 8월 15일 석방되어 여운형이 마중을 나왔다. 8월 18일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를 조직했다.

1946년 2월 7일 인천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하고 회장이 되었지만, 5월 사임하고, 6월 23일 "우리는 노동계급의 독재나 자본가 계급의 전제를 반대한다"는 내용의 전향성명서인 “비공산 정부를 세우자”를 인천시민대회장에서 살포하고 각 신문사에 발표했다.

1946년 9월 인천 우익인사와 교류하며 통일건국회를 결성하고 10월에는 하지 중장을 만났다. 1947년 4월 25일 윤봉림과의 사이에서 딸 임정이 출생했다. 1948년 인천 을구 제헌의원에 당선되었다.

6월 1일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이 되어 기본권 보장을 위해 한민당 안을 반대했다. 85명의 무소속 의원들을 규합해 무소속 구락부을 결성하고 대표가 되었다.

1948년 8월 2일 불후의 업적 토지개혁을 추진한 초대 농림부 장관에 취임, 농지개혁법을 입안했다, 세계 최고의 토지균등성을 확보하여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기반을 놓았다.

또한 곡식의 잉여생산량을 정부에서 매입하는 양곡매입법의 제정을 추진하였다. 이는 시장경제논리에 어긋난다는 한민당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회에 상정하여 48년 8월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농업협동조합 설립에도 적극적이었다. 1949년 2월 22일 농지개혁에 반대하는 한민당의 견제로 인한 관사 수리비 유용혐의로 농림부장관직을 사임하였지만, 이후 무혐의로 밝혀진다. 7월 23일 아들 규호가 출생했다.

7충사추모제 노무현재단 대구경북지역위원회 손혁수 사무처장 / 사진 = 문해청 기자

1950년 인천병구에서 무소속으로 제2대 총선에서 당선되었고, 국회부의장이 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국회는 서울을 사수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국무위원 대부분이 피난을 떠났다. 24명의 의원들이 전란 속에 납북되거나 월북했고 나머지는 무작정 ‘남쪽으로’ 도망쳤다.

그 와중에 국회의 품위를 지킨 건 부의장 조봉암이었다. “가족들 대신 국회 기밀서류를 싣고 남하했다. 그 때문에 정작 자신의 부인을 데려오지 못했고, 서울에 남은 부인 김조이 여사는은 나중에 북한군에 강제로 납북돼 행방불명이 되었다

서울은 조선인민군이 점령하였고 “반역자 조봉암은 체포하면 죽인다.”라는 방이 붙여져 있었다. 8월 26일 윤봉림과의 사이에서 딸 의정이 출생했다. 1952년 제2대 후반기 국회부의장에 재선되었고, 제2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여 2등으로 낙선했다. 1954년 이승만정권의 탄압으로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입후보 등록에 실패했다.

1954년 11월 자유당의 연임에 저항하는 호헌동지회에 참여하려 했다. 1955년 1월 호헌동지회 총회가 열릴 때 조봉암의 참여를 놓고 찬성파와 반대파로 분열했다. 결국 조봉암의 참여는 좌절되었고, 1955년 12월 22일 서상일, 박기출, 이동화, 김성숙 등과 진보당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대표가 되었다.

제3대 국회의원선거 인천 병구에 입후보하는 조봉암 벽보는 1956년 “책임정치 수립, 수탈 없는 경제 실현, 평화통일 성취” 등을 내걸고 대통령선거에 출마, 야당 대통령후보 단일화 논의 중 신익희 후보가 사망했다. 이어 5월 15일 대통령선거에서 216만여 표를 얻어 2등으로 낙선했다.

11월 진보당 창당대회를 열고 개회사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애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착취당하는 것이 없이 응분의 노력과 사회적 보장에 의해서 다같이 평화롭고 행복스럽게 잘살 수 있는 세상, 이것이 한국의 진보주의라 해도 좋을 것이다”라고 밝히고 당위원장이 되었다.

1958년 1월 13일 체포, “평화통일론이 북진통일이라는 국시의 위반이며 간첩 박정호와 접선했다”는 조작된 혐의를 모두 부인하였다. 7월 2일 1심 결심공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이 선고되었다.

9월 4일 2심에서는 양이섭이 1심 진술을 번복해 “고문에 못 이겨 허위진술을 했으며 북한에서 공작금을 받지 않았고 조봉암에게 준 돈은 후원금이지 공작금으로 준게 아니다”라고 진술했다. 10월 25일 2심 결심 공판에서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진보당을 결성하고 간첩행위를 했다고 사형을 선고했다.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장택상과 윤치영의 구명운동에도 불구하고 1959년 2월 27일 대법원에서 사형을 선고하였고, 7월 30일 재심청구를 기각하고 7월 31일 오전 11시 사형이 집행되었다. 8월 2일 망우리 묘지에 안장되었다.

묘소 앞 돌에는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가 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한가?”라고 적혀있다.

북한에서 6.25전쟁 당시 반역자, 배신자, 변절자로 낙인에 찍히고 공격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애국렬사릉에 가묘를 설치하였고, 1990년대 이후에는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 이는 조봉암의 명예회복에 큰 장애로 작용했다.

1991년 윤길중 의원이 “죽산 조봉암 사면 복권에 관한 청원”을 작성 국회의원 86명의 서명을 받아 국회에 제출하였다. 2001년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강화역사관 입구 진해공원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2006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국가가 피해자와 유족에게 총체적으로 사과하고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하며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라고 권유하였다. 2008년 8월 15일 김조이 여사에게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2009년 사회원로와 여야 정치인 145명이 “죽산의 명예회복 청원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2011년 1월 20일 대법원 전원합의부의 재심 무죄판결문을 다음과 같다. “피고인은 일제강점기하에서 독립운동가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였고, 광복 이후 조선공산당을 탈당하고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여 제헌국회의 국회의원, 제2대 국회의원과 국회 부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2년과 1956년 제2, 3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도 하였다. 또한, 피고인은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농지개혁의 기틀을 마련하여 우리나라 경제체제의 기반을 다진 정치인이었다.

그 후 진보당 창당과 관련한 이 사건 재심대상판결로 사형이 집행되기에 이르렀는바, 이 사건 재심에서 피고인에 대한 공소사실 대부분이 무죄로 밝혀졌으므로 이제 뒤늦게나마 재심판결로써 그 잘못을 바로잡는다.” 현재 죽산 조봉암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서훈 추서를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한국민족대백과 인용)

의병 총사령 허위

5번 째 인물은 허위 선생이다. 구한말의 의병장으로 독립유공자이다. 1895년(고종 32) 8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이어 단발령이 내려져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김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899년 관리로 등용되어 성균관박사, 의정부참찬 등을 지냈다.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일본을 규탄하는 격문을 살포했으며, 그해 12월에는 일진회 반대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정우회를 조직했다.

이 일로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었다가 의정부 관직을 사임하고 풀려났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고, 이어 군대가 해산되자 9월 연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어 연합의병부대를 편성하여 서울 근교까지 진격했으나 패배했다. 1908년 6월 경기도에서 일본군 헌병대에 붙잡혀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다음백과사전 인용)

근민당수 여운영

6번 째 인물은 여운형 이다. 경기도 양평 출신이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회숙(會叔). 호는 몽양(夢陽)이다. 아버지는 여정현(呂鼎鉉)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다. 14세 때에 유세영(柳世永)의 장녀와 혼인했으나 사별하고, 충주의 진상하(陳相夏)와 재혼했다.

1900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흥화학교(興化學校)와 통신원 부설의 관립 우무학당(郵務學堂)에서 수학하였다. 1911년 평양의 장로교회연합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수학하고, 1914년 중국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1907년 경기도 양평에서 국채보상운동의 지회를 설립하여 활동하였으며, 이 무렵 개신교에 입교하였다. 1908년 미국인 선교사 클라크(Clark. C. A) 목사의 조수로 있으면서 기호학회에 참여하여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계몽운동을 주도하던 승동교회(勝洞敎會)를 출입하였다. 1911년 강원도 강릉에서 남궁억(南宮檍)의 후원으로 운영되던 초당의숙(草堂義塾)의 교사가 되어 청년교육에 힘썼다.

1914년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南京)에서 활동하다가 1917년 상하이(上海)로 활동무대를 옮기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8년에 상해고려민친목회(上海高麗民親睦會)를 조직하였으며, 같은 해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조직을 주도하고 총무간사로 활동했다.

1919년 재일유학생의 2·8독립선언과 3·1운동에 관여하고, 김규식(金奎植)을 상하이로 초빙하여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로 결정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수립에 힘썼으며 임시의정원 의원과 외무부 차장으로 활동했다. 상하이에서 아동들에게 독립사상과 애국정신을 교육시키기 위해 인성학교(仁成學校)를 설립했다. 같은 해 일본을 방문하여 일제 고위관리들과 여러 차례 회담하면서 일제의 자치제 제안을 반박하고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

1920년 사회주의 계열의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極東被壓迫民族大會)에 참석했다. 같은 해 김구(金九)·손정도(孫貞道) 등과 한인노병회(韓人勞兵會)를 조직하여 노농병 양성과 군비 조달에 힘썼다.

1923년 임시정부의 진로를 비롯한 독립운동의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참석하여 임시정부의 개조를 주장했다. 1925년 쑨원(孫文)의 권유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하고 중국혁명운동에 참여했다.

1926년 중국혁명운동이 실패한 후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9년 상하이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1932년 출옥하였다.

1933년 조선중앙일보사(朝鮮中央日報社) 사장직에 취임했으며, 1934년 조선체육회 회장직을 맡았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신문이 폐간되어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1942년 치안유지법 등의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1944년 8월 일제의 패전을 예상하고 독립운동과 국가건설을 위하여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을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건국동맹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농민동맹(農民同盟)·부인동맹 등을 조직했다. 옌안(延安)의 독립동맹(獨立同盟)과 제휴하여 연합작전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건국 준비를 위해 조선건국준비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의 결성을 주도하고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해소되고 수립된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의 부주석(副主席)이 되었다.

김구·이승만·안재홍·송진우 등과 만나 국가건설 방안 등을 협의했다. 11월에 건국동맹을 모태로 조선인민당(朝鮮人民黨)을 결성하여 당수직에 맡았으며, 미군정 장관의 고문을 맡기도 하였다.

1946년 2월 북한을 방문하여 조만식(曺晩植)과 김일성(金日成)을 만나 미소공동위원회의 대처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좌파 세력의 연합단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의 공동의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된 후 김규식 등과 함께 좌우합작과 민족통일에 기반을 둔 미소공동위원회 재개와 성공을 목표로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했다.

1946년 8월 조선인민당 당수직을 사임하였으며, 9월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 3당 합당문제를 포함한 남한 현안에 대한 의견교환을 위해 북한을 방문하였다. 11월 사회노동당(社會勞動黨) 준비위원회의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남조선노동당(南朝鮮勞動黨)과 합동을 제의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정계은퇴를 선언하였다.

1947년 1월 우파 세력의 반탁운동과 좌파 세력의 편협성을 비판하는 담화를 발표하면서 정계에 복귀했다. 3월 신당 결성을 위한 준비 활동에 착수하여 5월에 근로인민당(勤勞人民黨)을 창당하고 위원장을 맡아 활동했다.

김규식·김창숙(金昌淑)과 함께 통일적 임시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민족통일전선운동을 펼치는 등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이를 반대하는 세력에게 십여 차례 테러를 당하였다.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韓智根)에게 저격을 당해 서거하였다.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용)

노동열사 전태일

7번 째 인물은 전태일이다. 전태일은 1948년 8월 26일 대구시 중구 남산동에서 전상수(全相洙)와 이소선(李小仙) 사이에서 2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갔으나 봉제 기술자였던 아버지 전상수가 파산하는 바람에 1954년 가족이 모두 서울로 올라왔다.

가난 때문에 거의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남대문초등학교 4학년에 다니던 1960년에 학생복을 제조하여 납품하던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고 큰 빚을 지는 바람에 학교를 그만두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동대문 시장에서 물건을 떼어다 파는 행상을 시작했다.

17살 때인 1965년 학생복을 제조하던 청계천 평화시장의 삼일사에 보조원으로 취직했다. 일찍이 아버지에게서 재봉 일을 배웠던 전태일은 기술을 빨리 배워서 1966년에는 재봉틀을 다루는 재봉사가 되어 통일사로 직장을 옮겼다. 이 무렵 빚 때문에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도 다시 모여 살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전태일이 일하던 청계천의 평화시장은 인근의 동화시장, 통일상가 등과 함께 의류 상가와 제조업체가 밀집되어 있는 곳이었다. 1층은 상가로 사용되었고 2~3층에는 500여개의 제조업체가 모여 있었다.

공장들은 모두 영세한 규모여서 작은 곳은 6.6m²의 공간에 13명이 일하는 곳도 있었고, 큰 곳은 40m²의 공간에 50여명이 일했다. 이처럼 좁은 공간에 다락을 만들어 노동자들을 밀집시켜 일을 시키다보니 노동환경이 매우 열악했다.

노동자들은 햇빛도 비추지 않는 좁은 다락방에서 어두운 형광등 불빛에 의존해 하루 14시간씩 일을 했다. 환기 장치가 없어서 폐 질환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많았다. 대부분 여성으로 특히 ‘시다’라고 불린 보조원은 13~17세의 어린 소녀들로 초과근무수당도 받지 못한 채 극심한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렸다.

자신이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주변 사람들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았던 전태일은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환경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서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는 함께 일하던 여성 노동자가 폐렴에 걸린 상태에서 해고되자 그녀를 도우려고 애쓰다가 자신도 해고되는 일을 겪기도 했다. 이후 전태일은 재단사 보조를 거쳐 상대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던 재단사가 되었으나 동료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1968년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어 그것을 공부하면서 법조차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는 의지를 더욱 다지게 되었다. 그래서 1969년 6월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바보회’를 만들어 설문으로 평화시장의 노동환경을 조사하며 근로기준법의 내용을 알렸다.

그러나 이 사실이 사업주들에게 알려지면서 전태일은 해고되었고, 평화시장에서 일할 수 없게 되었다. 한동안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지내던 전태일은 1970년 9월 평화시장으로 돌아와 삼동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다시 노동환경을 조사하는 설문지를 돌려 노동청, 서울시, 청와대 등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이러한 내용이 《경향신문》에 실려 사회적 주목을 받자 삼동회 회원들은 노동환경 개선과 노동조합 결성을 위해 사업주 대표들과 협의를 벌이려 하였다.

그러나 행정기관과 사업주들의 조직적인 방해로 무산되었다. 그래서 전태일과 삼동회 회원들은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벌여 근로기준법이 노동자의 권리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현실을 고발하기로 했다.

경찰의 방해로 시위가 무산되려는 상황에 놓이자 전태일은 자신의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인 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병원에 실려 간 전태일은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기고 그날 세상을 떠났고, 경기도 마석의 모란공원에 매장되었다.

전태일의 죽음은 최소한의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노동자의 현실을 고발하여 사회적으로 노동문제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노동자 스스로 자신의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에 나서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11월 16일 이후 서울대ㆍ고려대ㆍ연세대ㆍ이화여대 등에서 농성과 시위가 벌어졌으며, 종교계에서도 개신교와 천주교의 공동 추모예배가 실시되었다. 노동자의 저항도 잇따라 그해 11월 25일 조선호텔 노동자이던 이상찬이 분신을 시도한 것을 필두로 1972년 유신체제가 성립되기 전까지 노동자들의 저항과 단체행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전태일은 하루 14시간이 넘는 고된 노동 속에서도 독서와 일기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가 쓴 일기는 많이 파손되고 유실되었지만 1967년 평화시장에서 일하면서 쓴 일기는 상당 부분 남아 있다.

그의 일기와 편지, 관계기관에 보낸 진정서 등은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돌베개, 1988)라는 책으로 정리되었으며, 일기와 주변 사람들의 구술 등을 기초로 그의 삶을 기록한 《전태일 평전》(돌베개, 1983)도 전해진다.

1995년에는 그의 삶을 영화로 옮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박광수 감독)이 국민모금 방식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그가 자신의 몸을 불태웠던 청계천 6가의 ‘버들다리’ 위에 2005년 그의 정신을 기리는 반신 부조가 설치되었다.[네이버 지식백과 인용] 전태일 [全泰壹] (두산백과 인용)

문해청 기자 jajudol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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