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 김현태 기자] 영화 '명당'이 알고 보면 흥미로운 부분을 더한다. 영화는 땅의 기운을 점쳐 인간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천재 지관 박재상(조승우 분)과 왕이 될 수 있는 천하명당을 차지하려는 이들의 대립과 욕망을 그린 작품이다. 풍수지리 학문에서는 조상 및 몇 대 손까지 그 집안 이력까지도 알 수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명당이란 산천의 좋은 기(氣)가 모여 있는 장소이다. 맑고 밝은 기가 모여서 주변으로 흩어지지 않고 응거가 되는 장소가 바로 명당 혈(穴) 자리인 것이다. 유골이 땅속에 묻혀서 있게 되면 산천의 맑은 기를 받아서 흡수하게 됨으로써 유골이 노랗게 황골(黃骨)이 되고 이것은 수 백 년 내지는 수 천 년까지도 형태가 변하지 않고 보존이 된다. 일반적인 유골은 토질에 따라서 몇 십 년 내지는 몇 년 내로 녹아서 없어지거나 소골이 되어서 뼈의 형태가 없어지게 된다. 

▲ 사진: 신촌

따라서 유골이 황골로 변하게 되면 영구적으로 보존이 되고 그 후손들은 조상의 묘소에 가게 되면 명당의 기운을 받아오게 되고 대대로 몸이 건강하고 총명하여 두각을 나타내고 결국 부귀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뼈대 있는 집 자손이란 말은 조상을 명당자리에 모셔두었으므로 뼈가 황골이 되어 보존이 되고 있다는 뜻이다. 

특히 영화에서 특유의 강렬한 아우라를 뿜어내며 박재상과 흥선을 비롯한 인물들의 갈등 형성에 상당한 역할을 하는 지관 정만인(박충선 분)은 실존 인물로, 흥선이 2명의 왕이 나오는 묏자리를 찾는 데 조언을 했다고 전해진다. 

살다 보면, 문득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의 유래가 궁금해지는 순간이 있다. 지금의 서울, 이런 내용을 근거로 뉴스프리존은 명당을 찾아 보았다. 젊은 사람들이 많이 머무는 중심대로 풍수(명당)을 살펴보기로 했다. 정확한 행정구역 상 명칭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이다. 신촌이라는 말은 ‘새터말’에서 유래 했다고 한다.

조선 초기 태조 이성계가 새로운 도읍터를 찾던 시기, 당시 신하들은 신촌에 새로운 수도를 만들자고 주장했으며 이에 따라 태조가 직접 신촌동 일대를 돌아보고 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때부터 신촌동 일대를 새터, 새터마을, 새터말 등 다양하게 불렀다고 한다. 오늘날 새터라는 단어는 보통 새내기 배움터를 지칭할 때 주로 쓰이지만 순우리말로 새터는 새로운 터의 의미가 있다. 새터를 한자로 표기한 결과 ‘새로운 마을’이라는 뜻의 신촌(新村)이 됐다.

▲ 사진: 경북궁

그러나 정작 도읍은 당시 신촌이 아니라 지금의 경복궁 위치에 지어졌다. 신촌을 서대문구 신촌동만을 일컫는 말로 쓰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엄연히 따지자면 신촌동은 연세대학교 일대와 경의 중앙선의 신촌역까지만 포함하는 개념이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지하철 2호선을 나오면 만나는 ‘신촌’은 창천동에 속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핫 플레이스’ 이태원의 경리단길 이름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경리단길의 유래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먼저 이태원동의 이름에 대해 알아보자. 이태원이라는 지명은 두 가지 속설이 있다. 하나는 조선 효종 때 이태원이라는 명칭이 생겼다는 설로 배나무가 많아서 이름이 지어졌다는 주장이다. 또 다른 주장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끌려가 아이를 가진 여성들이 모여 살면서 이태원이 됐다는 설이다. 두 주장은 고문서에서 이태원의 한자 표기 차이에 따라 발생한다. 전자는 이태원의 한자 표기를 배나무 이(梨), 클 태(泰, 우리가 보통 아는 太와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담 원(院)이다. 후자는 다를 이(異), 아이 밸 태(胎), 담 원(院)이다. 무엇이 정확한 주장인지는 당시 사람들만이 알겠지만 옛날에 배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더 신빙성을 얻고 있다.

▲사진: 경리단길

그렇다면 경리단길은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까. 이태원의 유래에 비하면 경리단길은 정말 짧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경리단길 초입부에는 국군재정관리단이 있다. 이전에는 국군재정관리단이라는 명칭이 아니라 육군중앙경리단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경리단길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 경리단길은 인근에 위치한 미군부대와 이태원의 영향으로 외국 느낌이 나는 식당과 술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후 경리단길에서 연예인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순식간에 명소로 자리 잡았다. 경리단길이 유명해지면서 망원동 유명 거리를 망리단길, 한성대입구역 근처의 거리를 ‘한리단길’이라고 지칭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

서울의 왕십리는 유동인구가 굉장히 많은 지역이다. 지하철 2호선과 5호선, 경의·중앙선이 지나가고 있으며 지하철 분당선의 종점이기도 하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지나는 왕십리이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왕십리의 유래에 대해 알고 있을까. 왕십리는 앞서 말한 신촌처럼 도읍을 정할 때 지명이 정해졌다. 왕십리의 유래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먼저 이야기의 핵심 인물인 무학대사에 대해 알아보자. 무학대사는 고려말부터 활동한 승려로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했다. 자신이 지지한 이성계가 새로운 왕이 될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했으며 조선이 개국하자 왕사(왕의 고문역할)가 되어 회암사에서 지냈다고 한다. 풍수지리에 능해 조선의 도읍을 정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전해오는 설화에 따르면 무학대사는 경복궁이 지금의 자리에 들어서는 것을 반대했다. 지금의 경복궁 자리에 궁궐이 들어서면 나라에 큰 화가 닥쳐 궁궐이 불타 없어진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 말과 연관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복궁이 불탔다.

▲사진: 왕십리길

왕십리 지명은 무학대사가 도읍을 정하기 위해 한양(지금의 서울)으로 왔을 때 유래됐다. 앞서 이성계가 신촌에 도읍을 정하려 했던 것처럼 무학대사 역시 왕십리에 도읍을 지을 것을 추천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도선대사(신라 말기의 승려로 풍수지리의 대가)의 변신인 늙은 농부로부터 10리를 더 가라는 가르침을 받았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늙은 농부가 아니라 학의 울음소리가 왕십리와 비슷해 무학대사가 기이하게 여겨 10리를 더 가서 지금의 도읍 위치를 발견했다는 설화도 존재한다. 실제로 왕십리 일대는 조선이 건국된 도읍 자리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다고 한다.

개경을 버리고 한양을 선택한 까닭은

 주거지로서 좋은 조건을 가진 서울지역은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무리지어 살았다(암사동 선사유적). 백제의 발상지(풍납동, 하남 위례성)이기도 한 이 지역은 한반도의 중앙이라는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삼국이 패권을 다투는 요충지가 되어 그 주인이 백제, 고구려, 신라 순으로 바뀌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한산(漢山 : 백제), 남평양(南平壤 : 고구려), 신주(新州 : 진흥왕), 남천주(南川州 : 진흥왕 11), 북한산주(北漢山州 : 진평왕), 한주(漢州 : 통일신라) 등으로 불리다가 고려시대에 이르러 개경, 동경(東京)과 함께 3경의 하나인 남경(南京)으로 불리던 곳이었다. 940년 고려 태조 때 양주(楊州)로 개칭되었으며 한주 역시 광주(廣州)로 개칭되었다.

서울지역은 그 뒤 983년 성종 때 양주목으로 승격되었다가 1011년 현종 때 다시 지사주(知事州)로 격하되었고, 1067년 문종 때 비로소 남경으로 승격되었다. 남경은 1308년 충렬왕 34년 충선왕의 관제개혁으로 한성부(漢城府)로 바뀌었으며 그 지역도 지금의 서울과 그 부변 일대로 크게 축소되었다. 그 뒤 1356년(공민왕 5)에 이르러 반원개혁과 동시에 국가의 제도를 문종 때의 것으로 환원할 때 한성부에서 남경으로 다시 정비되었다.

고려말에 이르러서는 서울(한양)로 수도를 옮기자는 논의가 도참사상에 바탕을 두고 몇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고려시대 천도론 경우 전기에는 문종·숙종대 남경경영(南京經營), 명종대 삼소경영(三蘇經營) 등 천도 혹은 순주론(巡駐論)이 성행하였다. 그러나 원 간섭기 이후에는 특별한 논의가 없어서 삼경(三京)·삼소(三蘇) 등에 대한 관심도 희박해졌다. 고려말에 들어서 다시금 제기된 천도논의는 공민왕 때 한양(漢陽)·백악(白岳)·강화(江華)·평양(平壤)·충주(忠州) 등 여러 지역에 걸쳐 천도가 논의되었고 실제로 백악으로 천도가 이루어진 경우도 있었다.

우왕 때는 재위 초반에 지세를 살핀 지역은 철원(鐵原)과 연주(漣州) 지역으로 모두 임진강(臨津江) 상류에 위치한 지역들이었다. 정치적 불안정에서 제기된 남경천도론은 정치적 전환국면이 필요함에 따라 제기되었던 것이고, 이 이면에는 남경의 지역적 특성을 이용한 새로운 도시개발이라는 목적도 있었다.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천도론 역시 이러한 자연지리적 측면에서 남경을 살폈을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기 태조대의 한양천도 목적도 이와 비슷한 면에서 출발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건국과 한양천도 과정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 일파는 우왕, 창왕마저 신씨(辛氏)라 하여 축출하고, 이듬해 11월에는 이성계의 7째 아들 방번(方蕃)의 처와 이종사촌간인 정창군(定昌君) 요(瑤)를 공양왕으로 옹립하였다. 이성계 일파는 공양왕 3년 과전법의 실시와 아울러 정치·군사·경제적 기반을 장악하게 되었으나, 정몽주·이색(李穡)·이숭인(李崇仁) 등의 반대세력 또한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위화도 회군 장면

그러던 중 공양왕 4년 말에서 떨어진 이성계의 문병을 마치고 돌아가는 정몽주(鄭夢周)를 이방원의 사주를 받은 조영규(趙英珪) 등이 선죽교(善竹橋) 부근에서 살해한 다음 공양왕의 양위를 강요하고, 이성계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함으로써 공양왕 4년 고려왕조가 멸망하고 이씨왕조가 건국되게 되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즉위교서에서 국호(國號)를 그대로 고려로 쓴다고 하였지만, 건국문제로 명에 파견되었던 조림(趙琳)이 귀국하면서 가지고 온 명나라의 자문(咨文)에 “국호는 어떻게 고쳤는지 급히 보고하라” 라는 주문이 있게 되었다. 이를 기회로 국호 제정문제가 대두되었다. 당시 국호로 거론된 것은 조선과 화령(和寧)이었다. 조선은 우리나라의 오랜 국호였던 단군조선, 기자조선에서 취한 것이며, 화령은 이성계의 고향인 화령부(지금의 영흥)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태조 2년 조선에서는 명나라에 ‘조선’과 ‘화령’ 2가지를 국호로 보냈으며, 주문사(奏聞使) 한상질(韓相桎)이 귀국하면서 그 자문에 “동이의 국호는 오직 조선이라 칭한 것이 아름답고 또한 그 유래가 오래니 그 이름을 따르는 것이 좋겠다”라는 명 태조의 뜻을 전함으로써 ‘조선’이란 국호를 선포하게 되었다. 이렇게 국호가 제정되는 와중에서 천도문제가 거론되었다.

새 국가의 면모와 인심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도읍지의 건설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태조가 즉위한 지 26일만에 한양으로의 천도를 결정하였으나, 이에 대한 반대가 제기되어 잠시 주춤하였다. 이후 태조 2년에 태조가 직접 공주 계룡산(鷄龍山) 아래를 도읍지로 예정하고 친히 계룡산의 형세를 보고는 계룡산에 신도 건설을 명하였다. 

그러나 경기좌우도관찰사 하륜(河崙)의 상언에 따라 중지되었다. 이때 하륜이 신도안(新都安)을 새로운 도읍지로 반대한 이유는 남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동서북 지방과 교통이 불편하며, 풍수적으로 쇠퇴하고 패망할 땅이라는 이유 등이었다.

계룡산에 도읍지 건설이 중단된 후 새롭게 무악(毋岳 : 오늘날의 서대문구 연희동, 신촌 일대)이 선정되었으나, 서운관 관원인 윤신달(尹莘達), 유한우(劉旱雨) 등이 풍수지리적으로 좋지 못하다는 지적에 따라 왕사(王師)인 무학(無學)의 자문을 받으면서 새롭게 결정된 곳이 고려시대 남경(南京)터로 결정되었다.

천도 다음해인 1395년 1월에 대신들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주택을 건설할 대지를 나누어 주었으며, 같은 해 6월에는 새로운 수도의 명칭을 한양부에서 한성부로 고치고 5부 52방의 행정구역 설정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종묘(宗廟)와 경복궁을 건설하였으며, 성곽이 만들어지는 등 수도건설이 착실히 진행되어 조선 왕조 500년의 도읍지로써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제1차의 왕자의 난후 정종은 개성으로 천도하였다가, 태종 5년 다시 한양으로 재천도하였다. 

< 수선전도 >를 바탕으로 내사산과 중궐, 종묘, 사직 부분을 나타내었다.

조선의 수도 한양, 모양만들기

 조선초기 서울의 실질적인 도시 건설의 과정은 태조가 한양천도를 결정한 다음달인 1394년 9월초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여 신수도의 도시 건설을 구상함으로 시작되었다. 이어서 권중화·정도전·심덕부 등을 서울에 보내어 종묘·사직·궁궐·관아·시전·도로의 기지를 선정, 구확하게 하고 심덕부 등 일부는 현지에 남아 건설공사를 감독하였다. 그리고 천도는 건설공사가 완성되기 전인 같은 해 10월에 이루어졌다. 서울은 수도로서 갖추어여 할 시설들이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으므로 11월에는 공작국(工作局)을 설치하여 종묘와 궁궐 그리고 관청들의 공사를 시작하였다.

▲사진: 조선의 수도 한양

천도 다음해인 1395년 1월에는 대신부터 서민들에 이르기까지 주택을 건설할 대지를 나누어 주어 본격적인 도시의 형성이 시작되었으며 6월에는 수도의 명칭을 한양부에서 한성부로 고치고 5부 52방의 행정구역을 확정지었고, 9월에는 종묘와 경복궁이 완성되었다.

이로서 서울의 대체적인 틀은 형성되었으나 도시를 둘러싸고 시역을 확정짓는 성곽이 없는 상태였다. 성곽은 궁궐과 종묘공사가 마무리될 무렵 도성조성도감(都城造成都監)이라는 성곽 수축을 담당할 기관을 설치하여 총 5만9천5백여척에 이르는 성을 자리를 실측, 결정하고 다음해 1396년 1월부터 시작하여 두 차례의 공사 끝에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이로써 약 4년간에 걸친 태조의 새로운 수도로서 서울 건설은 윤곽을 갖추었다. 그러나 정종이 개성으로 환도함으로 인해 서울은 방치되어 성곽은 허물어지고 건물은 퇴락해버리게 되었다.

1405년 태종이 서울로 다시 환도한 후 시전 행랑의 건설을 시작하여 간선도로의 구획을 확정함으로써 서울은 재정비되기 시작하여, 1422년 세종이 태조때 건설한 성곽을 석축으로 개축하여 성곽의 둘레를 확정하고, 1430년 서울의 중심을 동서로 흐르는 개천의 정비 공사를 마무리함으로써 조선 전기 서울의 건설은 일단 완성을 보게 되었다.

조선초 서울을 건설할 때 가장 중요시했던 시설물은 종묘·사직·궁궐·관아·시전·도로 등이었다. 이들 도시 시설의 배치를 결정하는 기준이 된 것은 유교적 원리였다. 유교적 국가제도의 집대성인 『주례(周禮)』에서는 궁궐이나 조정의 위치 등에 대해서는 “좌묘우사(左廟右社)”와 “전조후시(前朝後市)”라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즉 궁궐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종묘를, 우측에는 사직단을 설치하며, 궁궐의 앞쪽에는 조정을, 뒷쪽에는 시장을 설치한다는 것이다. 서울의 경우 주궁인 경복궁이 주산인 북악(北岳) 아래 배치되고 부주산격인 응봉(鷹峰) 아래 창덕궁이 배치되어 산을 배경으로 남향하여 궁궐이 배치되었다.

따라서 주궁인 경복궁이 기준이 되어 그 앞에는 중앙관청들이 모인 육조(六曹) 거리가 형성되었으며 경복궁에서 남쪽을 향하여 좌측에 해당하는 동쪽에는 종묘, 그리고 우측에 해당하는 서측에는 왕이 백성을 위하여 곡물신과 토지신에게 제사하는 사직(社稷)이 배치되었다. 다만 시장의 경우 궁궐이 북단에 산을 배경으로 잡은 서울의 지형구조상 가능한 배치가 아니었다.

도시 구조를 결정하는 또 한가지 중요한 요소는 도로체계이다. 조선초 서울의 대체적인 간선도로체계는 태조가 수도를 건설할 당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후 정종이 개성으로 환도한 후 흐트러졌다가 태종이 다시 서울로 환도한 이후 정비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태종때 진행된 시전 행랑의 건설은 서울의 도로체계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시전행랑은 일종의 상설 노점상가로서 조선시대 시전상인 상행위를 하던 곳이다. 이 시기 행랑은 서울의 동서 중심도로인 종로 일대와 경복궁에서 종로에 이르는 현재의 세종로, 창덕궁에서 종로 3가에 이르는 돈화문로, 종각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간선도로의 양측에 건설되었으며 궁궐 앞의 일부부인 경복궁 앞과 창덕궁 앞은 정부관처로 쓰이기도 하였다. 

 서울의 콩팥으로 수려한 장관을 이루는 북한산 자락, 백악(白岳)을 바라보며 국민대가 자리한 성북구(城北區)는 1949년 8월 13일자 대통령령 제159호에 의해서 법정구로 설치되었다. 도성 밖인 숭신방(崇信坊) 외계(外契)에 위치한 정릉동(貞陵洞)은 다 알다시피, 태조 이성계의 제2비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정릉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정릉은 도성 안인 취현방(聚賢坊) 북원(北原)인 지금의 중구(中區) 정릉 4번지에 있었으나, 태종 9년(1409) 2월에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이장의 이유로는 옛날 제왕(帝王)의 무덤은 모두 도성밖에 있었다는 이유와 중국의 사신이 머무는 태평관(太平館, 지금의 서소문동 태평로 지역)과 가깝다는 것이었지만, 즉위이전 태조의 첫 번째 부인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 소생의 6형제를 제외하고, 조선왕조 개창에 내조(內助)로 공이 컸던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인 방석(方碩)을 세자로 책봉되었던 것에 대한 태종의 개인적인 감정이 작용된 것이었다.

▲사진: 태종실록(太宗實錄)

특히 태조 7년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반란을 도모했다는 구실로 신덕왕후의 소생인 방번(方蕃), 방석과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을 숙청한 시기로 보아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태종실록(太宗實錄)에 의하면, “정릉을 사을한(沙乙閑)의 산록(山麓)으로 옮길 때에는 왕명으로 각 관청의 관원들의 반수로 백의(白衣)·흑각대(黑角帶)·오사모(烏紗帽)의 복장을 하고 영구(靈柩)를 시위하여 행상(行喪)하게 하였으며, 2월과 10월, 이름있는 날에는 2품관원을 보내어 제사 드리는 것을 항식으로 삼게 하였다”라고 하였으나, 이후 전례가 폐지되어 능이 황폐되었다.

1669년(현종 10)에 송시열(宋時烈)·정태화(鄭太和) 등의 중신들의 계청에 의하여 왕후에게 순원 현경(順元顯敬)의 존호를 올리고, 종묘에 신위(神位)를 배향하게 되어, 이장한 지 2백60년만에 본연의 면모와 예우를 갖추게 되었다. 이와 함께 봉릉설제(封陵設祭)가 있는 날에는 정릉 일대에 비가 흡족히 내리고 마을 백성들은 그 비를 ‘원한을 씻어준 비(洗寃雨)’라 부르기도 하였다는 것에서 그간의 소외를 짐작할 수 있겠다.

아직도 옛날 동명이 남아 전하는 정릉이 위치한 마을을 ‘능말’이라 하고, 물이 맑은 마을이라 해서 청수동(淸水洞), 손씨(孫氏)가 많이 살았다는 손가정(孫哥亭) 마을, 마을어귀에 바위가 문설주처럼 서 있다 하여 바위를 ‘문바위’ 또는 ‘문바위골’로 불려지는 곳이 있으며, 배 같이 생긴 바위가 있다하여 불러진 ‘배바위골(船巖洞)’, 소나무와 시냇물이 어울려 좋은 경치를 이루어 사람들이 노닐다가 ‘송계동천(松溪洞天)’이란 글자를 바위에 새겼다는 ‘송계동(松溪洞)’이 있었다.

이외에도 정릉의 원찰인 봉국사(奉國寺), 경국사(慶國寺)와 그 아래에는 한때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의 가족묘가 있었으며. 일제시대부터 유명한 여관인 청수장(淸水莊)과 경복궁 회랑에 먼지로 뒤덮여 있을 태종 10년(1410)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적 110호인 성저오리정계비(城底五里定界碑)가 있었다고 한다.

새로운 세기에는 낮설지 않은 학교로, 3백30여년전에 정릉이 복권된 것처럼 경치좋은 학교가 아닌 민족사학, 명문사학으로서 탄탄한 국민대로로 이정표가 다시 세워지는 날이 되기를 기대해 보며…, 오늘도 무엇을 먹었는지 성북동 비둘기는 때깔도 곱다. 너무 먹어선지 날지 못하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다.

▲사진: 정릉

그러나 북악의 까마귀는 끼니를 거른채 창공을 날으며 거친 바람속에서 먹이를 찾아 눈을 번뜩인다. 비록 변변한 것 조차 얻어먹지 못하는 혐오의 대상이지만, 나는 그 까마귀의 눈과 울음을 사랑한다. 그 까마귀는 우리 자신이기에 우리의 도전정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정릉동 어딘가에서 닭과 토끼를 치며 생계를 꾸려가며 1946년 일본 말 대신에 아무 글도 읽을 수 없었던 시절, 우리 글로 된 “조선역사”를 저술했던 김성칠(金成七) 사상과 이념 논쟁속에서 번뇌하는 반세기 전의 어느 한 역사학자를 잊지 않기 위해 몇해전 읽었던 그의 일기 “역사 앞에서(창작과 비평사)”를 다시 들추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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