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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 60일 4번의 전투.. 20만 대군에게 고구려 지켜내

기사승인 2018.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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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안시성에서 고구려군이 성안에 들어가서 지구전을 펼치자 당나라는 60일동안 성벽옆에 토성을 쌓았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안시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뉴스프리존= 김현태 기자] 추석 안시성을 보니, 고구려사가 새롭게 주목을 받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창작의 용이성 때문이다. 현존하고 있는 삼국시대의 사료와 역사적 유물이 거의 존재하지 않고, 북한이나 중국에 대다수가 존재하기 때문에 사료를 바탕으로 한 역사적인 고증이 사실상 불가능 하다.

드라마의 기본 구도는 삼국사기 등의 현존하는 사료들로 하되 작가의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 할수 있기 때문에 사료가 상대적으로 풍부한 시대보다 창의성이 높아질 수 있다.

이들 사극에서 주목할 점은 이전의 사극이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거나, 멜로나 개인사에 치우쳐 있던 반면, 올해 사극은 광대한 스케일의 전쟁사극, 남성 영웅 사극에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고구려는 조선시대나 고려시대처럼 나라 안에서의 전쟁이 아니라 중국 등의 이웃나라와 당당히 맞서 싸우던 시대라는 점이 새롭다.『주몽』은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의 생애를 통해 고구려의 건국과정을, 『연개소문』은 당태종 이세민을 무릎 꿇게 할 만큼 강했던 고구려의 전성기를 그려내고 있다. 

다시 보는 고구려사

그렇다면 이렇게 고구려 역사가 뜨겁게 재조명 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가 지니는 의미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고구려 역사는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라고 말했다. 이 뿐만 아니라 고구려는 고조선과 부여를 계승하는 국가로서 이 모두를 우리 역사라고 말할 수 있는 중요한 매개체로서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고구려는 신라나 백제에 비해 연구가 미비했다. 유물의 분포가 북쪽에 편중돼 있어 고고학 자료 발굴이 힘들었고 사람들의 관심도 적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2002년에 중국의 동북공정 문제가 불거지면서 그동안 잠들어 있던 고구려사에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요즘 고구려를 배경으로 한 대하사극이 줄지어 나오고 있는 이유도 동북공정과 맥을 같이 한다. 동북공정에 대한 대응측면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중국 측 방송 관계자들 역시 고구려사를 다룬 드라마가 일제히 제작되고 있는 것에 대해 '동북공정에 대한 한국 정부차원의 대응이 아닌가'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 열풍이 불게 된 원인, 동북공정이란 무엇인가?

중국의 총체적 국가전략, 동북공정

‘동북공정’은 ‘동북 변강의 역사와 현상에 관한 일련의 연구 사업’의 약칭으로 2002년부터 2006년까지 5년간 1800만 위안(약 27억원)을 대대적으로 지원하는 중국 정부 차원의 프로젝트이다. 1980년대 이후 중국정부는 이른바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를 내세우며 소수 민족 정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중국은 각기 다른 역사를 지닌 56개의 민족으로 구성돼있어 한 민족이라도  이탈하면 나라 전체가 와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중국 정부는 소수 민족을 통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데 지난 1992년 한국이 중국과 수교한 이후에 조선족과 한국인들의 교류가 잦아지고 조선족들이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으로 몰리자 중국은 조선족이 한국에 흡수되지는 않을까하는 극도의 불안감을 갖기 시작했다. 더불어 지난 1995년 북한의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남한의 북한흡수통일이 공론화되자 국경과 영토 분쟁에 대해서도 대비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에 따라 중국 정부는 한반도의 형세 변화가 중국 동북 변경의 안정에 미칠 영향에 대한 연구 등을 계속하다 결국 지난 2002년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출범시켰다. 

영화 한 토막 이야기

영화 속에서 연개소문 측은 '양만춘이 연개소문에 대한 미움에 사로잡혀, 안시성 근처에서 벌어지는 주필산 전투를 돕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런 비난을 할 이유가 없었다. 주필산 전투는, 연개소문이 안시성을 보호하고자 대규모 구원병을 파견한 결과로 발생한 사건이다. 당나라 역사서인 <구당서>의 고구려 열전은 안시성 전투 직전의 주필산 전투에 관해 이렇게 서술한다.〈오마이뉴스 〉에 따르면, "태종이 안시성에 당도하자, 북부누살 고연수와 남부누살 고혜진이 고구려·말갈 병력 15만 6천 800명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하러 왔다."

외세 앞에서 고구려는 내부의 갈등을 덮고 일단은 단결했다. 15만 군대가 안시성을 구할 목적으로 출동한 것은 그 때문이다. 중앙 정권과 안시성이 그 와중에도 갈등을 빚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영화 속의 연개소문 측은 양만춘이 주필산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것을 욕했지만, <조선상고사>에 따르면 그것은 연개소문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이처럼 두 사람은 외세 앞에서 사적 감정을 억눌렀다.

영화에서는 당태종이 화살에 맞아 시력을 상실하고 공들여 쌓은 토산이 무너지는 바람에 의욕을 상실한 상태에서, 연개소문이 사물의 설득을 듣고 뒤늦게 마음을 고쳐먹은 뒤 구원군을 보냈기 때문에 당나라 군대가 급히 철군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연개소문과 양만춘의 협력은 안시성 전투 이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전투가 끝날 무렵 연개소문이 잘못을 뉘우치고 양만춘에게 협조했으며 이것이 결정적 계기가 돼 당태종이 철군을 결심하게 된 것처럼 묘사했다.

연개소문과 양만춘의 협력은 안시성 전투 이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전투가 끝날 무렵 연개소문이 잘못을 뉘우치고 양만춘에게 협조했으며 이것이 결정적 계기가 돼 당태종이 철군을 결심하게 된 것처럼 묘사했다.

하지만 당태종이 철군을 결심한 최대 동기는 날씨와 보급 문제였다. 토산 붕괴로 타격을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따르면 날씨가 쌀쌀해지는 데다가 군량미가 부족해진 게 결정적 원인이었다. 연개소문의 지시대로 양만춘이 장기전을 펼친 게 주효했던 것이다.

안시성 전투 직전의 긴박함이 과장됐다는 점, 전투 당시 연개소문과 양만춘이 엇박자를 보인 것처럼 묘사했다는 점, 당태종의 철군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에 이어, 4번째로 설명할 영화 속 허구는 당나라 군대의 철군 모습이다.  

▲안시성 전투의 모습 ⓒ롯데시네마 제공

 <안시성> 속의 당나라군은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으며 정신없이 도주했다. 하지만, 두 군대의 '작별'은 실제로는 아름다운 편이었다. 고구려 본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성주[양만춘]가 성에 올라 송별의 예를 보이자, 당 황제[이세민]는 성을 굳게 지킨 그들의 충심을 가상히 여겨 비단 100필을 주면서 그 임금에 대한 충성을 격려하였다."

패배한 당나라군을 상대로 양만춘은 "잘 가세요!"라며 인사를 했다. 이에 대한 사례로 당태종은 비단 100필을 보내면서 "당신들 정말 대단하다"는 식으로 답례했다.

이 전투의 마지막은 이렇게 형식상으로나마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아름다운 작별'과 함께 막을 내린 것이다. 그 작별과 함께, 눈에 붕대 감은 당태종은 치욕과 분노를 삭이며 말머리를 서쪽으로 돌려야 했다.

한편 향후 남북통일이 중국 동북사회 혹은 조선족 사회에 미칠지도 모르는 영향을 다각도로 분석하여 거기에 미리 대처하고 아울러 이를 바탕으로 동북사회의 안정을 유지하려는 목적도 있다. 이것은 다민족국가인 중국이 직면하고 있는 소수민족 문제의 돌출과 확대를 차단함으로써 중국의 ‘국민적 통합’과 ‘영토적 통합’을 확고히 하여 국가적 안정을 꾀하려는 거시적인 정책 틀과도 직결된 것이다. 더불어 동북공정을 통해 향후 한반도 정세변화 및 그에 수반될 동북아 국제정세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함으로써 한반도 및 동북아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영향력과 위상을 확보하려는 의도도 숨겨져 있다. 고 연구위원은 “동북공정은 중국이 현재 당면한 여러 가지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학술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정치적 목적의 사업”이라며 학문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중국 정부의 움직임에 대해 우려했다.

이성적인 관심으로

동북공정을 통해 준비된 향후 한반도 정세변화에 대한 중국의 예측과 대비책은 한반도의 운명과 직결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의 심각성에 비해 우리나라의 국가적 대응책은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고, 그나마 여러 매체를 통해 고구려에 대한 관심만 높아진 상황이다. 물론 고구려 역사에 관심을 갖게 한다는 것은 고구려가 우리의 역사라는 점을 상기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다만 이를 접할 때 동북공정에 대한 반발로 인해 ‘중국 타도’라는 식의 배타적이고 감정적인 민족주의를 갖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다.

고구려. 오랫동안 잊혀져 왔던 이름이지만, 엄연한 우리의 역사이다. 최근 불고 있는 고구려 열풍이 진정한 우리 역사 찾기까지 이어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598년 수 문제가 고구려 평원왕에게 보낸 국서를 보면 당시 동아시아에서 고구려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국서에서 수 문제는, 첫째 고구려가 말갈을 마구 부리면서 거란을 압박하여 수와 통교하는 것을 억제하고 있다는 점, 둘째 수의 병기기술자를 몰래 유인해 가고 있다는 점, 셋째 고구려에 보낸 수의 사자를 감금하면서 정탐을 금하고 있다는 점, 넷째 수의 변경을 침공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다는 점, 다섯째 사신을 보내 수의 정보를 밀탐하고 있다는 점을 들면서, 이를 시정하지 않을 경우 공격하여 멸망시킬 것이라고 위협하고 있다. 그런데 수 문제가 고구려왕에게 시정을 요구한 사안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해석해 보면, 고구려는 주변의 민족세력들과 견고한 연맹을 형성하여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확보하고, 아울러 수의 병기제조 기술자를 유인하여 군사력을 확충하며 수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거나 적정을 교란시키는 등 전면전에 대비하고 있었던 상황을 그려볼 수 있다.

당시 수는 삼백 수십 년 동안 분열해 오던 중국을 통일하여 거대한 영토를 확보한 위에, 서쪽의 토곡혼과 북방 초원의 돌궐까지 제압하여 국력이 막강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부심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때문에 고구려의 세력 확대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王은 요하(遼河)의 폭이 장강(長江)에 비해 어떠하며, 고구려의 인구는 진국(陳國)에 비해 어떠하다고 보고 있소?”라고 하여, 수는 양쯔강 같은 장애물도 쉽게 넘었으니 그보다 훨씬 좁은 요하 정도는 장애물이 될 수 없고, 고구려보다 인구가 훨씬 많은 진나라를 손쉽게 멸망시켰는데 고구려가 무엇을 믿고 굴복하지 않느냐고 노골적으로 위협했던 것이다.

사실 당시 고구려는 요동을 차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수의 영토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고, 인구로 말하면 고구려는 많아야 100만을 넘지 않았을 것이니 수의 4600만에 비하면 1/46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렇지만 수와 고구려의 대결은 수의 참패로 끝났다. 즉 598년 문제 때 30만을 동원한 침공, 612년 양제 때 113만을 동원한 침공 및 그 뒤 두 차례의 대규모 침공 모두 수군은 거의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 그러나 수의 패배는 고구려의 군사력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원거리를 진격해 온 공격자의 자기 피로에 따른 자멸의 결과라고 보는 편이 옳다.

수의 침공을 막아냈으나 고구려도 계속되는 방어전의 피로증을 견딜 수는 없었다. 46배나 많은 인구를 가진 수의 총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서 모든 국민은 군대로 편제되어야 했고, 민들은 과중한 세금을 부담했다. 따라서 당시 민들의 생활은 극도로 피폐했다. 때문에 고구려의 최후 이십 수년을 지배한 연개소문의 철권통치에 의해 그 체제는 유지되었으나 그것도 최후의 몸부림에 불과했던 같다. 마지막에는 내분이 일어나고 당과 신라로 망명하는 자들이 속출하게 되어 끝내 멸망에 이르게 된 것이 그 반증이다.

김현태 기자 kimht100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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