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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구려] 700백년 동안 북방을 호령한 유일한 국가

기사승인 2018.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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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프리존= 김현태 기자] 국내 펜들을 위한 전쟁영화가 이순신장군을 소재로한 명랑이후 고구려 역사의 부흥기를 함께한 양만춘장군의 소재 영화 안시성이 국내 펜을 기다린다.

‘안시성(The Great Battle)’은 동아시아 전쟁사에서 가장 극적이고 위대한 승리로 전해지는 88일간의 안시성 전투를 담은 작품이다. 천하를 손에 넣으려는 당 태종은 수십만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의 변방 안시성을 침공한다. 20만 당나라 최강 대군과 5천명의 안시성 군사들, 수십배의 전력차에도 불구하고 안시성 성주 양만춘과 전사들은 당나라에 맞서 결사항전을 결심한다. 우리나라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고구려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느낀다. 그만큼 영토를 크게 확장한 나라도 드믈고,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이라 선포한 나라인것, 중국을 통일시켰던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에서도 대승을 거두며 동북아시아의 강대국으로 거듭나게 된다. 아주 작은 나라에서 시작한 나라가 어떻게 동북아시아의 강대국이 될 수 있었을까? 강대국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들을 살펴보면?.

수레의 발달

고구려 고분 벽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륜 수레이다. 수레를 가장 잘 활용한 나라로 알려져있다. 그만큼 군사와 경제를 이끌었던 축이었다. 건국 이후 주변 국가를 복속시켜 그 지역의 행정 중심지를 연결하는 도로망을 확대하고 부대의 이동과 군수물자 수송을 편리하게 만들었다.

이 바탕으로 중앙집권체제를 빠르게 확립하였고, 지리적 특성상 유목국가와 농업국가가 만나는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어 두 국가 간의 교역을 중계하며 막대한 이득을 챙겼다. 건국 초부터 도로망과 수레를 잘 활용하면서 자연스레 상업이 발달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다.

어릴 때부터 활쏘기와 말타기로 무예 출중

고구려인들은 어릴 때부터 활쏘기와 말타기로 무예를 갈고 닦았다. 또, 무술대회에 출전해 좋은 성적을 거두면 신분이 오를 수 있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시간 날 때마다 연습을 했다. 대표적인 예로 '온달 장군' 이다. 우리에겐 바보온달로 알려져있지만, 평민집안에서 태어나 무술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 대형(大兄) 자리에 오르기도 한다.

축성기술과 방어망

고구려가 아무리 강한 군사를 보유하고 있다고 하나 수적으로는 중국에게 밀렸다. 수적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이길 수 있었던 배경은 축성기술과 방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들은 험한 산에 위치하고 있고 견고할 뿐만 아니라 위 사진처럼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쌓은 구조물인 치를 활용해 적을 측면에서도 공격할 수 있었고 많은 병력이 집결하지 못하도록 해 방어에 유리하다.

또, 횡으로는 성들이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고 종으로는 중요한 길목마다 성을 배치해 성 하나를 함락당하더라도 방어선이 붕괴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다 격파하지 않는 이상 수도를 공략할 수 없었다.

철기술 발달

고구려의 영토였던 요동지방의 안시성 일대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철광산이 있었다. 그를 바탕으로 철기 문화가 발달하였는데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그 이상. 최근 아차산성에서 대규모 유적이 발굴되었을 때 검증해본 결과 고구려의 화살촉은 평균 탄소함유량 0.51%로 현대의 강철과 대등할 정도로 뛰어났다.

화살촉으로 그 당시 일반 갑옷을 재현해 쏜 결과 5장을 가뿐히 관통할 정도로 위력적이었고, 갑옷은 다른 나라 화살촉이 뚫지 못할 정도로 촘촘하게 만들어졌고 그로인해 수적열세를 극복하고 적군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고구려의 전성기 → 흥하다

전성기를 이끈 광개토대왕은 한때 백제를 복속시켰고, 신라를 쳐들어온 왜군을 낙동강 유역에서 물리치고 후연을 격파해 오랜 숙원이었던 요동지방을 포함한 만주 대부분을 차지하고, 그의 아들 장수왕이 체제 정비의 필요성을 느껴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한강 유역의 주도권을 잡는데 성공한다. 이렇게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영토 확장과 나라의 기반을 잡음으로써 고구려는 더욱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수나라와 당나라의 연이은 전쟁과 연개소문이 죽으며 아들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났고 그 사이에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한 나당연합이 쳐들어오면서 강하고 강했던 고구려는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고구려는 수나라의 동북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인접국이었다. 文帝(문제) 楊堅(양견) 개황 18년(598년), 고구려가 요서를 침공하였으나 수의 요서총관 韋冲(위충)이 이를 물리쳤다. 문제는 고구려가 영토를 요하까지 확장했고 영주를 침범한 적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당시 漢王 楊諒(양량)에게 고구려 토벌을 명했으나 패배하자 다시는 정벌에 나서지 않았다.

대업 3년(607년)에 이르러 煬帝(양제) 楊廣(양광)이 동궐 기민칸을 방문했을 때 마침 고구려 사자가 그 자리에 있었다. 양광은 고구려왕 高元의 입궁을 강요했으나 고원이 거절하자 이를 고구려 원정의 빌미로 삼는다.

대업 4년(608년)에서 대업 7년(611년)에 걸쳐 양제는 고구려를 토벌할 대대적인 준비작업에 돌입한다. 낙구에서 탁군에 이르는 영제수로를 개통하여 백실을 열고, 탁군에 임삭궁을 건설하여 출정의 지휘본부로 삼는다. 유주 총관 元弘嗣(원홍사)를 동래군으로 보내 300여 척에 이르는 큰 배의 건조를 감독하라고 지시했는데, 조선공들은 불철주야 물 속에서 작업을 하는 바람에 30~40%가 노역으로 목숨을 잃었다. 하남, 회남, 강남 등지에서 제조한 전차 5만대는 고양으로 보내 육로 수송도구로 사용하라고 명했다. 각 군에 대량의 정교한 병기 제작을 지시하고 열심히 일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목을 베라고 명한다. 산동에서는 병사가 도처에 넘쳐났다. 각지의 부자들에게는 재산 정도에 따라 말을 구입해 전쟁 준비를 하게 했는데 말 한 마리의 가치가 10만 냥까지 폭등했다.

전쟁에 돌입하기 직전인 대업 7년, 양제는 직접 임삭궁으로 가서 각지의 육군을 소집하고 강북의 선원 1만 명, 쇠뇌 사격수 3만 명, 영남의 창병 3만 명을 차출하여 수군으로 충당했다. 동시에 강희 남쪽 인부와 배들을 징발해 여양창과 낙구창의 식량과 병기를 탁군까지 운반하게 했다. 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으며, 수십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분주하게 운반해, 과로로 죽은 자들이 부지기수였고 그 죽은 시체들로 악취가 사방에 진동했다.

또한 산동 일대의 우차와 인부를 보내 쌀을 노하와 회원 두 진으로 운반시켰다. 60여만 명에 이르는 인부들이 2인 1조가 되어 각조가 3석의 쌀을 운반했지만, 길이 험난한 탓에 3석의 쌀은 인부들이 운반 중에 먹기도 부족하여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바닥나 도망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백성들이 경작시기를 놓쳐 토지는 황폐해지고, 국가재정은 고갈되었으며, 장백산의 王薄(왕박)이 이끄는 농민봉기도 이 해에 터졌다.

대업 8년(612년) 정월, 양제는 고구려에 대한 제1차 전쟁을 개시한다. 수나라군은 130만 명으로 구성된 24군과 양제가 직접 거느리는 6군을 합해 총 30군으로 구성되었다. 식량을 운반하는 인부는 이 숫자의 배에 달했다. 선봉대가 탁군을 출발한 뒤 매일 40리를 간격으로 한 개 군이 출발하여 40여일이 걸려서야 모든 군대가 출발을 마쳤다. 육군 주력 대열은 1,000여리나 이어졌다. 그 밖에 우익위대장군 來護兒(내호아)는 수군을 거느리고 동래 해구에서 출발해 패수에서 육군을 지원했다. 내호아의 수군은 고구려 수도 평양에서 60리 떨어진 곳까지 쳐들어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승리의 여세를 몰아 평양성으로 들어가 노략질을 일삼다가 고구려 복병에게 패하여 4만 명의 병사 중 살아남은 몇 천 명만이 배를 타고 황급히 도망쳤다.

대장군 우문술과 우중문이 이끄는 육군이 압록강을 건널 때 병사들은 무기와 식량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 몰래 내버렸고 중간 지점에 이르렀을 때 식량은 이미 떨어져 버렸다. 수나라 군대는 평양에서 30리 떨어진 곳까지 진격했지만 이미 지친 상태여서 다시 살수까지 퇴각할 수밖에 없었고, 이 때 을지문덕 장군이 이끄는 고구려 군대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 우둔위장군 辛世雄(신세웅)은 맞아 죽는 등 수나라 군대는 전멸했다. 강을 건너던 30만 병사 중 겨우 3,000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 도망쳤다. 제1차 고구려 원정은 철저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첫 번째 출정은 백성들에게는 큰 재난이었으며, 각지에서 농민봉기가 폭풍처럼 거세게 일어났다. 제군의 왕박과 맹양, 북해의 곽방예, 청하의 장금칭, 평원의 학효덕, 하간의 격겸, 발해의 손선아 등이 난을 일으켰다. 봉기군은 많게는 수십만 명, 적어도 몇만 명이었고 이들 세력은 수왕조에 큰 위협이 되었다.

대업 9년(613년),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양제는 제2차 고구려 원정에 나선다. 군사 배치는 첫 번째 원정 때와 거의 동일했고, 양제는 요동에 머물면서 지휘하고 우문술과 양의신 등이 평양으로 진격했으며, 내호아는 수군을 거느리고 동래를 떠났다. 마침 육군이 전선에 도착하고 수군이 아직 떠나지 않았을 때, 수나라 귀족 양소의 아들인 예부상서 楊玄(양현)이 여양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낙양을 공격했다. 이 소식을 접한 양제는 당황하여 황급히 전선에서 군대를 돌려 낙양으로 향하면서 군수물자를 모두 고구려 영토에 버리고 돌아왔다. 이로써 제2차 고구려 원정도 실패로 끝나고 만다.

두 차례의 고구려 원정 실패는 농민봉기와 통치집단 내의 반란으로 이어졌으며 수나라 전체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양제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리한 전쟁을 지속한다.

대업 10년(614년) 제3차 고구려 원정이 시작되었다. 이해 7월, 내호아의 수군이 평양 부근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했다. 더 이상 싸울 생각이 없는 고구려는 사자를 보내 강화를 요청했고, 양제도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음을 깨닫고 이를 구실로 철군한다. 그 직후, 고구려왕이 알현하러 오지 않자 제4차 원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내 정세는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찬란했던, 고구려의 11대 왕에 이르기까지

동천왕 [227-248]

⒜서안평을 공격하여 중국 본토와 낙랑군과의 통로 차단 시도.

⒝244년 위나라의 관구검이 공격해 와서, 국내성이 함락.

→245년 왕기의 공격 때는 동천왕이 동해안까지 피난 감.

미천왕. [300-331]

313년 낙랑군을 축출함. →314년 이후 대방군을 축출한 백제와 충돌.

고국원왕. [331-371]

⒜342년 전연의 침략으로 큰 타격을 입음.

▷궁궐 초토화, 미천왕의 사체 도굴해 감, 왕의 생모와 남녀 5만을 포로로 잡아감.

⒝371년 평양성까지 진출한 근초고왕에게 전사함.

소수림왕. [371-384]

⒜372년  전진의 순도가 불상과 불경을 전하여, 불교수용.

⒝372년 태학설립으로 유교 교육.
 
⒞각지의 민간 교육기관인 경당에서도 미혼의 미성년자들을 모아 밤낮으로 독서를 시키고, 활쏘기를 익히게 함. <사기>, <한서>, <옥편>, <문선>등을 읽음.
 
⒟373년 율령 반포.

광개토대왕. [384-413]

 ⒜성을 64개 함락, 촌을 1400개 정복. ▷국내성의 광개토 대왕릉비문.

⒝요동을 차지하고 숙신을 복속시켜 만주를 차지함.

⒞백제를 공격해 임진강, 한강 어간까지 영토를 확장.

⒟신라에 들어온 왜의 군대를 낙동강 유역에서 격파.

⒠[영락]이라는 연호사용, 시호 : 국광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장수왕. [413-491]

⒜남북조 모두와 교류하여 대립된 두 새력을 조종하는 외교정책 사용.

▷중국견제 정책.

⒝427년 평양천도. ▷야영도시로부터 평야 도시로의 천도.

⒞475년 한성을 합락시키고 개로왕을 잡아 처형함.

⒟죽령 일대로부터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뻗침.

평원왕. [559-590]

⒜586년 평양의 장안성을 축조하여 천도.

⒝590년 온달이 신라의 한강유역을 공격하다 전사.

영양왕 [590-618]

⒜598년 요하를 넘어 요서에 대한 공격을 감행함. →수문제의 공격이 실패하고 중도에 돌아감.

⒝612년 수양제의 100만 대군에 의한 공격으로, 요동성 공략, 실패→30만의 별동대로 평양을 직접 공격하려 하였으나,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 대첩으로 생존자는 2700명이 되어 퇴각함.

⒞국초에 <유기>라는 100권짜리 역사서가 있는 것을 개수하여 600년 이문진에 의해 <신집>완성.

영류왕 [618-642] 

⒜632년부터 천리장성 축조를 시작함[646년에 완공]

⒝642년 연개소문이 권력을 잡아 반대파와 함께 시해 당함.

보장왕 [642-668]

⒜백제에 공격당하는, 신라의 김춘추의 청을 거절하고, 한강유역의 반환을 요구. →당의 중재를 무시함.

⒝645년 당태종의 고구려 공격→요하를 건너 요동성 등을 함락시킴. →작은 산성인 안시성에서 크게 패하고 돌아감[하루 6-7회공격, 60일 포위].

⒞당고종 당시, 661년 소정방이 대동강 입구를 거쳐 평양을 공격. →이듬해 연개소문에 패퇴.

▷이민족의 침략에 대한 민족 항쟁사상 특기할 만한 사실. 민족의 방파제 역할을 다함.

⒟연개소문의 장남 남생은 차남 남건에게 쫓겨 당에 항복,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신라에 투항 →당이 이적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여, 신라와의 협공, 연남생의 길잡이 역할 등으로 고구려는 668년 멸망.

⒠650년 보장왕이 불교보다 도교의 불로장생 사상을 숭상하자, [금강석과 같이 영원히 깨지지 않는 불성을 일체 중생이 모두 가지고 있다]고하며 보덕이 열반종을 창시함.

부흥운동.

⒜668년 당이 고구려의 땅에 안동도호부 설치.

⒝검모잠이 보장왕의 서자 안승을 옹립하여 2년 동안 항쟁. →안승인 신라로 망명하여 [고구려왕→보덕왕]으로 임명되었다[670]

김현태 기자 kimht100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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