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천사의 나라인가 식민지 종주국인가?

“... 본관의 지휘 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영토를 점령한다.”

1945년 9월 8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3년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미군정청)이 지배하던 시기. 이 미군정청은 대한민국에서 무엇인가? 해방된 대한민국을 독립국가로 만들어주기 위한 승전국의 배려였을까? 아니면 미군의 점령지였을까? 미군정은 불과 3년 동안 우리나라를 지배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미친 영향은 40년이 지난 지금에도 계속되고 있다. 미군정기간 3년간 동안 미국이 한반도에서 한 일을 밝히는 것이 오늘날 한미관계를 바로 세우는 바로미터가 되지 않을까?

미군정기는 미국이 공산주의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준 혈맹이요, 은혜의 나라로 보는 시각과 남한사회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과정이었을까? 이 극과 극의 시각은 지금도 국민들의 의식 속에 남아 국민들의 뇌리에 분단의 역사처럼 각인되어 있다. 해방 73년. 해방 후 숨 가쁘게 전개 되어 온 분단과정에서 미소의 38선분단과 진주, 미소공동위원회와 좌우합작운동, 찬탁과 반탁운동, 남북정부수립.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과정에서 있었던 제주항쟁, 여순사건, 보도연맹사건, 빨치산 사건… 4,19혁명, 광주항쟁, 한미상호방위조약, 전시작전권, 그리고 이름도 화려한 한미연합훈련, 사드배치… 에 이르기까지 미국과의 관계는 어떻게 규정해야 옳은가?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사관(史觀)없이 암기한 역사는 죽은 역사다. 일제의 시각에서 우리 역사를 보면 일본이 조선을 근대화시킨 은혜의 나라요, 미국의 시각에서 보면 미국은 우리에게 천사의 나라다. 사관이란 이렇게 어떤 안경을 끼고 보느냐에 따라 가해자가 오리려 천사로 보이게 만드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일본이 우리 민족에 가한 참혹한 역사는 필설로 다하기 어렵지만 우리는 일본보다 북한을 더 증오하고 공포스럽다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우리 국민들은 미군이 공산주의로부터 우리는 지켜준 천사의 나라로 인식한다. 과연 그럴까?

우리나라와 미국의 관계는 1871년 신미양요에서부터 연원을 찾을 수 있다. 1875년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체결한 강화도 조약은 조선의 개항을 위한 미국의 음모가 숨겨 있음을 이제는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1882년 조미수호조약은 이런 미국과 일본의 야망을 성취하기 위한 과정에서 맺어진 의무만 있는 미국의 속내를 드러낸 통상조약이다. 같은 맥락에서 1905년에 미국과 일제가 맺은 ‘카쓰라-테프트 협정’이 체결, 미국이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정당화시켜 주는 어처구니없는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우리 민족의 비극의 씨앗이 된 ‘카쓰라-테프트 협정’은 오욕과 통한의 역사를 만들게 된다.

1945년 9월 9일 오전 4시 30분, 뜰 한가운데 서 있는 국기게양대를 입구자로 둘러싸고 엄숙한 공기가 맴돌았다. 이윽고 미군 장병 두 사람이 게양대 앞으로 나아가 지휘관의 호령 하에 밧줄을 잡았다. 지금까지 펄럭이던 일장기가 소리 없이 내려왔다... 이어서 다시 일장기 대신 성조기가 올랐다. (매일신보 1945. 9. 11) 미국의 한반도 지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군정기란 1945년 9월 8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의 패망으로 독립한 한반도 남부를 미군 제24군단 존 리드 하지 중장이 사령관으로 지배하던 시기다.

이직도 우리국민 중 상당수는 미국을 천사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미국의 야망은 한반도 이남의 점령군으로 등장하면서 실체를 드러낸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 후 미육군 태평양방면 육군 총사령관 맥아더 미국원수는 1945년 9월 9일 맥아더 사령부 포고 제1호를 통해 “...나의 지휘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를 점령한다.”고 선언한다.... 제3조 ‘...나의 모든 명령과 나의 권한하에 발한 명령에 복종’해야 하고.. 제5조 ‘군사적 관리를 하는 동안에는 모든 목적을 위하여서 영어가 공식언어’ 가 된다. 태평양방면 미국 육군부대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가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주민에 대하여 발표한 점령조항’이다.

미군정의 성격

미군이 남한에 진주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아베총독을 비롯한 조선총독의 일본인 관리와 친일파 한국관리들을 그대로 유임시킨 일이었다. 오늘날 ‘빨갱이니 종북’이데올로기는 미군정기에 형성된다. 미국이 한반도정책의 제 1의 목표는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을 구축’ 하는 일이었다. 미국이 타도하고 몰아내자고 주장하는 ‘공산주의’는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우리민족 대다수가 지지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미국이 얘기하는 공산주의란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처단하고 자주적 독립국가를 수립, 민중을 위한 사회개혁조치를 수행하려는 우리민족의 자주적 운동을 뜻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에게 민족자주 세력은 공산주의자요, 과거에는 친일파였던 친미매판세력은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과연 무엇을 가리켜 좌라하고 우라고 하며 또 누구를 가리켜 애국자라고 하고 반역자라고 하는가? 그러나 나의 흉중엔 좌니 우니하는 것은 개념조차 없다. 건국강령의 요소에 있어서는 좌니 우니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인류 5천 년의 역사를 통하여 악폐에 시달려 온 우리로서야 누가 또 압박박자와 착취자의 집단체인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동경하고 구가 할 것인가? 조국의 완전한 독립과 동포의 진정한 자유를 위하여 단결하여 일로 매진할 뿐이다.> (『백범어록』 75~76쪽)

빨갱이니 좌파, 종북이라는 이데올로기는 그 후 독재권력 유신세력 그리고 살인정권이 필요에 이해 금과옥조로 활용된다. 1945년 10월 1일 여운형선생은 ‘인공이 빨갛다’고 하는 얘기를 듣고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오늘 날 민주주의 조선을 건설하는데 있어서 좌익이니 우익이니 빨갱이니 노랭이니 하는 구분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있다면 친일파와 항일파가 뿐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노동자, 농민 및 일반대중을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다. 나는 빨갱이 할아버지라도 되어 이 여생을 마치고 싶다. (『몽양 여운형』 청하각) 고 했다. 빨갱이의 실체는 무엇인가? 해방 후 등장한 유령 빨갱이, 좌파, 종북의 역사를 밝히면 역사 속에 감춰진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

미·소 군정기의 민중들의 삶은

“어떤 사람도 항복 문서의 조항과 또는 미 태평양 방면 총사령관의 권한 아래 내려진 포고, 명령, 지시에 위반하거나, 미국과 그 연합국의 국민 또는 재산의 질서, 생명, 안전, 치안을 해치는 행위, 공공의 안녕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 정의로운 행동을 수행하지 못하게 하는 행위, 또는 연합국에 대하여 고의로 적대 행위를 하는 자는 점령군의 군사 법정에서 사형을 포함한 기타의 판결에 처해질 것이다.” (9월 7일 맥아더 사령관 포고 제2호)

우리 민중들은 미군정기를 어떻게 평가할까? 김주환이 쓴 ‘미국의 세계전략과 한국전쟁’을 보면 “우리민족의 49%의 국민들은 미국이 가져다 준 ‘해방’으로 겪는 고통보다 차라리 일제통치가 더 낫다.”고 썼다. “미군의 통치가 더 낫다는 대답을 한 사람은 단지 2%에 지나지 않았다.”고 했다. 일제의 폭압에서 해방된 국민들에게 이 무슨 날벼락일까? 미군정기보다 일제 식민지시대가 더 좋았다니… 이런 기록은 군정기를 살았던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혹은 기록으로 수없이 남아 있다. ‘일제가 패망한 뒤 텅 비어 있던 감옥은 1년이 지나자 정치범들로 꽈 들어차게 되었다.’고 증언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해방 1주년이 지난 1946년 8월 15일 서울 어느 신문은 ‘우리는 이날을 기쁨으로 축하해야 할 것인가?"라고 썼다.

대부분이 친일파 민족반역자였던 <한민당은 ‘국민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는 민주주의 집단이요, 민중 스스로의 뜻으로 세운 조선인민공화국을 ’소련의 조종을 받는 공산주의 집단>이라면 당시의 민중들은 어느 쪽을 지지했을까? 미군정 정치고문 배닝호프가 국무장관 번즈에게 보낸 보고서는 한민당과 조선인민공화국을 이렇게 분석했다. 모든 것을 공산주의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았던 미국에게 자주적인 변혁운동은 단순히 소련의 사주를 받는 불순한 음모일 뿐이었다. 놀랍게도 당시 세계 재패를 실현하려는 미국의 <좌익>과 <우익>이라는 술책이 해방 73년이 지나는 동안 독재와 유신정권 그리고 살인정권을 유지시켜 준 이데올로기가 될 줄 미국이 예상이라도 했을까?

반공을 제 1 목표로 내걸고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지주로 하여 대리정권을 수립하고자 했던 미군정에게 외세를 배격하는 철저한 민족주의자 김구는 적절한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장애물이었다. 당연히 미군이 선택한 인물은 김구가 아닌 ‘매우 교활한 정치모략가’인 이승만일 수밖에 없었다. 미군정이 이름만 바뀐 조선총독부라면 대부분이 친일파 민족반역자였던 한민당이 세운 이승만정권은 미군정이 꿈꾸던 대륙전진기지로서 한반도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적격자로 당연히 미국은 김구가 아닌 이승만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38도 이북의 북한의 군정기는 어떠했을까?

1945년 9월 8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38선 이남을 통치하던 미군정과는 달리 38도 이북의 북한에서는 해방군으로서 진주한 소련군은 10월 3일 제25군사령부 산하에 소련민정기관이 조직되었다. 약 50명의 장교들로 구성된 이 기관을 지휘하는 A. A. 로마넨코는 민정 담당 부사령관의 직책을 겸임한 민정기관에서는 행정․정치부, 산업부, 재정부, 상업․조달부, 농림부, 통신부, 교통부, 보건부, 사법․검찰부, 보안․검열부 등 모두 10개 부서가 설치되어 지도적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 민정기관의 역할은 미군정과는 달리 “일제에 의해 파괴된 경제를 복구하고 정상적인 생활 기반을 조성하며 조선 인민 자신의 국가권력 수립에 방조하는 문제 등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승전국의 점령군이 점령지의 민중에게 예의를 갖추고 인격적으로 대할리는 없다. 점령군의 자잘한 비리와 불법이란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다. 이런 현실이 미소군정기의 납북에서 수없이 일어났던 사례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미군에 비해 38이북에 진주한 소군정은 놀랍게도 1945년 8월 15일 인제가 패망한 후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공식적 출범하기 까지 38선 이북에 사실상 북한정권이 수립되었다는 사실이다. 소련군이 조선으로 진격한 이유도 조선의 해방 때문이 아니라 만주 작전 당시 만주국을 비롯한 만주지역 내 일본 육군 관동군의 괴멸을 위해서였다. 38이남의 맥아더 사령관의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를 점령…’을 위해서였지만 소련의 치스차코프 사령관의 포고문은 ‘조선인민들이여, 그대들은 독립과 자유를 회복…’이라는 인민들의 해방군으로 진주했다. 또 한 가지. ‘소련군정은 미군정처럼 직접 통치가 아닌 간접 통치를 표방하였으며 각지에 세워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지부와 인민위원회를 인정한 통치였다’(나무위키 참조)는 사실이었다.

1946년 10월 1일 대구를 비롯한 남한의 전 지역에서 일어난 항쟁은 미군과 남조선국방경비대를 비롯하여 한민당세력, 민족청년단, 서북청년회, 백의사 등 반공주의 우파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진압하는 과정에서 공무원 63명, 일반인 73명으로 총 136명의 희생자를 냈다. 항쟁 진압과정에서 예의 빨갱이토벌의 효과가 이때부터 드러나기 시작한다. 물론 당시 미군보다 토벌에 전면에 나서서 앞잡이가 되었던 친일파를 비롯한 극우 세력들은 미군정에 이어 이승만의 보호와 국가가 주는 훈장을 받는가 하면 죽은 후에 지금도 63명이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민족을 위해 조국의 완전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열사들이 편히 눈감을 수 있겠는가? 미군정기를 비롯한 해방 후 오늘에 이르기 까지 미국은 우리나라에 혈맹이요, 수호신이기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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