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는 현실적이어야 한다. 진보에 부족한 것은 도덕이 아니라 현실성, 현실적 힘이다”라고 일갈했습니다. 진보에 도덕이 필요 없다는 얘기가 아니지만 도덕은 진보정당이 추구할 가치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공렴(公廉)
《참전계(경參佺戒經)》제58사(事)에 <공렴公廉>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공(公)’은 치우치지 않음이고, ‘염(廉)’은 깨끗함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공직자(公職者)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게 일을 보게 되면 사랑도 미움도 없고, 깨끗한 마음으로 사물을 대하면 사리사욕(私利私慾)도 없어지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7월 23일 유명(幽冥)을 달리한 고 노회찬(盧會燦) 의원은 청렴한 목민관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가난을 걱정 안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는 유서에서 드루킹 쪽으로부터 4천만 원을 받았다고 시인했습니다. 하지만 정상적인 후원 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잘못이 크고 무겁다”거나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 대목에서는 그가 자신을 얼마나 엄격하게 대하는지가 잘 느껴집니다.

기자가 그에게 “진보는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나?”라고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변하면서 “진보는 현실적이어야 한다. 진보에 부족한 것은 도덕이 아니라 현실성, 현실적 힘이다”라고 일갈했습니다. 진보에 도덕이 필요 없다는 얘기가 아니지만 도덕은 진보정당이 추구할 가치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고는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그런데 진보세력의 도덕적 결함에는 우리 사회가 훨씬 더 엄격한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억울하다고 하면 안 된다. 그것도 하나의 현실이니까 인정해야 한다. 부정이나 비리의 경우 진보세력에는 훨씬 높은 수준을 요구하고 있다. 이쪽도 저쪽도 돈 봉투를 받았으면 똑같은 죄인데 이쪽에서 받으면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억울해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높은 것을 요구하니까 그에 맞춰서 더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도덕을 과시해서는 안 된다.”

어떻습니까? 비로소 그가 여느 정치인들처럼 뻔뻔할 수 없는 이유를 알게 되지 않았는가요? 그와 오랫동안 함께 활동해온 한 동지는 장례식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가 돈 받은 사실을 유서에는 쓸 수 있을지언정 주변 사람들에게는 직접 얘기할 수 없는 사람이다.”

어떤 능력보다 인성(人性)의 회복이 우선입니다. 인성이 깨어나 공심으로 맡은 바를 대할 때 우리 사회의 신뢰가 살아날 것이 아닌가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평생의 목표로 ‘공렴(公廉)’이라는 대원칙을 삼았습니다. 그리고 다산은 공정하고 공평한 공무집행에 청렴이라는 도덕성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을 때에만 목민관은 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백성들은 그런 목민관을 만나야만 사람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노라고 그는 주장했습니다.

다산은 그의 저서《목민심서(牧民心書)》<율기(律己)>편의 ‘청심(淸心)’ 조항에서 목민관은 청렴할 때에만 제대로 목민관 노릇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임무를 마치고 근무하던 고을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목민관의 모습에 대한 내용이 담긴 <해관(解官)>편의 ‘체대(遞代)’ 조항에서 다산은 다시 청렴한 목민관의 모습을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나의 친구 한익상(韓益相 : 1767∼1846)은 가난한 선비다. 벼슬살이로 수십 년 동안 갖은 고생을 다했다. 만년에 경성판관(鏡城判官)이 되자, 친구들이 모두 그의 살림이 좀 윤택해질 것을 기뻐했다. 그런데 경성부에 부임해서도 한 결 같이 청렴결백하고 녹봉 5∼6만 전을 희사하여 굶주리는 백성들을 진휼하고 요역(徭役)을 감해주었다.

하찮은 일로 파면되어 돌아올 적에 관내 백성 5천 호(戶)의 부로(夫老)들이 교외에 나와 전송을 해주고, 호마다 베 1필씩을 거두어 그에게 노자로 주었으나 모두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돌아와 집안을 살펴보니 아궁이에 불을 때지 않은 지가 사흘이나 되었어도 끝내 후회하는 일이 없었다.”라고 자신이 직접 목격한 친구의 공직생활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한익상은 순조 7년(1807)에 문과에 급제하여 낮은 벼슬에 전전하였기에 가난은 언제나 면할 길이 없었으나 후회하지 않고 탁월하게 청렴한 공직생활을 하였습니다. 뒤에 무안(務安)현감도 지내고, 강원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청렴만을 목표로 근무하여 언제나 가난한 삶을 면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가난했지만 한익상은 녹봉까지도 더 가난한 백성들에게 희사해 버렸으며 그런 결과 임무를 마치고 떠나오던 날, 집집마다에서 주민들이 나와 환송해 줄 정도로 현명한 목민관 생활을 했으니, 다산이 칭찬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공직자들은 청렴할 때에만 백성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집안에 식량이 떨어졌어도 전별금까지 사양했던 한익상 같은 목민관이 오늘에도 있다면 얼마나 세상이 좋아질까요?

다산은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하는 동안에 반드시 실천해야 할 자신의 임무수행에 대한 각오를 “공과 염으로 온 정성 바치기를 원하노라(公廉願效誠)”라는 철석같은 각오를 표명하였습니다. 그것은 나라를 위하여 국민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반드시 지키지 않으면 안 될 두 글자가 바로 ‘공(公)’과 ‘염(廉)’이라는 글자라는 것입니다.

‘공’의 가장 큰 의미는 ‘사(私)’와 반대입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사람의 첫 번째 수칙이 사적인 것에서 벗어나 공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공직자는 선공후사(先公後私)요, 사익은 버리고 공익에 몸을 바쳐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노회찬 의원도 생활고를 고백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감옥에 있는 동안 집사람이 제 옥바라지를 하면서 살림을 꾸렸습니다. 집사람이 ‘여성의 전화’에서 일을 하면서 ‘다만 얼마라도 좋으니 생활비는 꾸준하게 벌어다 달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매달 30만원을 약속했는데, 결국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생활고 때문에 옷은 아파트 단지 내 재활용품 모아놓은 데서 주워 입었고, 또 TV같은 것은 아예 살 생각도 못했어요. 결국 누가 쓰다 버린 걸 가져다 보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고 노회찬 의원은 비록 드루킹 일당에게 두 번에 걸쳐 4000만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돈을 부정하게 쓰거나 사욕을 취하기 위하여 받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진정 이 시대를 치열하게 산 <공렴(公廉)>의 공직자가 아니었을 까요!

단기 4351년, 불기 2562년, 서기 2018년, 원기 103년 8월 1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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