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을 분리나 단절로 보지 않고 하나의 연속성으로 보는 불교의 윤회(輪廻)와 기독교의 부활과도 다르지 않는 연기론 적 세계관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범부(凡夫) 중생(衆生)의 눈으로 볼 때 죽음을 생사로 알고 불보살(佛菩薩)들은 변화(變化)로 본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범상(凡常)한 사람들은 현세(現世)에 사는 것만 큰 일로 알지마는 지각(知覺)이 열린 사람은 죽는 일도 크게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사는 비하건 데 눈을 떴다 감았다 하는 것과 같고,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며, 잠이 들었다 깼다하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죽을 것인가’가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 우리 [덕화만발] 카페의 <이언 김동수 교수 시문학 방>의 방주(房主)이신 김동수 교수님이 이에 대한 글을 올려주시어 공유(共有)하고자 합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김동수(시인. 백제예술대학교 명예교수)-

【인생의 끝은 어디일까? 죽음일까? 아님 그 너머에 또 무슨 세계가 있는 것일까?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고 자탄한 버나드쇼의 묘비명처럼, ‘내 인생도 어느 날 그렇게 끝나고 마는 게 아닐까?’하고 생각하는 날이 있었다.

우리의 삶에 가장 큰 화두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죽음’일 것이다. 한 번 돌아가면 영영 돌아오지 않기에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남긴 이야기는 언제나 비범한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슬픈 눈으로 하늘을 쳐다봐도/ 알 수 있는 건/ 언제나 無 ..../ 우리가 살아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 또한 알 수 없는 것인가/ 아! 아! 존재 한다는 건/ 다른 삶을 예고하는 현실인가/ 뜻 없이 불어대는 새벽바람의 흔들림인가」- 박순이,「인생의 끝은 어디인가」에서.

우리의 생(生)은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그 끝은 어디일까? 시작도 알 수 없고, 끝 또한 알 수 없으니 ‘하늘을/ 쳐다봐도 알 수 있는 건/ 언제나 無’ 아님 또 ‘다른 삶의 예고’인가? 하고, 언제 닥쳐올지 모를 죽음 앞에서 불안의 속내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죽음을, 그림자의 세계에서 벗어나 이데아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과의례로 보았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그렇게 의연하게 죽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죽음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門)이다. 삶과 죽음을 분리나 단절로 보지 않고 하나의 연속성으로 보는 불교의 윤회(輪廻)와 기독교의 부활과도 다르지 않는 연기론 적 세계관이다.

이승에서 착하게 살면 죽어서 천당에 가고, 극락에도 간다고 하니 웰빙(well-belng)이 곧 웰다잉(well-dying)이고 웰다잉이 웰빙인 셈이다. ‘오늘 내가 점심을 대접하면 이것이 내게 아름다운 소문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오현 스님은 말한다. 이것이 세상의 순리이고 자연의 이법(理法)이다. 그러기에 ‘죽음’이 결코 우리의 삶과 분리되어 있거나 그것으로 그냥 끝나 버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살아온 결과에 따라 윤회를 거듭하고 있다는 것이다.

형체가 없어져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그게 다른 에너지로 변화하여 이어지기 때문에, 죽음은 궁극적으로 소멸이 아니라 연속되어 있다. 만해가「임의 침묵」에서 ‘이별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만남의 시작’이라고 했듯이, 세상의 모든 끝은 새로운 시작을 가지고 온다. 춘하추동의 순환도 이러한 자연의 이법에 따라 봄에 뿌린 씨앗이 가을에 열매가 되고, 그 열매가 땅에 떨어져 사그라지면 그 자리에서 다른 생이 다시 시작된다. 이러한 연기와 윤회로 우주만상이 생멸을 거듭하고 있다.

삶과 죽음, 죽음과 삶이 하나로 이어져 있으니, ‘태어나서 죽어가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순환적 과정’을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사생병노(死生病老)의 역순관’으로 바꾸어 죽음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한 거사(居士)가 있다. 태어나서 죽어가는 허무적 생사관(生死觀)을,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생성적 사생관(死生觀)으로 죽음의 본질을 새롭게 정립해 주고 있다.

「1월은 분명히 겨울이니 겨울을 1년의 시작으로 볼 수도 있고, 12월도 겨울이니 겨울을 1년의 마지막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겨울을 1년의 시작으로 보는 농부는 겨울 내 객토도 하고 농사준비 기간으로 보내지만, 게으른 농부는 겨울 내내 움추리거나 사랑방에서 노름이나 합니다.그러나1년후추수에서두농부의차이는엄청날것입니다. - 김덕권,「죽음보따리」에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 새로운 밀알이 소생하듯, 잘 죽어야 다시 잘 태어날 수 있으니, 죽음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의 밑거름이 된다고 한다. 태어나서 사라지는 ‘생사(生死)’의 세계가 아니라,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사생(死生)’의 세계관으로 남은 생을 다부지게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죽음 앞에서 보다 자유로운 노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달라이라마의 주치의인 티베트의 배리커진 스님도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업에 따라 다시 돌아오기에 현세에 수행을 멈추지 말고 선행을 많이 베풀어야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기에 진정 두려워야 할 것은 ‘내일의 죽음’이 아니라 ‘오늘의 삶’을(어떻게 살아야 할지)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죽지 않은 생명은 없다.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죽어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죽은 자의 살아 있는 목소리를 듣는 일이요, 산 자의 죽어가는 목소리를 보살피는 일’(송종원)이다. 끊임없이 이어져 가는 이 업보의 윤회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죽어도 죽지 않은 삶이 될 것인지? 생각하면서 살아갈 일이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통찰(洞察)이 아닌가요? 일찍이 나이가 40이 넘으면 ‘죽음의 보따리’를 준비해야 한다고 소태산(少太山)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저 역시 오래 전부터 이 죽음의 보따리를 어떻게 꾸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이어오고 있는 중입니다.

살아 있는 이 세상을 '이승'이라 하고, 죽어가는 세상을 '저승'이라 합니다. 따라서 이승과 저승이 다른 세게 같이 생각하나, 사실은 그 몸과 위치를 바꿀 따름이요 다른 세상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할 때가 아닌지요!

단기 4351년, 불기 2562년, 서기 2018년, 원기 103년 7월 24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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