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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의 북방 과연 진심이었을까

기사승인 201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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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宋時烈) 조선 후기의 문신·성리학자·철학자·정치가이자 시인·평론가이다.

[뉴스프리존=안데레사 기자] 송시열이 죽은 이후, 즉 숙종 이후 노론은 분화가 되어버린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충청 노론’이 완전히 망해버린 것이다. 충청 노론이 몰락해버렸고 서울 노론이 수준 떨어지는 저것들과 더 이상 못놀아 주겠다고 해버린 것인디. 노론은 본래 서울 노론과 송시열로 대표되는 충청 노론으로 구성되었지. 근디 숙종 이후 이제 서울 노론만이 권력의 중심부에서 놀게 되었고 충청 노론은 망해버린 것이다.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던 시기, 찬사와 비난을 한 몸에 받은 인물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이상 이름이 거론되고, 4명의 임금을 모셨던 강직한 유학자, 송시열이다.사후 영의정으로까지 추증되었던 그가 종2품 이상 정무직 벼슬을 한 건 고작 10개월이다. 관직은 하지 않으면서 강력한 정치력을 행사한 산림(山林), 그들이 누구인지 송시열을 통해 알아본다. 송시열과 효종은 북벌에 대해 생각이 달랐다. 남송의 주자를 본받았던 원칙주의자 송시열, 그는 과연 사대주의자였을까? 조선중화주의로 설명되는 그의 행적을 좇는다.

단순히 송시열 이후로 충청도에서 거물, 대학자가 나오지 않아서?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충청 노론이 몰락하고 그 충청도 사림을 서울 노론이 무시한 게 아니야. 청에 대한 송시열의 맹목적 증오가 싫었고 비현실적인 세계관에 아주 서울 노론이 질려버린 거다.

충청 노론의 성리학이 조금의 현실성도 없었던 것을 서울 사족들이 알고 있었고 날로 강성해지는 청나라를 그저 무시하고 증오하기만 하는 저 촌것들과 못어울리겠다고 마음 먹고 돌아선 것인디 그 시기에 단순히 충청도 노론만 망한 게 아니여. 영남 남인들도 망해버렸어. 남인들도 서울과 경기도에 사는 남인들만이 권력의 근처에 얼쩡거리며 버티게 되었는데… 사실 그 때 지방 사림은 죄다 망했던 거 같아.

충청도에 사는 사림, 영남에 사는 사림들 모두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지고 서울 사는 노론은 차라리 근기(近畿) 남인과 놀았으면 놀았지 저 촌놈들과 상대 못해주겠다고 선을 그어버렸는데 이렇게 경화(京華) 사족들에게 개무시 당하고 권력의 중심과 담론장에서 퇴출당한 지방 사림들, 그들은 이제 진짜 웃기고 자빠진 짓을 해대기 시작한다. 정말 퇴행적인 행동만 일삼았는데 병호 시비 건과 화양묵패 건을 보면 지방 사림들이 얼마나 추하게 놀았는지 알 수 있지.

영남 남인. 경북 사림의 종사는 퇴계이고 퇴계 문하는 서애 유성룡과 학봉 김성일로 나뉘고 그렇게 양대 산맥이 되는데 1805년에 호계서원 위패를 모시는 문제로 서애쪽 사람과 학봉쪽 사람들이 싸우게 된다. 맨 윗자리는 당연히 퇴계일 것이지만 넘버 투 자리에 누구의 위패를 모시느냐 문제로 무려 70년 동안 양대 패거리가 치고받는데 경상북도에 글줄깨나 읽었다는 선비들은 모두 이 문제에 끼어들고 핏대 올렸다지.

이 문제를 말이여 경상감사도 해결 못했고 한양사는 임금님 순조까지 나서게 되는데 어쩌질 못해. 아무도 이 문제를 해결 못했는데 대원군이 시마이를 했어. 뭐 호계서원에 위패 위치가 문제라고? 대원군은 그냥 호계서원을 부셔 버렸어. 호계서원이 철폐되면서 문제에 종지부를 찍어버린 것. 내가 원군이 형 좋아허는 디는 다 이유가 있다니깨.

화양서원 묵패 문제도 있었지. 송시열이 1689년에 사약 먹고 뒤졌는디 그가 남긴 유지?가 있다지. 바로 만동묘의 창건. 1695년에 송시열을 모신 화양서원이 세워졌고 그 서원 옆에 이윽고 만동묘가 세워졌는데 만동묘는 명나라 황제 만력제(신종)와 마지막 명의 황제 의종의 위패를 모신 시설물이라고 아시면 된다. 그런데…

운영, 유지 관리를 위해 물자와 쩐이 필요했는데 그걸 충당하기 위해 충청 노론은 조폭짓을 행했어. ‘화양묵패’라는 것을 찍어냈던 것인디. 제사 지낸다, 서원을 유지한다는 구실로 인근 백성과 지방관에게 물자와 노동을 요구하는 묵패를 발행했고 제사에 돈이 필요하니 언제까지 얼마를 납부하라고 묵패에 찍어 일방통보를 했던 것. 개도적질을 헌 것인디 이걸 거부하면 백성은 잡아다 고문을 하고 매를 치고 감금하고 지방관은 통문을 돌리고 중앙에다가 땡깡을 피워 옷을 벗기려고 했는데… 묵패를 받게 된 뭇 서민들은 논밭을 팔아서라도 재물을 바쳐야 했고 지방 행정관들도 그 묵패를 받고서는 그저 쩔쩔…

이황의 후예라는 놈들이 경북에서 행한 짓꺼리, 송시열의 후예라는 것들이 충청도에서 행한 양아치-조폭짓꺼리가 이러했어. 몰락한 지방 사림들이 촌구석에서 이런 짓꺼리나 하면서 놀았는데 권력에서 멀어지니 그런 식으로 자신들의 권위를 촌에서 과시하고 치부행위를 하면서 사회적 지위를 재확인하려고 한 것이지.

그래도 우리가 양반이여. 벼슬은 못해도 우리는 느그들 지배자여 라고 이런 식으로 보여주려고 한 것인디 서원의 주인으로 자처하며 서원 재산으로 무위도식하고 행정질서와 지방사회의 기강을 무너뜨리고 서원들 때려부순 대원군이 왜 민중들에게 인기가 좋았고 동학농민들도 대원군빠였는지 이해가 좀 되실텐데… 문제는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거여.

▲사진: 충북 괴산군에 위치한 송시열 묘와 묘비

서울에 사는 사족들은 지방 것들과 달랐어. 청을 인정했고 배우자고도 했으며 외부세계에 대해 보고들은 것이 있어서 훨씬 유연한 사고를 가졌는디. 그래서 개화파도 실학자들도 그 그룹에서 나온 것, 그런디 문제가… 경화 사족들, 서울 양반들이 나라가 망하고 전쟁이 벌어지고 이 와중에 적지 않게 몰락해 버렸는데 조선후기에 그렇게도 유치하고 무식한 짓꺼리들을 벌이고 서울 사족들에게 개무시당한 지방촌놈들이 전통 한학자, 향토 한학자란 이름으로 학문적 권력을 획득하며 부활했다는 것이다. 그랴 쉽게 말해 여기저기 불려가서 한 자리 맡기도 하고 교수들도 많이 되고 그랬다는 것인디.

제도권에 편입되었고 대학에 자리 잡아 교수도 많이 되고 그래서 힘을 꽤 썼고 지금도 힘을 꽤나 쓰는디 사실 조선시대 때는 상상도 못할 일. 그 때는 정말 촌놈들이라고 철저히 무시 당했거든. 족보가 있으면 뭐하고 사서오경을 달달 외우면 뭐할 거야. 서울 양반, 한양 선비들에게 세상 물정 모르고 현실에 대해 모르는 것이라고 철저히 무시당했는데. 아싸리 서울 양반들이 중인들하고 놀았으면 놀았지 영남과 충청도 사는 촌놈들 상대했을 거 같애? 그 때나 지금이나 말이 통해야 어울릴 거 아녀. 나부터도 말귀 못알아듣는 놈들하고는 상종하기 싫더라.

나라가 망하고 해방 당하고 내전을 벌이고 서울 노론 해체되고 전통단절 시기를 한참 겪은 후가 되니 이 촌놈들이 대접 받기 시작했고 거기서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지. 지방 사림 후손들이 국가의 돈도 받고 선생노릇도하고 적지 않게 대학교수로 편입이 되면서 참 골 때린 문제가 생겼는데.

제도권의 동양철학 한다는 교수들이 왜 이렇게 사대부 의식에 쩔어 있고 유가 아닌 다른 동양철학은 무시하고 왜 이렇게 완고하고 배타적이고 교조적이냐. 현대학문의 성과를 수용하는 데 인색하고 이론-사상적 진화를 못했고 말이여. 내가 보기엔 그래. 유학 자체의 성격, 조선 성리학의 근본적인 특질도 있지만, 시골 촌놈들이 해방 이후 적지 않게 득세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봐. 유학의 세계관이라기보다는 촌놈들 세계관이 득세하게 된 것인디. 서울 노론, 한양 남인들 개화를 말하고 실학을 말한 사람들이 근대 학문을 배워 제도권에 편입되고 교수가 되었으면 우리 동양철학 수준이 이러할까?

무슨 무슨 학술 대회에서 주희를 주자라고 안하고 주희라고 부르면 혼나. 감히 우리 주자 선생님 이름을 함부로 부른다고 지랄지랄. 그리고 법가 쪽 연구해서 박사학위 받은 사람은 그 이유만으로도 인신공격을 당하기도 하고. “자네 혹시 사회주의 자 아녀?” 빨갱이 아니냐고 허는디 이렇게 완고하고 유치하게 놀아.

서울 살았던 사족들… 청의 파워와 발전 인정했고 유학 아닌 다른 학문들도 공부했지. 유가 아닌 다른 학문들을 자신의 전공이라고 내세우진 않았지만 묵학이든 병가의 학문이든 법가의 학문이든 나름 이해를 하고 있었지. 그렇게 사고와 시야가 트이고 지방사림들에 비하면 훨씬 유연하고 똑똑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의 후손들이 득세를 했다면… 현대적 글쓰기도 배우고 사회과학과 만나기도 하고 다른 현대 인문학 이론들을 연구하기도 해 사상적 진화의 자양분으로 삼기도 하고 그랬을 거란 생각을 하는데 하지만… 그 양반들이 아니라 지방 사림의 후예들이…

아이구 답답해. 동양철학이 유학만, 성리학만 파는 게 아니라 병가와 법가, 양명학 두루두루 많이 공부하고 현대 학문의 성과 수용하고 하면서 진화를 하면 얼마나 좋아. 그저 경전 해석하면서 현토(懸吐)나 하고 훈고학적 연구만 허지 말고 말이여. 그리고… 맞아 학봉 김성일이 이 개새끼는 임진왜란 발발과 동시에 목을 쳤어야 했는데… 아직도 경상북도 쪽 가면 김성일이 후손들이 개설레발 친다매. 김성일의 행동 옹호하고 말이여. 답사 온 사람들에게 가이드질 한다면서 그런다는디 니들 내 손에 걸리면 죽는다.

안데레사 기자 sharp229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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