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산 김덕권 칽럼니스트

죽음의 보따리

만일 우리가 내일 죽는다면 어찌하면 좋을까요? 이 세상 오는 데는 순서가 있지만, 떠날 때는 순서가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스웨덴사람들은 ‘데스클리닝’이라는 걸 한답니다. 이 말의 뜻은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의 주변 정리라고 하네요. 그런데 꼭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만 이 ‘데스클리닝’이 필요할까요? 아닙니다. 죽음을 앞두고 있지 않더라도 한번쯤 죽음을 가정하고 주위를 정돈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지난겨울 극장가의 승자는 ‘신과 함께―죄와 벌’ 그리고 애니메이션 ‘코코’였다고 합니다. 각각 1440만, 343만 관객을 동원했다고 하네요. 둘 다 죽음과 사후(死後) 세계를 다뤘습니다. 웹툰 ‘죽음에 관하여’는 조회 수 1위로 연재를 마쳤다가 독자들의 요청으로 재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출판계에서도 ‘어떻게 죽을 것인가’ ‘숨결이 바람 될 때’에 이어 서울대병원 허대석 교수가 펴낸 ‘우리의 죽음이 삶이 되려면’이 큰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이 얘기는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이 있을 만큼 삶에 강한 애착을 보였던 우리 사회에서 죽음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영국의 가디언 지는 최근 “출생이나 결혼처럼 죽음도 개인 취향에 따라 계획하는 유행이 생겼다”고 보도했습니다.

필리프 아리에스가 쓴 ‘죽음의 역사’에 따르면 죽음을 금기시하게 된 건 20세기 초 급격한 산업사회에 돌입한 미국에서 시작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풍요에 대한 열망이 커질수록 삶은 칭송받고, 죽음은 저주받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회에서 죽음을 기피하니 사람들은 집이 아닌 병원에서 홀로 죽기를 바라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병원 내 임종 비율이 70% 이상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합니다. 이런 현상은 죽음에 대한 태도가 변화한 것으로 고령화와 연관이 있는 모양입니다. 일본에서도 죽음을 준비하는 문화 ‘종활(終活 · 슈카쓰)’이 이미 10조원대 산업으로 성장했다고 NHK가 보도했습니다. 배우자나 자식 없이 노후를 보내는 노인이 많아진 것도 한 이유입니다.

북미와 유럽에서 인기를 끈 책 ‘The Art of Swedish Death Cleaning(내가 내일 죽는다면)’에 따르면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것은 오히려 삶에 활기를 준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데스 클리닝’이란 죽음을 대비해 살면서 미리미리 물건을 버리거나 기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소태산(少太山) 부처님께서는《대종경(大宗經)》<천도품(薦度品)>에서 죽음에 대한 법문을 내리셨습니다.「범상한 사람들은 현세에 사는 것만 큰 일로 알지마는, 지각이 열린 사람들은 죽는 일도 크게 아나니, 그는 다름이 아니라 잘 죽는 사람이라야 잘 나서 잘 살 수 있으며, 잘 나서 잘 사는 사람이라야 잘 죽을 수 있다는 내역과, 생은 사의 근본이요 사는 생의 근본이라는 이치를 알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조만(早晩)이 따로 없지마는 나이가 사십이 넘으면 죽어 가는 보따리를 챙기기 시작하여야 죽어 갈 때에 바쁜 걸음을 치지 아니하리라.」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이 40이 넘어 생사를 연마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첫째, 착심 두는 곳 없이 걸림 없는 마음을 늘 길들여야 할 것입니다.

둘째, 생사가 거래인 줄 알아서 늘 생사를 초월하는 마음을 길들여야 할 것입니다.

셋째, 마음에 정력(定力)을 쌓아서 자재(自在)하는 힘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

넷째, 평소에 큰 원력(願力)을 세워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과학문명이 핵폭탄 발명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마찬 가지로 도학문명도 생사를 해결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제 우리도 매일매일 생사를 연마하는 시간을 정하고 끊임없는 적공(積功)을 들여야 생사대해(生死大海)를 무난히 건널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의 사계(四季)의 시작은 죽음입니다. 인생의 사계를 ‘생로병사(生老病死)’라 할 때 시작은 분명 ‘생(生)’입니다. 그러나 잘 죽어야 잘 태어남으로 인생의 사계를 ‘사생병로(死生病老)’로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 말은 부지런한 농부와 게으른 농부의 차이는 겨울을 1년의 시작으로 보느냐 마지막으로 보느냐에 달려 있는 것과 같습니다.

1월은 분명히 겨울이니 겨울을 1년의 시작으로 볼 수도 있고, 12월도 겨울이니 겨울을 1년의 마지막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나게 차이가 납니다. 겨울을 1년의 시작으로 보는 농부는 겨울 내 객토도 하고 농사준비 기간으로 보냅니다. 그런데 게으른 농부는 겨울 내내 움 추리거나 사랑방에서 노름이나 합니다. 그러나 1년 후 추수에서 두 농부의 차이는 엄청날 것입니다.

장수국가 일본은 벌써 ‘웰 빙’은 가고 ‘웰 다잉’의 나라답게 죽음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고 합니다. 시내 곳곳에 ‘웰 다잉 다방’이 있고, 사찰은 이미 무병장수를 비는 사찰 보다는 9988 234를 축원하는 ‘핀코르’ 사찰이 유행입니다. 일본 같은 선진국에서도 죽음에 문제가 부각된 것은 본격적인 장수국가로 일본이 전환된 2000년 대 초반부터라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그런데 지금부터 100여 년 전에 이미 ‘나이가 사십이 넘으면 죽어 가는 보따리를 챙기기 시작하여야 죽어 갈 때에 바쁜 걸음을 치지 아니하리라.’는 소태산 부처님의 말씀은 이제 ‘새 삶’만큼 ‘새 죽음’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경고의 말씀이 아닐까요?

사람이 한 평생 행할 도(道)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요약하면, 생과 사의 도에 벗어나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살 때에 생의 도를 알지 못하면, 능히 생의 가치를 발하지 못할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죽을 때 사의 도를 알지 못하면, 능히 악도(惡道)를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사람의 생사는 비하건대 눈을 떴다 감았다 하는 것과 같고, 숨을 들이 쉬었다 내 쉬었다 하는 것과 같으며, 잠이 들었다 깼다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생사란 그 조만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치는 같습니다. 생사가 본래 둘이 아닙니다. 우리가 내일 죽는다면 얼마나 종종걸음을 칠까요? 우리 미리미리 죽음의 보따리를 챙겨둡시다. 그러면 조금은 여유롭게 죽음을 맞이하지 않을 런지요!

단기 4351년, 불기 2562년, 서기 2018년, 원기 103년 6월 8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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