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년,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일어난 ‘동학농민혁명’ 폭정·외세침탈로 혼란스런 정국 배경

▲ 1894年 12月 전라도 순창에서 체포된 뒤 서울로 압송되는 전봉준

[뉴스프리존=강대옥 선임기자]동학농민군 최고 지도자인 전봉준장군 동상이 123주기를 맞아 서울 한복판에 세워진다. 사단법인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이사장 이이화)는 오는 24일 오전 11시 종로네거리 영풍문고 앞에서 전봉준 장군 동상 제막식을 연다고 밝혔다. 2017년 동상건립위원회가 창립된 지 1년만이다. 동상건립위원회는 국내 처음으로 동상건립 기금 2억7000여만원을 국민성금으로 모았다. 동상은 충북대 김수현 명예교수가 제작했다.

지난 2017년 창립된 위원회는 서울 내 동상 건립을 준비해 온 끝에 지난달 21일 서울시 공공미술위원회로부터 건립을 허가 받은 바 있다. 동상 건립을 위해 국민 성금 2억7,000만원이 모였다. 동상 제작은 충북대 명예교수 김수현 작가가 맡았다. 종로에 동상이 들어설 수 있게 된 것은 지난 2016년 8월 박원순 서울시장이 전주에 내려와 동학혁명기념사업 관계자로부터 전봉준 장군 순국터인 서울에 동상을 건립하자는 제의를 받아들이면서 가시화됐다. 박 시장은 순국 장소였던 옛 전옥서 터에 서울시유지가 있다는 사실을 보고 받고 지난해 4월 서울시 법인으로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를 설립했다.

위원회는 전봉준 장군의 순국 장소에 동상을 세우는 의미에 대해 “한국사회의 근대화와 직결된, 정치적 자유와 사회적 평등의 전환점이 된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는 상징물 건립이 필요하다”며 “일본 침략에 맞서 민족 모든 세력을 통합하는 전국적인 재봉기를 추진했으나 무차별한 진압과 살육으로 수만 명이 살해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희생을 추모하는 상징물”이라고 밝혔다. 제작이 완료된 동상은 서울시 공공미술심의원회를 통과해 현재 건립공사가 진행중이다.

▶전봉준장군은 1894년 학정에 항거해 전면 봉기한 동학농민군의 최고 지도자다. 그는 우금치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한 후 서울로 압송돼 전옥서(典獄署)에 수감됐다. 그 자리가 종로 네거리 영풍문고 자리다. 1895년 3월29일(음력) 법무아문 대신 서광범이 주재한 선고재판에서 전봉준 등 동학농민군 지도자 5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의금부가 법무아문 권설재판소로 바뀌고, 재판소 구성법이 공포된 지 4일 만의 사형선고였다.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자들은 근대 사법제도가 출범한 이후 첫 사형선고의 희생양이 된 셈이다.

전봉준은 “정부의 명이라면 기꺼이 목숨을 바치지만 바른길을 걸었던 자에게 대역죄를 적용한다니 천고의 유감”이라고 일갈했다.

다른 이들도 의연했다. 일본 신문 ‘시사신보’ 다카미 가메高見龜 기자의 참관기가 가슴을 저민다. “사형선고를 받으면 대개 혼비백산하는 법인데, 조선 사람은 배짱이 좋다.

동학의 거두 전(봉준)·손(화중)·최(경선)·김(덕명)·성(두한) 등은 매우 대담했다.”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한지 벌써 123년이 흘렀다. ‘동학 난’에서 혁명이란 이름을 얻기까지 힘든 과정을 지나오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이제 우리에게 그 의미를 다시 묻고 있다. 뉴스프리존은 동학농민혁명 123주년을 맞아 혁명의 시작부터 현대에서 바라본 동학의 의의까지를 지면에 담아봤다. <엮은이 밝힘>
①발발원인 ②전개과정 ③역사적 의의 ④ 동학농민혁명과 세계의 혁명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단 1년 동안의 사건이다. 1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것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는 실로 엄청나다. 당시 조선에 있는 대부분의 농민들이 국가를 상대로 반기를 들고 일어났고, 이들에 대해 조선정부가 인정했으며, 집강소를 통한 농민자치 또한 인정했다. 동학농민혁명은 이후 전개되는 한국사의 흐름을 결정했다. 반만년 우리 역사 속에서 1년의 시간적 의미가 아니라 동학농민혁명은 우리 역사의 흐름을 관통하고 있는 1년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인원은 많게는 100만이라고도 하며 죽거나 다친 사람이 30만이며 죽은 사람이 10만이라고도 한다. 19세기 조선의 인구를 대략 1,000만 정도로 추산해 볼 때 실로 엄청난 사람들이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역사적 시간과 공간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엄청난 사건이 1894년이라는 시간에 조선이라는 공간에서 일어난 것일까? 그리고 누가 이러한 사건을 주도했을까?

19세기 조선 사회의 수탈 구조와 경제적 변동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이후 순조, 헌종, 철종 임금까지 60년간 이른바 세도정치라는 기형적인 정치가 이뤄졌다. 왕실과 연결된 소수의 몇몇 집안이 국가권력을 장악해 견제와 균형이라는 기본적 정치질서가 무너지고 일부 세력에 의해 국권이 좌지우지됐다. 이러한 정치질서가 계속되면서 조선정부는 국가운영능력을 상실하게 됐다. 더 나아가 국가가 직접 나서서 부패구조를 양산하게 됐다. 국가재정과 왕실재정이 부족하자 조선정부는 이를 충당하기 위해 국가가 직접 수만냥을 받고 관직을 팔았다. 돈을 주고 관직을 산 지방관은 그들이 투자한 본전을 획득하고자 일반 백성들로부터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수탈했던 것이다. 국가로서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악질적인 수탈은 과도한 세금의 징수이다. 지방관들은 이른바 삼정(전정, 군정, 환정)이라고 하는 세금 징수 구조를 이용해 백성들로부터 과도한 세금을 징수했다. 일반 백성들은 이러한 과도한 세금을 내고 나면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말하자면 삶의 기반을 상실하게 되었던 것이다. 삶의 기반을 만들어 주어야 할 국가가, 공권력을 가진 자들이 오히려 백성들의 삶의 기반을 와해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1876년 조선은 일본의 강요에 의해 강화도조약이라는 이름으로 문호를 개방했다. 이러한 문화개방으로 조선의 산업구조는 와해됐다. 즉 많은 양의 쌀을 일본으로 가져감에 따라 쌀이 갑자기 부족해져서 조선에서 쌀값이 폭등했다. 또한 값싼 외국산 면포를 수입해 옴에 따라 조선의 가내수공업이 와해됐다. 여기에 청나라와 일본상인들이 조선에 들어와서 상업활동을 함에 따라 기존 조선의 보부상과 상업자본이 무너지게 됐다. 이러한 경제적 변화 역시 일반 백성들의 삶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조선에 살고 있던 대부분의 농민들은 더 이상 삶의 희망을 찾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울 뿐만 정신적으로 매우 피폐한 삶을 살고 있었다.

동학의 창도
동학(東學)은 글자의 의미로 보면 동쪽의 학문이다. 이는 서학(西學) 즉 서쪽의 학문에 대칭되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서학은 당시 조선에서는 서쪽에서 들어온 천주교를 인식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동학은 19세기라는 시대적 조건 속에서 서쪽의 학문 또는 서쪽의 사상에 대응해서 조선이라는 공간속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조선은 통치 질서가 와해되고 농민들의 삶의 기반이 무너졌으며 서양의 침략위협에 위기감이 어느 때보다 높았다. 농민들은 의지할 바가 없게 되었고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동학이라는 새로운 그리고 자주적인 종교가 창도됐다. 1860년 경주에서 최제우가 유교의 한계를 극복하고 서양에서 들어온 천주교에 대항하고자 유교, 불교, 도교의 장점을 합해 동학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만든 것이다. 

동학은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인간평등사상과 새 세상이 열린다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사상을 바탕으로 했으며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동학에 입도해 성경신(誠敬信)을 다하면 시천주(侍天主)를 이룰 수 있고, 그와 같은 사람들이 천운(天運)에 순종하고 천도(天道)에 합치하면 내세가 아니라 현세에 조화롭고 정의로운 새 세상, 지상천국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동학이 창도되자마자 조선의 농민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경상대 일대로 전파됐다. 그러나 동학을 체제를 위협하는 학문으로 지목한 조선정부가 1863년 12월 최제우를 체포해 1864년 3월 ‘사도난정(邪道亂正;사악한 도로 세상을 어지럽게 했다.)’의 죄목으로 처형하고 그의 제자들을 유배 보냄에 따라 동학은 조선에서 불법이 됐다.

최제우가 처형된 후 동학교단의 지도자가 된 최시형은 정부의 탄압을 피해 강원도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어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등 경전을 간행하고 제의(祭儀)와 조직을 정비하는 등 동학교단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후 1880년대 동학의 교세가  확대되어 충청도 및 전라도 일대에서 급격하게 동학도가 증가했다. 이러한 동학의 교리와 조직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기본적 토양이 됐다. 

동학공인운동과 주체세력의 등장
1860년 동학이 창도되고 1864년 최제우가 처형됐지만 이후 동학은 최시형이 이어받아 교세가 급격하게 확장됐다. 1890년에 이르러서는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등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동학을 믿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그런데 이렇게 동학도가 늘어나게 되자 폐단이 나타났다. 아직 조선정부로부터 공식적으로 종교로 인정받지 못한 동학을 믿는 것은 불법이었다. 이에 따라 관리들은 동학을 믿는다는 것을 빌미로 백성들의 재산을 강탈했다. 이렇게 되자 급격하게 교세가 확장된 최시형이 이끄는 동학교단은 새로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교조신원운동, 즉 동학공인운동이었다.

교조신원운동은 억울하게 죽은 교조 최제우에 대해 조선정부가 그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것이다. 조선정부가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은 조선정부가 동학을 종교로 인정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교조신원운동, 즉 동학공인운동은 1892년 10월 공주집회부터 시작됐다. 동학교단의 요구는 동학교도들을 수탈하지 말라는 것과 동학을 종교로서 인정해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충청감사는 동학교도들을 침탈하지 않겠다고 답변했으나 종교로 인정하는 것은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답변했다.

동학공인운동은 이후 삼례집회, 광화문복합상소, 괘서사건, 보은집회, 금구집회 등으로 이어졌다. 동학공인운동은 최시형이 이끄는 동학교단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동학공인운동 과정에서 새로운 세력이 형성됐다. 그들이 바로 이후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하는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 이른바 사회개혁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동학공인운동 과정에서 교류하면서 조선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고 이를 실현시킬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배경에는 19세기 조선 사회의 수탈구조와 경제적 변동이 있었고, 여기에 동학이라는 종교가 만들어져 사상과 조직의 형성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 전라도를 기반으로 한 사회개혁세력이 주체세력으로 등장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전봉준과 동료들은 다음날 1895년 3월30일(음력) 새벽 2시 교수형에 처해졌다. 상처가 아물지 않아 꼼짝도 못했던 전봉준은 아리衙吏의 품에 안겨 사형장으로 갔다. 전봉준은 마지막으로 “종로 네거리에 내 목을 베어 오가는 사람에게 피를 뿌리라”면서 “어찌 이 깜깜한 적굴에서 암연히 죽이느냐”고 외쳤다. 체포부터 사형 집행까지 전봉준의 일거수일투족을 본 강모某는“풍문보다 훨씬 뛰어난 인물이었다”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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