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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대구기념사업회 창립총회 이후 1차 인문학기행 개최

기사승인 2019.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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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에서 17년 살았던 남산동 이육사생거지 고택 방문 후 독립투사 민족시인 이육사 선생 정신계승 및 선양을 위하여 대구시민과 함께 인문학 기행 가다.

이육사 문학관 앞에서 / 사진 = 문해청 기자

[뉴스프리존,대구=문해청 기자] 이육사대구기념사업회(상임대표 정대호)는 29일 남산동 이육사생거지 고택을 방문 후 경북 안동 이육사문학관, 생가, 임청각(이상룡 선생), 경북독립기념관, 신흥무관학교체험관, 권정생작가 생가를 방문하는 1차 인문학기행을 개최했다.

이날 이육사대구기념사업회는 이육사의 삶과 문학을 기억하며 자주독립정신을 계승하고 민족문학을 선양하는 건강한 시민의 문화적 노력을 실천하며 시민회원(일반, 후원)과 함께할 것을 목표로 자주독립운동정신문화의 산실 경북 안동으로 기행을 갔다.

이육사대구기념사업회 창립총회 이후 상임대표 정대호, 공동대표 김우철, 공동대표 문해청, 사무처장 고경하, 운영위원장 정지원, 집행위원장 김윤현, 사무간사 변화진 등이 준비한 1차 인문학기행 개최는 다음과 같다.

[독립투사 민족시인 이육사]

퇴계 이황의 후손, 저항의 깃발을 들다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에서 아버지 이가호와 어머니 허길의 6형제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적 기록된 이름은 원록(源祿), 두 번째 이름은 원삼(源三)이고 훗날 활(活)로 개명했다. 자(字)는 태경(台卿), 본관은 진성(眞城)으로 퇴계 이황의 14대 손이다. 그는 어린 시절 보문의숙(寶文義塾)이라는 신식학교를 운영했던 할아버지 이중직으로부터 전통 한학을 배웠다.

일제강점기 최고 저항시인 이육사를 키워낸 안동 지방은 1894년 갑오의병을 창의하여 독립운동 첫 장을 연 지방으로 친일행위나 태도를 인정하지 않은 기풍을 견지하고 있다. 이처럼 엄중한 분위기 속에서 일제의 압력에 결코 굴하지 않는 강렬한 민족정신이 자라났다.

남산동 이육사 시인 생거지 앞 /사진=문해청 기자

12세 때 1915년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가세가 기울자 이육사의 가족은 안동군 녹전면 신평동 듬벌이로 이사했다. 그러다 재차 대구로 이사한 뒤 약령시장 약재상 점원으로 일했던 이육사는 서화가로 명성을 떨치던 석재 서병오에게 시(詩) 서(書) 화(畵)를 배웠다.

17세 때 1921년, 이육사는 영천 출신 안용락의 딸 안일양과 결혼한 다음 처가에서 가까운 백학학원에서 1년 동안 공부했는데, 바로 이때 원삼이란 이름을 사용했다. 1923년부터 9개월 동안 백학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3년, 이육사는 19세의 나이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경찰 기록에 따르면 당시 그는 도쿄쇼오소쿠(東京正則)예비학교, 니혼(日本)대학 전문부에서 공부했다. 하지만 검찰신문조서에는 이와 달리 킨죠우(錦城)고등예비학교에 1년간 재학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25년 귀국한 이육사는 대구 조양회관에서 주최한 신문화강좌에 참여했다. 조양회관은 1922년 독립운동가 서상일이 민족계몽운동을 위해 세운 교육회관이다. 그는 이곳에서 만난 동지 이정기, 조재만 등과 함께 수시로 중국을 드나들며 독립운동을 모색했다. 1926년 7월에는 베이징에 있는 중국(中國)대학 상과에 입학하여 7개월 동안 공부했다.

장진홍사건과 대구격문사건에 휘말리다

1927년 10월 18일,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신문지에 싸인 커다란 선물상자가 배달됐다. 은행 직원이 수상하게 여기고 길거리에 내놓자마자 그 안에 담겨있던 폭탄이 굉음을 울리면서 폭발하면서 경찰 4명을 포함하여 도합 6명이 부상을 당했다.

대구경찰서 순사는 범인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아무런 단서도 없었다. 경찰은 대구에서 활동하던 민족지사를 무차별로 잡아들여 야만적 고문을 하며 자백을 강요했다.

이때 이육사는 형 이원기와 동생 원일, 원조와 함께 경찰서에 끌려가 갖은 곤욕을 치렀다. 평생 17차례 걸친 체포와 투옥의 시발점이다.

사건이 발생한 지 1년 4개월이 지난 1929년 2월 14일, 일본 오사카에서 진범 장진홍이 체포되며 이육사의 형제는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경찰은 그해 12월이 되어서 그들을 석방했다. 한편 장진홍은 사형을 선고받자 이듬해인 1930년 7월 31일 자결함으로써 비장한 최후를 맞았다.

한편 1929년 11월부터 시작된 광주학생의거가 확산되며 1930년 1월 대구에서도 동맹휴학사태가 벌어졌다. 아울러 대구 일대에 일제를 성토하는 격문이 휘날렸다. 이에 경찰은 예비검속 차원에서 대구청년동맹 간부였던 이육사를 체포했다가 19일에 풀어주었다. 그해 2월에는 중외일보 대구지사 기자로 임용되었지만 3월에 또 다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그해 8월 조선일보사 대구지국으로 직장을 옮긴 그는 10월에 잡지 《별건곤》에 ‘대구이육사’란 필명으로 ‘대구사회단체개관’이란 글을 발표했다. 1931년 1월 3일에는 조선일보에 ‘이활’이라는 본명으로 첫 시 〈말〉을 발표했다. 그 뒤에도 대구격문사건을 빌미로 체포되어 두 달 동안 수감되었다가 풀려나는 등 시련이 거듭됐다.

의열단의 군사간부교육을 받다

1932년 3월, 조선일보사 퇴사 후 이육사는 만주의 펑톈을 거쳐 베이징에서 밀양 출신으로 김원봉과 의열단을 설립했던 민족지사 윤세주를 만났다. 그의 권유에 따라 이육사는 10월 20일 난징 근교 탕산에 의열단이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입교했다.

장제스(蔣介石)의 후원으로 설립된 이 학교의 정식 명칭은 ‘중국국민정부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제6대’였다. 학생은 재학 중 중국 국민군 보통병사 상위의 신분으로 견습사관 대우를 받았고, 졸업한 뒤에는 소위로 임관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들은 아침 6시부터 저녁 9시까지 교양과목과 군사학을 교육받았다. 교양과목은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철학 등이고 군사학은 통신법, 선전법, 연락법 등을 비롯하여 탄약, 폭탄, 도화선, 뇌관 등 제조법, 폭탄 투척법, 피신법, 변장법, 서류은닉법, 삐라살포법, 암살법, 무기운반법, 철로폭파법, 열차운전법 등 다양했다. 교관은 한모, 왕현지, 김정우, 김원봉 등 중국인과 한국인이 뒤섞여 있었다.

이육사 시인 생가터 / 사진 = 문해청 기자

1933년 4월 23일, 거행된 제1회 졸업식에는 교장 김원봉과, 남경중국일보 사장인 캉저(康澤)와 비밀공작법을 가르친 시에중용(協中庸) 등이 참석했다. 그때 이육사는 식후공연으로 준비한 연극 〈지하실〉 대본을 쓰고 직접 연기자로 출연했다. 졸업식이 끝난 뒤에는 국내 노동자 농민에 대한 혁명의식 고취와 2기생 모집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육사는 그 후 베이징에 있는 북경대학 사회학과에 들어가 학업을 계속하는 한편 국내에서 발간된 《대중》 창간 임시호에 평문 〈자연과학과 유물변증법〉을 게재했다. 같은 책 ‘게재되지 못한 글 목록’은 ‘이육사(李戮史)’의 〈레닌주의철학의 임무〉가 담겨있다.

러시아혁명의 성공과 함께 전 세계로 파급된 사회주의 사상에 깊이 빠져있었음을 알 수 있다. 5월에는 상하이에서 중국의 대문호 루쉰(魯迅)과 만나 교감했다.

총칼 대신 펜으로 일제와 맞서다

1933년 7월 국내에 잠입하여 은밀하게 항일활동을 펼치던 이육사는 9월에 ‘육사(陸史)’라는 필명으로는 처음으로 잡지 《신조선》에 시 〈황혼〉 발표했다. 그런데 1934년 3월, 그가 군사간부학교 출신이 밝혀지면서 경기도경찰부 형사에게 체포됐다.

이때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면서 작성된 신원카드에 따르면 신분은 상민이었고, 신장은 약 165cm였다. 경찰은 이육사가 만주로 사라진 2년 전부터 요주의 인물로 지목하고 전국에 수배령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그는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중국 행적에 대하여 비밀을 지킨 결과 석 달 뒤인 6월 23일 기소유예 의견으로 석방될 수 있었다.

그해 7월, 안동경찰서에서 작성한 이육사 감시보고서를 보면 석방 이후에도 경찰로부터 철저하게 감시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배일사상, 민족자결, 항상 조선의 독립을 몽상하고 암암리에 주의의 선전을 할 염려가 있음. 민족공산주의로 전화하고 있는 것으로 본인의 성질로 보아서 개전의 정을 인정하기 어려움.'으로 기록되어 있다.

본격적으로 문학의 길을 걷다

1935년부터 이육사는 정인보가 주도하는 신조선사에서 일하면서 《신조선》에 7편의 시를 발표함으로 본격적 시인의 길을 걸었다. 이후 그는 중외일보사, 조광사, 인문사 등지로 일터를 옮겨 다니며 한시와 시조, 논문, 평론, 번역, 시나리오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했다. 이 시기에 루쉰의 소설 《고향》을 번역하기도 했다. 1936년 8월 4일, 이육사는 요양 차 머물고 있던 경주의 옥룡사에서 쓴 시조 두 수를 시인 신석초에게 보냈다. 이 작품들은 평시조 자수율을 엄격하게 지킨 전형적 시조로 그의 문학적 역량을 보여주고 있다.

뵈올 까 바란 마음 그 마음 지난 바램.

하루가 열흘같이 기약도 아득해라.

바라다 지친 이 넋을 잠재울까 하노라.

마태식 기자, 이훈 고문 / 사진 = 문해청 기자

1937년에는 신석초, 윤곤강, 김광균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을 발간하고 대표작 〈청포도〉, 〈교목〉, 〈파초〉 등 상징적이고 서정성이 풍부한 시를 발표했다. 이어서 《조광》, 《풍림》, 《문장선》, 《인문평론》 등의 지면을 통해 1941년까지 〈절정〉, 〈광인의 태양〉 등 수많은 작품을 게재했다. 정한모 교수는 《나라사랑》 16집에 실린 〈육사시의 특질과 시사적 의의〉에서 그를 이렇게 상찬했다.

'그에 의하면 시는 행동이며 진정한 의미의 참여라고 한다. 그는 식민지적 압력에 대항하고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하여 대륙을 전전하며 숱한 고난과 역경을 체험했다. 이러한 역경과 인고의 극복노력은 기다림의 철학과 초인 의지로 승화된다. 온 몸을 내던진 헌신적 투쟁의 수형(受刑)의식으로 일제에 저항하여, 그러한 인고와 생명의 절정에서 끝없는 기다림과 초인에 대한 열망을 시로써 형상화하여 보다 진정한 저항 방식을 보여 준 것이다.'

베이징의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하다

1941년 2월, 이육사는 37세의 늦은 나이에 딸을 얻었다. 그는 기쁨 속에서도 경계하는 심정으로 딸의 이름을‘기름지지 말라.’는 뜻의‘옥비(沃非)’로 지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 했던가. 그해 4월에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겪었고, 가을에는 심해진 폐질환 때문에 성모병원에서 병마와 싸웠다.

모두가 잦은 투옥과 고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1943년부터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일제는 한국인을 방패막이로 삼기 위해 내선일체를 표방하고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등 조선인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당시 일제가 일본어를 강요하고 한글 사용을 금지하자 분개한 이육사는 문예지에 한시(漢詩)만 발표하는 결기를 보였다.

그해 4월, 그는 충칭과 옌안에 가서 무기를 들여와 일제와 싸우고자 했다. 하지만 7월 초순 어머니와 형의 소상을 치르러 일시 귀국했다가 동대문경찰서 형사들에게 체포되었다. 며칠 후 베이징으로 압송된 그는 현지의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갖은 고문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의열단 단원이자 친척이었던 이병희가 수습하여 화장했고, 연락을 받은 동생 이원창이 유골을 서울로 가져와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1960년에 그의 유해는 고향 원촌의 뒷산으로 이장됐다.

이육사는 일제 강점기 활동했던 수많은 문인들 가운데 끝까지 가장 진취적이고 적극적으로 일제에 치열하게 저항했던 민족지사의 표상이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됐다.

해방 후인 1946년 동생 이원조에 의해 유고집 《육사시집》 초간본이 서울출판사에서 발간되어 그의 작품 20여 편이 세상에 알려졌다. 서문은 신석초, 김광균, 오장환, 이용악이 썼다. 같은 해 조카 이동영에 의해 재범조사에서 간행된 《육사시집》 재간본에는 초간본에 2편을 더한 22편의 시가 소개되었다. 서문은 청마 유치환이 썼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 사진 = 문해청 기자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은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내앞마을에 있다. 내앞마을은 1907년 협동학교(協東學校)가 설립되어 애국 계몽 운동의 산실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점되자 만주로 집단 망명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한 김대락(金大洛)·김동삼(金東三) 등을 배출하였다.

학계에서는 안동을 한국 독립운동의 성지로 자리매김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져 ‘한국 근대 최초의 의병인 갑오의병(1894. 7)이 일어난 안동’,‘전국 최다의 독립운동 유공자·자정 순국자를 배출한 안동’,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이상룡(李相龍), 만주 지역 항일 운동가 김동삼, 혁신 유림 류인식(柳寅植), 사회주의 운동가 김재봉(金在鳳)·권오설(權五卨), 의열 투쟁가 김지섭(金祉燮)·김시현(金始顯), 아나키스트 류림(柳林), 저항 시인 이육사(李陸史) 등‘한국 독립운동사의 핵심 인물을 배출한 안동’이라는 역사성을 부여하였고, 이는 안동에 독립운동기념관을 건립하여야 한다는 당위성을 제공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독립군 양성 기관. 1911년 만주 서간도 지역에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로 출발하여 1919년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했다. 학교 명칭은 이외에도 시기에 따라서 대동중학교(大東中學校)·신흥중학교·양성중학교(養成中學校) 등으로 불렸다.

마태식 기자, 김우철 공동대표 / 사진 = 문해청 기자

1909년 신민회(新民會)는 만주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로 하고, 1910년 7월경 신민회 회원인 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의 6형제와 이동녕(李東寧) 등이 남만주의 류허 현[柳河縣] 싼위안푸[三源堡] 쩌우자 가[鄒家街] 지역을 사들여 망명 근거지로 삼았다.

이들은 이곳에서 신민회의 '신'자와 다시 일어난다는 의미의 '흥'자를 붙여 신흥강습소를 조직했고, 동시에 민단(民團) 성격의 자치조직인 경학사를 조직했다. 그러나 1911년 가을의 큰 흉작으로 경학사가 해체되고 1912년 가을에 새로운 한인자치조직으로 부민단이 조직되자, 신흥강습소는 퉁화 현[通化縣] 하니 강[哈泥河]으로 이전했고, 1913년 5월에는 학교명칭을 신흥중학으로 개칭했다. 특히 3·1운동 이후에는 많은 청년들이 만주로 들어오고 일본육사 출신의 지청천(池靑天)·김경천(金擎天) 등이 망명해 신흥학교에 참가하면서 번창했다.

1919년 5월에는 학교 이름을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했고 부민단이 개편되어 조직된 한족회 산하의 학교로 발전했다. 신흥강습소에서는 일반 중학과정인 본과 외에 무관양성을 위한 속성과를 두었으며, 신흥중학교에서는 4년제 본과와 6개월 또는 3개월 과정을 두어 청년들을 교육했다.

신흥무관학교로 발전되면서 류허 현 고산자에 2년제 고등군사반을 두어 고급간부를 양성하고자 했다. 또한 퉁화 현 하니 강, 치다오거우[七道溝] 콰이다마오쯔[快大帽子] 등에는 분교를 두어 초등군사반을 편성하여 3개월간의 일반훈련과 6개월간의 후보훈련을 시켰다. 1920년 폐교시까지 졸업생 2,000여 명을 배출하여 독립군 양성에 크게 기여했다.

이상룡 선생 생가 /사진=문해청 기자

[임청각 독립운동가 이상룡 선생]

독립운동가 이상룡 선생(1858.11.24~1932.5.12) 이상룡 선생은 독립운동사에 손꼽히는 대표 명문가 집안 출신 독립운동가 중 한 분이다. 정통 유학자로서 어려서부터 엘리트 수업을 받은 선생은 일제가 우리의 국모인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선포했을때 외삼촌인 권세연 선생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참전하며 독립운동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그때가 1905년이다.

우리나라는 을사5적으로인해 을사늑약을 체결하게 되었고 외교권을 박탈당하는 망국의 길을 걷게 된다. 이때 선생은 자신의 집안 전제산 1만5천금을 투자하여 박경종 선생과 함께 가야산에 군사기지를 설립하였고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하지만 무기의 열세 및 군 기지 지속성등에서 한계를 자각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 선생의 주변엔 유인식, 김동삼 등의 훌륭한 애국지사들이 있었고 선생은 이들과 함께 젊은이들에게 민족정신을 일깨우는것이 중요하다 판단하여 협동학교를 세웠다.

협동학교는 매우 근대적인 교육을 가르쳤는데 오늘날 우리가 대학교에서 배우는 칸트, 홉스, 루소 등의 철학을 비판적 추론을 통해 우리젊은이들에게 가르치는 새로운 동양서양 철학의 합의점을 돌출해냈다.

선생은 전통 유학파로서 이러한 근대적 서양 철학을 받아들이고 가르쳤다는 것은 당시에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학자는 나라를 구하려는 마음이 있기에 가능한 변화라고 해석했다.

그 후 선생은 당시 국내 최대의 비밀결사 조직 신민회에서도 활동하며 해외 독립군 군사기지 개척을 위해 결심을 하고 만주로 이동했다. 이 떄 선생의 나이는 50세가 넘었으며 만주로 도착한 선생은 이회영 선생과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고 처음으로 한인들을 규합해 벼농사를 시작해 군량미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곳은 우리의 옛 땅, 부여, 고구려, 발해 의 옛 터전이었고 1000년이 지나 다시 그곳에서 조국을 되찾으려는 꿈을 키웠다는 것이다. 1920년대가 되면서 해외에 주둔하고있는 독립군 기지 및 독립운동단체의 종류가 매우 많아졌다. 처음에는 애국의 의지로만 보였지만 나중에는 너무 의견들이 나뉘어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는 상황까지 처했다.

이상룡선생 생가앞에서 / 사진 = 문해청 기자

당시 임시정부가 개조파, 창조파 등으로 나뉘자 선생은 각 대표들을 소집하여 독립운동계의 분열을 막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또한 중국 동삼성 지역에서 활약하던 김좌진, 김동삼, 오동진 선생등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그들의 군사 통합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선생의 마지막은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로 나뉘는 3개의 정부를 하나로 통합하는 삼부통합운동이었고 간신히 2개로 합치는데 성공한 선생은 그 직후 서거하셨는데 마지막 유언은 다음과 같다.

"외세 때문에 주저하지 말고 더욱 힘써 목적을 관철하라" 50년에 걸친 나라를 되찾기 위한 선생의 노력. 나이 50에 떠난 해외 망명. 의병, 교육, 학교설립, 독립군 간부양성, 당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애국을 실천한 잊혀진 영웅이다.

일제식민지 시기 조선총독부에서 자주독립운동의 정기를 끊기 위하여 임청각(이상룡 선생) 앞에 강원도로 가는 중앙선 철도 길을 깔았다. 이로 인해 안동지역주민이 엄청난 정신적 피해와 일상생활의 불편함을 겪었다. 지난 19대 대선 때 문재인 후보자는 안동지역유림을 찾아 철도 길을 옮겨서 바로 놓기로 공약했다.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

권정생 생가앞에서 / 사진 = 문해청 기자

일제강점기인 1937년 일본 도쿄의 빈민가에서 가난한 노무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광복 직후인 1946년 외가가 있는 경상북도 청송으로 귀국했으나 빈곤과 6·25전쟁 등으로 곧 가족들과 헤어졌다. 그는 대구, 김천, 상주 등 객지를 떠돌며 나무장수, 담배장수, 가게 점원 등 온갖 일을 하다 폐결핵, 늑막염 등 병을 얻어 1957년 경북 안동 일직면 고향으로 왔다.

병이 깊어져 신장결핵, 방광결핵 등으로 전신에 결핵이 번져 생사를 넘나드는 가운데 더욱 그리스도교에 의지하게 되었다. 집안 형편으로 1965년 집을 나갔다가 1966년 다시 들어와 마을의 교회 문간방에서 살며 종지기가 되었다.

떠돌이 생활에도 많은 책을 읽고 글을 써왔으며, 건강이 호전되고 교회 문간방에 정착한 이후부터 작품을 발표했다. 베스트셀러 작가된 된 이후에도 1980년대 초 교회 뒤 언덕에 지은 작은 흙집에서 살면서 검소한 생활을 하며 작품 활동을 했다.

권정생은 1969년 단편동화 〈강아지똥〉을 발표하여 월간〈기독교교육〉에서 주는 제1회 아동문학상을 받으며 동화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강아지똥〉은 세상에서 가장 낮은 생명이 자기 희생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책으로도 만들어져 아동뿐 아니라 유아와 부모들에게도 손꼽히는 그림책 가운데 하나로 자리했다.

1973년〈조선일보〉신춘문예 동화부문에〈무명저고리와 엄마〉가 당선되었고, 1975년 제1회 한국아동문학상을 받았다.〈무명저고리와 엄마〉는 일본 침략과 6·25전쟁 가운데 일곱 남매를 낳아 기르면서 자식을 잃는 어머니의 슬픔을 그린 단편이다.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민족이 걸어온 길을 생각하고, 한국 어머니 모성의 전형을 보여주는 동화이다.

신흥무관학교 / 사진 = 문해청 기자

장편으로는 대표적으로 1984년 출간한〈몽실 언니〉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6·25전쟁을 배경으로 어른보다 더 큰 고난을 온몸으로 이겨내며 살아가는 몽실이의 이야기이자 모진 고난을 헤쳐온 민족의 이야기이며, 남·북한군 양쪽을 민족이라는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낸 평화의 메시지이다.

그의 작품 주인공을 보면 깜둥바가지, 벙어리, 바보, 거지, 장애인, 외로운 노인, 시궁창에 떨어져 썩어가는 똘배, 강아지똥 등 하나같이 힘없고 약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적 믿음을 바탕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것들에 대한 사랑을 아름답게 표현한 것으로 평가된다.

저서로는 동화집으로〈강아지똥〉·〈사과나무밭 달님〉·〈하느님의 눈물〉·〈몽실언니〉·〈점득이네〉·〈밥데기 죽데기〉·〈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한티재하늘〉·〈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무명저고리와 엄마〉·〈또야 너구리가 기운 바지를 입었어요〉·〈깜둥바가지 아줌마〉 등이 있고, 시집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수필집 〈오물덩이처럼 뒹굴면서〉·〈우리들의 하느님〉 등이 있다.

[광 야]

- 이육사 -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즈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의성김씨종택 / 사진 = 문해청 기자

이날 이육사대구기념사업회 공동대표 김우철(전. 국토교통전문위원)은 “\인문학기행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이동하는 장소마다 역사적 내용을 기록하고 동영상촬영을 통해 현장을 남겼다. 또한 비 내리는 굳은 날씨에 독립운동가 민족시인 이육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참가한 고문 어르신께 금속공예품 청포도 뱃지를 가슴에 달아 주며 건강을 기원했다.

상임대표 정대호 시인은 “한반도 분단을 풀어나가기 위해 평화의 관점으로 자주독립운동의 선의와 양심을 확신시키는 기풍이 필요하다. 또한 과거 독립운동가의 역사와 민족문학의 삶을 소통 공감을 통해 현실에서 시민의 건강한 생활을 교감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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