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돌의 존재가치는 곡식을 고운 가루로 가는 데 있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쓸모가 없는 것처럼 맷돌이 그 기능을 잃으면 무용지물이 된다. 그런데 그 맷돌의 역할은 맷돌만으로는 안 된다. 반드시 어처구니가 있어야 수행이 가능하다. 해서 이치가 완성되는 데 꼭 있어야 될 것이 없어 사리에 어긋나는 것을 ‘어처구니가 없다’고 한다. 맷돌에 어처구니가 없으면 그 맷돌은 맷돌이라 할 수 없으므로 어처구니없는 맷돌을 맷돌이라 하거나 맷돌을 돌리겠다고 하면 ‘어처구니가 없는 경우’가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맷돌과 어처구니 같은 관계가 비일비재하다. 부모와 자식, 부부, 노동자와 회사, 교회와 신자, 국가와 국민 등 저들은 불가분의 관계다.
해서 부모와 자식은 천륜이고, 부부는 반려이고, 노사는 기업을 지탱하는 두 기둥이고, 교회와 신자는 머리와 지체이고, 국가와 국민은 한 몸과 같다고 했다.  그 어느 한 쪽이 없거나 역할을 다하지 않으면 존재하거나 온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저들 중 어느 한 쪽이 그러한 관계를 끊거나 제구실을 다 하지 못함으로써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다. 결손가정, 부부의 파경, 노사 대립, 교회와 신자의 갈등과 신자의 냉담, 국민의 지지가 밑바닥인 정부가 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관계다. 그러므로 맷돌은 맷돌대로 어처구니는 어처구니대로 맷돌답고 어처구니다워야 하며 각기 역할과 소임을 최선으로 수행해야 한다. 그렇게 하 기 위해 이런 제구실과 노력이 필요하다.

박종형 칼럼니스트

우선 ‘나’인 맷돌은 한 짝 ‘나’로서 우수하고 튼실해야 한다. 이것이 기본적이고 중요한 전제다. 그러기 위해서는 희망적 사고, 건전한 가치관, 강한 책임감과 협동정신, 신념과 열정 같은 높은 정신적인 자산과 지식, 기술, 실천력, 노력 같은 행동적인 것들로 무장해야 한다.  또한 자기 개선과 변화 같은 마음먹기도 필요하다.
맷돌은 반드시 ‘너’와 ‘나’ 두 짝이어야 하고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 아무리 우수한 한 짝이라 할지라도 두 짝이 맞물려 돌아가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맷돌은 위아래로 중심에서 맞물려 비로소 ‘울력의 한 틀’이 된다. 중심에서 맞물림은 한 몸으로 믿고 의지하며 서로에게 충성(忠=中+心)하는 것을 의미한다. 틀의 중심에 있으면서 맷돌을 맞물리게 하는 그 ‘유대의 축’은 이상이기도 하고 목표이기도 하며, 공존 공영하는 운명이기도 하고 사랑이기도 하다.
한 짝 맷돌이 짝지어 한 틀을 이뤄 맞물려 돌아가는 것은 협동인데, 여기서 우리는, 내가 우수한 맷돌임이 틀림없다 할지라도 과연 중심에서 ‘너’에게 잘 맞물렸으며 그렇게 한 몸처럼 잘 돌아가고 있는가를 자문해봐야 한다.  그래야 진정 우수한 맷돌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잘못 물림 때문에 맷돌이 제대로 맞물려 돌아가지 않는다면 나는 결코 유능한 맷돌이 아닌 것이다. 

때문에, 맷돌은 신자유주의가 퍼뜨리는 인재론을 맹신해서는 안 된다. 국가고 사회고 기업이고 우수한 인재, 이른바 20 퍼센트의 톱클래스 리더들이 실제로 국가 경영을 주도하고 사회를 이끌며 기업의 성공을 달성한다는 주장은 ‘완미頑迷한 신앙이고 옹졸한 편견’이다.  80 퍼센트의 맷돌들이 해내는 울력이 없이는 그 어느 성취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맷돌이 한 틀로 돌아가는 기능인 협동은 두 가지 기능으로 이뤄지며 어느 한 가지라도 없거나 부족하면 맷돌질의 가치인 생산이 불가능하다. 그건 ‘부수는 파쇄破碎 기능’과 ‘가는 연마硏磨 기능’이다. 

파쇄기능이 제대로 발휘되려면 우선 맷돌이 맞물리는 표면에 공이 역할을 하는 돌기突起와 고랑 홈이 적당히 파여 절구질이 되어야 한다. 물론 힘이 있어야 한다.  그 힘은 지식과 기술에서, 제도에서, 도덕성에서, 목표의식에서, 강한 책임정신에서 생기고 공급된다. 아래 위 맷돌이 서로 호응하여 부수는 절구질은 협동의 기본이다.  연마기능은 힘보다는 세밀한 기술이 요하는 것이다. 연마는 갈고 다듬어 미완성을 완성시키는 기능으로 이를테면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다. 

조직과 사람에는 파쇄에 능하고 주력하는 쪽과 연마에 능하고 주력하는 쪽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기업의 경우, 넓은 의미로 보면 경영의 2대 축의 하나인 ‘성장’은 전자에, ‘경영성과의 관리’는 후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 두 축은 상호의존적이고 보완적으로 상관돼 돌아가야 하므로 그 균형이 깨지거나 제각각 돌아가게 되면 그 기업은 파탄 나게 된다. 또한 좁은 의미로 보면 그 두 기능은 파트너와 파트너를 묶는 관계며 업무의 한 반쪽과 다른 반쪽을 맞춰 완성이라는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구성원이 어느 기능 쪽에 능하고 전문이고 우수해도 다른 쪽 기능과 파트너십을 통해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잘 다듬어진 재목이라 할지라도 제자리에 다른 재목과 맛 물리고 엮여 놓여야 집의 골격이 되는 이치와 같다. 내가 우수한 재목인가도 중요하지만 ‘유능한 협동 자’인가는 더 중요하다.  다시 말해 개별 재목의 우수성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뛰어난 협동 자가 더 요긴한 것이다.

아무리 좋은 맷돌이 잘 맞물린다 해도 그것을 돌리는 ‘어처구니’가 없고서는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말은 사람에게 있어서나 일에 있어 치욕적이고 부정적이며 불행한 선고다. 사람이고 일이고간에 결코 어처구니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처구니는 공존 공영하는 공동체정신이랄 수도 있고, 협동정신이랄 수도 있으며, 리더십이랄 수도 있고, 목표의식이랄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힘의 원천이기도 하고 동기부여자이기도 하며 리더이기도 하다. 

‘어처구니’는 반드시 있어야 하되, 맷돌을 계속 돌릴 만큼 강해야 하고 맷돌에 파인 홈에 꼭 맞아야 한다. 어설프고 허술하니 적당히 끼워져 헐겁거나 흔들거리면 제자리 지킴이 어렵고 맷돌이 잘 맞물려 한 틀처럼 돌아가게 하기 어렵다. 맷돌에 알맞은 어처구니를 찾아 맷돌을 돌린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선택이다. 정신을 쏙 빼가는 무슨 거창한 이론이나 성공사례 같은 것에 혹해 어떤 맷돌에 적합한가 여부도 신중하게 저울질해 보지도 않은 채 대장간에다 어처구니를 주문해 다 맷돌을 돌리는 것은 지혜로운 벤치마킹이 아니라 위험하고 어리석은 모방이다. 어처구니란 표준 규격품이 아니다. 맷돌에 따라 그 크기나 재질이나 모양이 다른 게 정상이며 또 달라야 한다. 어처구니가 ‘개발의 편자’ 꼴이 되면 맷돌은 불행하다.  예컨대, 지식경영을 하지 못하는 기업이 연봉제를 도입하는 것 같은 일이다.

사람이 분수를 안다는 건 자신이 맷돌다운 맷돌인지 어처구니다운 어처구니인지를 성찰하고 바로 알아 맷돌은 맷돌답게 어처구니는 어처구니답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맷돌이 맷돌답지 못하면서 어처구니를 탓하고 불만하여 배척하면 맷돌은 신나게 돌아갈 수가 없으며, 어처구니가 어처구니답지 못하면서 맷돌더러 저질이다 맘에 안 든다고 타박하면 비록 어처구니가 힘 있게 맷돌을 돌린다 해도 맷돌은 마지못해 돌아가느라 제대로 파쇄와 연마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맷돌이 어처구니를 불만하여 ‘오늘 못하면 내일 하면 될 것이고’ ‘나 한 사람 적당히 한다고 맷돌질이 잘못될 것이랴’ 제 소임과 책임을 소홀히 하면 생산성은 떨어지고, 어처구니가 맷돌이 못마땅해서 혹사하며 ‘맷돌은 돈만 주면 언제든지 새 것을 구할 수 있으니’ 절이 싫으면 중이 절을 떠나듯이 헤어지면 된다고 맷돌을 그저 언제고 갈아 치울 수 있는 부품쯤으로 여기면 위대한 협동의 시너지는 창출될 수 없고 어처구니와 맷돌 사이에 공존공영이라는 아름다운 평화는 유지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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