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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박진관 기자와 함께하는 대구역사탐방 자주독립운동 유적지 역사해설

기사승인 2019.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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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성고등 본관-서문시장-선교사주택-동산-청라언덕-대구3.1운동발원지-중부경찰서-경상감영공원-종로-제일교회(구)-교남YMCA-바보주막-최제우순도비-남산교회-관덕정

대구 역사탐방단 / 사진 = 문해청 기자

[뉴스프리존,대구=문해청 기자] 더불어민주당대구광역시당 역사문화특별위원회 주최 및 대구역사탐방단 주관으로 20일 영남일보 뉴미디어부장 박진관 기자(대구 지오그라피 / 저자)의 역사해설로 시민과 함께 대구역사탐방을 일제식민지시기 대구지역 자주독립운동 유적지를 찾아 다니며 10Km를 도보로 탐방했다.

다음은 “대구 지오그라피” 저자 박진관 기자가 대구역사탐방을 안내하며 자주독립운동을 회상하는 역사해설 전문이다.

◆대구삼일운동

1919년 3월8일 대구봉기는 기미독립선언문에 서명했던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대구출신 이갑성이 2월24일 남성정교회(현 제일교회) 이만집 목사, 남산교회 김태련 조사(선교사를 돕는 직책), 백남채 · 김영서 계성학교 교사, 이재인 신명여학교 교사 등 대구지역 3처 교회(현 제일·남산·서문교회) 지도자와 만나 서울에서의 3·1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대구에서도 궐기할 것을 권고하면서 촉발됐다.

이만집, 김태련 등 기독교계 지도자와 홍주일 천도교 경북교구장 등은 큰장(옛 서문시장) 장날인 8일 오후 1시에 봉기를 하기로 모의하고, 학생을 비롯해 민중동원에 나섰다. 이후 김태련의 집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계성학교 아담스관 지하실 등지서 태극기를 제작했다.

당시 일경이 거사에 앞선 4일과 7일, 각각 홍주일 교구장외 2명과 백남채 등 주모자 수명을 체포해 구속시키면서 특별경계령을 내리는 등 감시를 강화했다.대구만세운동이 대구인구수에 비해 참여자가 비교적 적었던 이유는 일제가 경상도의 중심지였던 대구에서의 만세운동을 사전에 강력하게 저지했고, 유림이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았던 때문이기도 하다.

계성학교, 신명학교, 대구고보 학생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만세운동은 활기를 띠었다. 당시 계성학교에선 박태현·김삼도·심문태 등 35명이 동참했고 신명학교에선 교사였던 이재인과 임봉선, 이선애 등 50명이 참여했다.

계성학교 교사 최상원은 대남여관 주인의 아들 대구고보(현 경북고)4년생 허범과 접촉해 신현욱·백기만·하윤실 등 대구고보 간부학생에게 거사계획을 알려줌에 따라 대구고보생 200여명이 만세운동에 동참하게 됐다. 또 동산성경학당(현 영남신학대)강습생 20명도 참여했다.

3월 8일 서문 밖 그날의 함거사 하루 전,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지만 8일 오전 토요일에는 활짝 개었다. 정오가 되면서 큰장에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삼엄한 일경의 감시 속에 대구의 민족지도자를 비롯한 계성학교 학생은 한복을 입고 장꾼인 것처럼 변장하고, 거사장소로 향했다.

신명학교 학생도 오전 수업을 마치고 빨래를 하러 가는 척하며 삼삼오오 목적지로 향했다. 하지만 오후 1시에 도착하기로 했던 대구고보 학생이 오지 않아 1시간 이상 행사가 지체됐다. 2시를 넘어서자 대구고보 학생 200명이 교복을 입은 채 일경의 저지를 뚫고 뛰어왔고, 동산성경학원 학생도 나타났다.

수천여명이 운집한 시장 안은 긴장감 속에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김태련 조사가 준비해 둔 달구지 위에 올라섰다. 그는 독립선언문을 읽으려다 일경의 제지로 공약3장만 낭독했다. 이어 이만집 목사가 달구지에 올라 힘차게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여 외쳤다.

이에 1천여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품에서 꺼내 일제히 따라 외치며 지도부를 따라 행진했다. 일경이 완강히 제지했지만 이미 터진 봇물이었다. 선교사의 일을 돌보던 농민 안경수가 태극기를 꽂은 깃대로 기마경찰이 탄 말의 엉덩이를 찌르자 말이 달아났다. 그 사이 선두행렬이 앞을 헤치고 전진했다.

1㎞가 넘는 만세운동행렬은 큰장 강씨네 소금가게 앞(옛 동산파출소)에서부터 동산교를 지나 본정(현 경상감영길)~대구경찰서(현 중부경찰서)로 향했다. 일경은 총칼로 저지하기를 멈추고 행렬을 지켜보며 예의주시했다. 만세소리는 대구전역을 뒤덮었다.

이윽고 대구경찰서 부근에서 일촉즉발의 대치가 있었다. 경찰서 옥상에는 기관총이 시위대를 겨누었다. 하지만 발포하지 않았다. 섣불리 발포했다가는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발전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만세행렬은 대구경찰서에서 오른쪽으로 길을 꺾어 경정(현 종로)으로 진로를 바꿨다.

지게꾼·농민·양복사·잡화상·구둣방·약방주인·머슴·기생까지 합세해 시위대가 크게 불어났다. 이만집 목사와 그의 아들 이성해(계성학교), 김태련 조사와 아들 김용해 등 부자가 동참한 경우도 있었다.

당황한 일제는 더 이상 만세운동이 확대되면 걷잡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헌병대와 대구주둔 80연대 병력을 동원해 달성군청(현 대구백화점 부근)에 바리케이드를 쳤다. 만세행렬은 종로를 거쳐 지금의 약전골목~중앙치안센터~대구백화점 쪽으로 향했다.

맑았던 날씨가 흐려지고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몰려왔다.일제는 달성군청 앞에서 총칼과 곤봉으로 평화적인 시위대를 구타하며 무차별 진압을 했다. 군중은 흩어지면서 산발적으로 독립만세를 외쳤다.

전날 비가 내려 길이 질척해진 까닭에 피와 흙이 범벅이 됐으며 수많은 사람이 다쳤다. 김태련의 아들 김용해는 아버지가 맞는 것을 보고 저항하다 심하게 구타를 당해 실신했다.

3월 10일 남문 밖 함성만세운동은 10일에도 계속됐다. 일경에 검거되지 않았던 계성학교 교사 김영서와 학생 김삼도·박태현·박성용·박재헌, 전당포업자 김재병, 농민 이덕주 등은 대구 남문 밖 덕산정시장(현 남산교회 부근)에서 오후 4시에 봉기했다.

3처 교회 신도를 비롯한 200여명의 기독교인과 학생이 만세를 부르며 대한독립을 외치다 무자비하게 해산된 뒤 65명이 붙들려갔다.

재판결과8일과 10일 만세운동가담자 총225명이 검거되고, 계성학교 학생 35명과 대구고보 학생 7명을 비롯해 76명이 실형을 언도받았다. 만세운동의 주모자인 이만집과 김태련은 각각 징역3년과 징역 2년6월형에 처해졌고, 김영서·백남채·최상원·김무생 등은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또 권희윤·박제원·최경학 등이 1년6월, 이재인·임봉선·신현욱·허범·박태현 등이 1년, 심문태·박성용·허성도·김삼도 등이 10월, 백기만 등이 징역 6월을 각각 선고받았다.

만세운동 이후3·8대구만세운동의 여파는 대단했다. 경북전역에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3월 10일 계성·신명여학교, 대구고보가 휴교령에 처해졌지만 다행히 몸을 숨겨 피한 계성학교 김수길·이영식·허성도·이덕생 등 재학생과 졸업생은 비밀결사조직인 혜성단(惠星團)을 조직해 격문을 배포하는 한편 시장철시(撤市)운동, 친일주구배의 반민족행각 규탄, 독립운동군자금 마련국내외만세운동 연계에 나섰다.

대구고보는 만세운동을 전후해 많은 학생이 퇴학을 당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동맹휴학운동으로 저항했다. 대구고보는 1922년~1936년 입학생 중 50%만이 졸업을 하는 비정상적인 상태가 지속됐다.

한편 독립만세운동에서 소외감을 느꼈던 경북지역 유림 김창숙·장석영·송준필·송규선 등은 경남지역 유림을 규합해 1919년 개회 중인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일명 ‘파리장서사건’을 주동했다. 파리장서 서명자는 총 139명으로 이 중 60여명이 경북출신이다. 대구에선 월배 지역 단양우씨 문중 등이 동참해 옥고를 치렀다.

동화사 지방학림(學林)만세운동불교계에선 만해 한용운, 백용성 스님 등 2명이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됐다. 불교계 지도자였던 두 스님의 3·1만세운동 참여는 불교계 종립학교였던 중앙학림(현 동국대) 학생들에게 이어진다.

만해는 중앙학림의 강사였다. 중앙학림 학생들은 조직적으로 독립선언서를 각지에 배포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학생들은 각자 연고가 있는 지역의 사찰로 내려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할 것을 결의했다.

3·1운동은 중앙학림 학생들에 의해 해인사, 범어사 등 전국사찰로 확산됐다.이들 가운데 중앙학림 학생으로 달성군 공산면 진인동 출신인 윤학조가 3월23일 대구로 내려와 달성군 공산면 도학동 동화사 지방학림(현 동화사 승가대학) 학생이었던 후배 권청학·김문옥 등을 만나 불교계의 만세운동참여 소식을 알리고, 만세운동을 할 것을 권고했다.

이들은 처음 공산면 백안동 백안장터에서 궐기할 것을 계획했으나, 장터가 좁고, 사람도 적으니 대구에서 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3월28일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 권청학·김문옥·이기윤·허선일·김종만·김윤섭·이보식·박창호·이성근 등이 동화사 심검당(尋劒堂)에 모여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결의하고, 이틀 후 대구 덕산정시장(남문 밖 시장) 장날에 모이기로 약속했다.

이들은 거사 하루 전 동화사 포교당이었던 보현사 김상희의 집에 숨어서 태극기를 만들었다. 30일 오후 2시쯤 덕산정시장 안에서는 큰 장대에 달린 태극기가 나부끼고, 대한독립만세소리가 울려 퍼졌다. 학생들을 선두로 장꾼과 민중 수천명이 시장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일본 군경이 총칼로 이들을 즉각 해산시키고 주동자 10명을 잡아갔다.

이날 시위로 윤학조, 권청학, 김문옥 등 10명이 검거돼 모두 10개월의 형을 언도받았다. 한편 3·30대구만세운동과 관련해 고봉선사(1890~1961)가 주도한 혐의로 마산교도소에서 1년6개월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고봉선사는 대구출신으로 혜봉선사의 제자이며 숭산스님의 스승이기도 하다. 하지만 고봉선사가 구체적으로 어떤 형식과 내용으로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과 연루됐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한편 1919년 만세운동 당시 동화사 주지는 김남파(金南坡)로, 1917년 조선총독부에 비슬산 대견사를 없애자고청원하는 등 친일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동화사 만세운동 평가동화사는 3·30만세운동으로 10명의 애국지사가 구속된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음에도 구체적인 연구가 미흡한 편이다. 실례로 만세운동과 관련해 국가기록원에 나와 있는 10명의 일본어판결문도 제대로 번역되지 않고 있다.

또한 동화사 성보박물관에도 만세운동관련 기록과 유품이 전무하다. 동화사 심검당은 당시 현 법화당 자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대웅전 오른쪽에 있다. 하지만 심검당 입구에는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간판만 있을 뿐 만세운동 관련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정만진 위클리포유 대구지오(GEO) 자문위원은 “부산 범어사는 범어사 학림의거를 선양하고 있는데 비해 임진왜란 당시 영남승군(嶺南僧軍)의 사령부였던 동화사가 학림소속 학생들의 만세운동을 알리는데 소홀한 측면이 있다”면서 “동화사가 의병과 경북지역 불교계 독립운동의 본산이었음을 주지시킬 필요가 있다”고 했다.

성문 동화사 주지스님은 “광복 후 비구·대처간 분규로 중요한 역사적 사료가 소실돼 안타깝다”면서 “차제에 지방학림 학생들의 학적부를 찾는 등 독립운동사료를 수집해 동화사가 만세운동에 기여했음을 밝히고 고양하겠다”고 밝혔다.

박진관 기자와 함께 / 사진 = 문해청 기자

◆대구교남YMCA

대구YMCA 80년사'에 따르면 1919년 2월 15일 대구는 3.1만세운동 정보를 최초로 접했다. 중국 상하이 신한청년단에서 특파된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가 교남기독청년회 창립지도자 백남채를 만나 대구에서도 3월 1일 봉기할 것을 전달하면서다. 계성학교 교사였던 백남채는 이와 별도로 동생 백남규와 서병우 등으로부터 국제정세를 들었다.

이들이 3.1운동을 직접 제안받은 것은 2월 24일이다. 세브란스병원 사무원이며 기독교측 대구경북지역 독립선언서 배포책임자 이갑성이 대구에서 이만집, 김태련, 백남채 등을 만나 대구궐기를 권유했다. 독립성취에 회의를 가졌고 일본의 무력행사에 따른 민중 희생을 걱정했던 이만집은 처음엔 회의적이었다.

이갑성은 국내외 여론, 동향 등을 설명하며 이만집을 설득했고 2월 26일 세브란스 의전 학생 김대진을 보내 재차 권유했다. 그후 3월 1일 경성과 평양, 원산, 선천 등에서 만세운동이 개시됐고 3월 4일 세브란스 의전 학생 이용상과 최재화를 통해 독립선언서가 도착하면서 거사 준비가 본격화됐다.

3월 3일 최재화가 대구시위 주도를 거듭 간청하자 거사를 결심한 이만집은 동지부터 규합했다. 교남기청 총무 김태련, 계성학교 교감 김영서를 불러 만세운동 참여를 설명했다. 계성·신명학교 교사, 기독청년회장 경력과 활동으로 맺은 인맥을 활용해 많은 동지를 모았다.이만집은 서문 밖 장날인 3월 8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남성정, 남산정, 신정교회 교인, 계성과 신명학교 학생 등이 참석키로 했다.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과 동산성경학원 수강생도 합류하기로 했다.김태련은 3월 7일 밤 자택에서 이만집으로부터 받은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와 현수막도 준비했다.

낌새를 차린 일제 경찰의 경계는 삼엄했다. 3월 4일과 7일에는 천도교 대구교구장 홍주일과 백남채 등이 체포됐다. 하지만 3월 8일 시위는 차질 없이 진행됐다.기독교계 지도자와 학생들은 장꾼 행세로 모여들었다.

계성학교 학생들은 한복을 입고 잠입했고 이선애가 이끈 신명여학교도 참여했다.이만집과 김태련은 달구지에 올라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칠 계획이었다. 김태련이 숨겨온 선언문이 경찰에 압수당하자 다급해진 이만집이 '만세'를 불렀다. 기독교인, 학생, 일반인 등을 합쳐 만세운동 참여인원이 1000여명에 달했다.

만세 대열은 서문 밖 시장에서 동산교, 구 대구경찰서(현 중부경찰서), 종로, 남성정 파출소(현 약전골목), 달성군청(현 대구백화점 부근)까지 행진했다. 일제는 군경을 동원해 시위대 해산에 나섰고 이날만 157명을 체포했다. 대구만세운동은 9일과 10일에도 계속됐다. 12일부터는 경북 의성을 시작으로 경북 전역으로 확산됐다.

서문시장 장터서 '대한독립만세' = 옛 교남YMCA회관은 대구 약령시에 있다. 약령시는 1658년(조선 효종) 전국 한약재 수집을 위해 개설한 한약재 유통전문시장으로 715m 거리에 한약방들이 밀집된 곳이다. 당초 대구성 북문 근처에 1년에 두 번 개설되다 1908년 일본 상인들 요청을 받은 경북관찰사 박중양이 대구성벽을 철거하면서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 자금조달과 연락 거점이 되어 탄압을 받다가 결국 1941년 폐쇄됐다가 광복 후 다시 열렸다. 약령시 자체가 독립운동과 깊은 관계가 있는 셈이다.약령시 중간에 위치한 옛 교남YMCA(대구시 중구 남성로 24)는 경상도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

서울의 3.1만세운동 직후 지방인 대구에서 3.8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준비했던 독립운동의 성지라고 평가 받고 있다.교남YMCA는 3.1독립만세운동 당시 주요 지도자들의 회합 공간이었으며 물산장려운동, 농촌운동, 신간회 운동 등 기독교 민족운동의 거점공간으로 사용돼 대구 근대사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크다.

옛 교남YMCA의 주요 임원과 회원 17명이 건국훈장 애국장 등 3·1운동과 임시정부 관련 독립유공자훈장을 받은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약전골목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 건축물인 옛 교남YMCA 건물은 미국 북장로교 대구선교지회(선교사 블레어)가 1914년 청년전도를 위해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1층과 2층 사이는 돌림띠로 장식하고 창 상부는 아치, 하부는 받침대 장식에 사각창문을 설치하는 등 동서양 양식이 결합된 1910~20년대 근대건축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그러나 1938년에 '조선약업 주식회사'에 매각된 뒤 주인과 용도가 여러 번 바뀌었다.

1955년 '한국흥업은행'에 경매 됐고 1968년에 외과의원으로, 1973년엔 정형외과 입원실로 사용되기도 했다.2008년에는 '현대백화점 대구점'이 들어서면서 철거 위기에 몰렸다. 인수한 건물주가 도시형 생활주택을 짓기 위해 2015년 건축허가를 신청했다.

당시 이 부지에는 옛 교남YMCA 회관(119㎡)외에 한옥(178.5㎡, 1961년 준공) 1채와 2층 철근 콘크리트구조인 이해영 정형외과의원(364.5㎡·1966년 준공) 등 각각 다른 3가지 건축구조와 양식의 건물이 있었다. 철거 위기를 넘긴 것은 민관이 함께 나서면서다.

대구 중구는 건물의 역사성과 건축 가치를 높이 평가했고 재단법인 대구YMCA 유지재단과 합심해 해당 건물을 모두 매입(2011년 12월 16일), 새로운 공간으로 보존키로 했다. 대구YMCA는 자체 예산 2억원과 시민모금 3억원 등 5억원을 모아 2013년초 옛 교남YMCA회관을 인수했다.

중구는 27억7000만원으로 한옥과 이해영 정형외과의원 건물을 매입했다.현재는 대구YMCA가 옛 교남YMCA건물을 대구3.1운동 기념관과 YMCA 100주년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철거 위기 독립운동 거점, 민·관이 보전 = 건물 외부에는 대구 3.1만세운동기념관 현판과 대구 옛 교남YMCA회관 안내표지판, 신간회 대구지회 비서, 경북서원 간판 등이 걸려 있다.

1층에는 3.1운동의거 대구조직연락도와 대구시위도, 경북도와 경남도의 3.1운동 궐기도, 김용해 비석내용, 독립선언문, 대구복심법원 판결문, 고등경찰요서 등이 전시돼 있다. 1914년 건축 당시 모습으로 복원된 2층에는 교남YMCA출신 독립운동 유공자인 17명과 3명의 선교사 흉상과 활동경력이 소개돼 있다.

옛 교남YMCA회관은 선교사들이 영어와 일어강습을 하는 강의실과 독서실, 성경공부방 등으로 운영됐다. 이곳에는 이만집, 김태련, 최종철, 박영조, 이희봉, 백남채, 최경학, 정광순, 김만성 등과 같은 기독교회의 젊은 청년들이 몰려들었다.이들 청년들은 1915년 교남기독청년회를 조직했고 이후 1919년 3.1운동에 이어 터진 3.8대구만세운동의 주역이 됐다.

당시 대구에서 3월 8일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대부분의 인물이 대구 기독교계 지도자이면서 교남기독교청년회 청년들을 교육한 사람들이다. 옛 교남YMCA의 창립발기인은 12명이었다. 외국인선교사 3명을 제외한 9명 가운데 이만집을 비롯 김태련, 김영서, 백남채, 정광순, 권희윤, 이재인 등 7명이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이들은 최소 6개월 이상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했다. 이들 중 이만집과 김태련은 만세운동 준비부터 시위까지 전면에 참여했다. 김영민 대구YMCA 사무총장은 "옛 교남YMCA 발기인들의 만세운동 주도는 민족의 운명과 함께하는 선교공동체, 지역사회 주민의 애환을 외면하지 않고 고통을 함께 나눈 기독교사회운동체로서 뿌리내린 소중한 역사적 유산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라고 말했다.

박진관 기자와 함께하는 대구 역사탐방단 / 사진 = 문해청 기자

◆3.1운동 결과 혜성단과 자제단

100년 전 3월8일 대구에서 시작된 3·1운동은 5월7일 청도군 매전면 구촌까지 108회, 2만1천여 명이 참가했다. 대구경북에선 17명이 목숨을 잃었고 70명이 부상했으며 700여 명이 체포됐다.

이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이규환(15세)을 포함한 학생 피검자는 222명이었다. 대구경북의 3·1운동은 학생이 앞장섰다고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특히 계성학교와 대구고보 학생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3·1운동 후 광복이 될 때까지 계성학교 출신 서훈자는 32명, 대구고보 출신 서훈자는 5명이다. 대구고보는 3·8만세시위 당시 전교생 239명 가운데 200명이 참가했다. 신암선열공원에 묻혀있는 백기만을 포함, 48명이 체포됐지만 기소유예로 풀려나 서훈받지 못했다.

대신 일제당국은 대구고보생 피검자 48명 중 20명에게 퇴학, 정학, 근신의 처분을 내렸다. 대구고보 학생은 동맹휴학으로 맞서 1919년 5월20일에야 정상수업이 가능했다. 이후 대구고보는 1920~30년대 중반까지 계속해 지하·반일조직을 만들어 10차례 가까이 동맹휴학으로 저항했다.

‘혜성단(慧星團)사건’은 일명 ‘최재화사건’으로 불린다. 일제는 ‘관공리사직협박 및 폐점위협사건’으로 지칭하고 있다. 혜성단은 3·8대구만세운동 후 대구부 상점 주인에겐 폐점하지 않으면 불을 지르겠다는 격문을 배포하고, 만세운동을 탄압한 대구경찰서장, 박중양, 백응훈 등 친일관리와 자제단 간부에겐 암살하겠다는 내용의 경고문을 발송했다.

격문에는 “서양인 신문기자가 대구에 와서 시내를 순시하므로 조선인은 독립 자유를 바라는 의사를 표시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철시, 폐점하라! 또 상인은 일본 상인과 금전, 물품거래를 하지 말라! 신문지에 전해지고 있는 총독부의 유고나 기타 경찰관의 말은 거짓이므로 믿지 말라! 폐점하지 않는 자에게는 강제 수단을 쓸 것”이라고 했다.

이로 인해 4월1~2일 경정(현 종로) 일대 상점들은 폐점을 하고 2일에는 큰장 점포 80여 곳이 문을 열지 않았다. 4월8일 대구경찰서장에게 보낸 격문에는 “너는 왜 3월8일 독립만세를 부른 무고한 동포를 검거하였는가! 너희들 같은 자는 암살당할 때가 있을 것이니 각오하라!”고 썼다.

혜성단은 계성학교 학생들과 독립지사 최재화가 깊숙하게 관련된 비밀결사체다. 1919년 3월16~18일 대구만세시위에 참가했던 계성학교 학생 김수길이 같은 학교 이영식, 허성도, 이기명, 이종헌 등과 항일투쟁 방안을 논의하다 선산 해평 출신 전 경신학교 교사 최재화 집사를 지도위원으로 모셨다.

최재화는 이갑성과 함께 서울에서 3·8대구만세운동의 배후 연락책으로 활동했으며 4월3일 해평에서의 만세운동과 만주 신흥무관학교 생도모집을 주도한 인물이다. 이후 그는 상주경찰서에 체포됐으나 일경 두 명을 때려눕히고 탈출해 이듬해 중국 상해로 망명, 의열단과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그는 중국에서 기독교에 투신했다. 화북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돼 중국에서 한인교회를 세웠다. 31년 대구제일교회에 부임해 현재의 대구 중구 남성로 제일교회를 건축, 목회활동을 이어갔다. 또 계명대의 전신인 계명기독대학을 설립하는 등 교육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구미시 해평면 산양리에 그의 추모비가 있으며 성서 계명대에 그의 호를 딴 ‘백은관’이 설립됐다. 현재 4남 최성구 전 안과원장(89)이 대구 달서구에서 살고 있다. 구정모 대백회장의 부인 최정숙 아이에스제이커뮤니케이션 대표가 손녀다.

이영식(현 대구대 설립자)은 3월12일 고향인 선산군 인동면 진평동에서 인동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이후 독립운동으로 두 차례에 걸쳐 투옥됐다. 그는 서문교회 목사, 간도 제일교회 목사 등을 하면서 독립사상을 고취하다 광복 후 교육과 복지사업에 투신했다. 혜성단 창단은 1919년 4월17일이다.

김수길과 최재화는 이날 대구 남산동에서 이명건, 이덕생, 이수건, 이영옥을 추가로 가담시켜 만주 등 해외까지 활동범위를 넓혔다. 이를 위해 인쇄계(최재화·김수길), 배달계(허성도·이덕생·이종식·이종헌·이기명), 출납계(이수건), 만주 출장계(이영옥), 연락계(이명건)를 두는 등 조직과 기능을 확대하는 한편 독립운동자금 모금에 나섰다.

이튿날 근고동포(謹告同胞), 경아동포(警我同胞), 경고관공리동포(警告官公吏同胞) 제목의 선전물과 인쇄물을 시내에 붙여 대구부민에게 독립운동참여를 독려하고, 민족자산가에 우편물을 발송해 독립운동자금지원을 호소했다. 4월22일·4월27일·5월7일에도 선전물을 뿌렸다.

경고관공리동포에는 “조선인 관공리가 일제의 편에 서서 독립운동을 진압하는 것은 동족의 원수가 되는 것이니 속히 각성하여 사직하고, 조국을 위해 독립운동을 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백은 최재화목사’ 전기에 따르면 선전물은 최재화가 기초했다고 나온다.

이명건은 이여성(李如星)이란 별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당대 최고의 화가 이쾌대의 형으로 그 역시 대구화단(畵團)의 개척자였다. 그는 동아일보 조사부장 때 손기정과 관련한 일장기 말소사건에 개입돼 해직된다. 광복 후 건국동맹 활동을 하다 47년 월북했다.

대구 수성동에서 갑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8살 때 서울로 가 중앙학교를 졸업했다. 이때 중앙학교 동기생 김원봉과 김두전을 만나 의형제를 맺고 평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의했다.

셋의 멘토는 약산의 고모부인 밀양출신 독립지사 황상규다. 황상규는 셋에게 ‘별과 같이, 산과 같이, 물과 같이 오직 민족을 위해 지조를 지켜라’는 의미로 각각 여성(如星), 약산(若山), 약수(若水)란 호를 지어줬다.

이명건은 1917년 부친 소유 땅을 팔아 4만5천원으로 중국 길림성 신장에서 농장을 마련해 독립운동거점으로 삼으려다 도적의 습격을 받아 수중의 돈을 거의 다 뺏기는 바람에 실패하고 낙향해 있던 중 김수길 일행과 합류했다. 그는 최재화의 경신학교 후배이기도 했다.

3·8만세시위에 참가한 이덕생은 계성학교 졸업 후 혜성단 사건으로 옥살이를 한 뒤 장성희와 결혼하고 중국 상하이로 가 의열단에 가입했다. 그는 남산교회 이문주 목사의 아들이다. 이덕생은 이후 임시정부 우파 민족당 한국독립당 기관지인 ‘진광’의 주필을 했다.

그는 임시의정원 상임위원을 역임하다 39세에 사망했다.혜성단의 활동이 일제가 만든 자제단과 충돌하자 일제는 혜성단을 끈질기게 추적했다. 결국 5월14일 대구 경정의 여인숙에서 김수길을 체포한 이후 11명의 단원이 줄줄이 잡혔다.

1919년 7월1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김수길은 징역 2년6월, 이종식은 징역 2년, 이명건 외 8명의 동지는 각각 1년6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해 10월9일 고등법원격인 대구복심법원에서 형량이 늘어나 김수길은 징역 4년, 이명건, 이영옥, 이종식은 징역 3년에 처해졌다. 중국으로 탈출한 최재화는 궐석재판에서 도합 8년형을 선고받았다.

3·1운동 방해공작 단체 자제단(自制團)은 혜성단과 대척점에 선 단체였다. 3·1만세시위가 전국으로 퍼진 가운데 탄압과 폭력에도 숙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일제가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 일시적으로 만들었다.‘스스로 억제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나 각 지역의 민간유지자를 참여시켜 관제 성격을 띠고 있어 자제회라고도 불렀다.

지역에 따라 자위단(경기도), 자성회(전북), 자위회(청도)라는 명칭을 썼다. 부끄럽게도 대구는 1919년 4월6일 전국에서 처음 대구부청에서 관민 72명이 참석한 가운데 자제단이 결성됐다. 이어 청주(4월15일), 평북 정주(4월18일), 안동·성주·경주·칠곡·김천·선산(4월26일), 평양·전주(4월26일이전), 울산(5월6일), 황해도 재령(5월9일), 춘천(5월18일), 군산(5월21일) 등으로 퍼졌다.

하지만 6월 이후부터 활동이 중지돼 자취를 감췄다.당시 대구경북지역에서 발기인으로 참여한 유지는 67명으로 대구를 대표할 만한 지주나 자산가였다. 지금의 상공회의소 상공위원급이라고 할 수 있다. 대구부윤이 이들을 직접 선정했으며, 모임은 대구부청에서 했다.

자제단은 아래 구장을 두고 자제단원의 관리원을 맡게 했다. 구장은 몇 사람의 찬성원을 임명해 해당 구의 주민 전체를 자제단 단원으로 가입토록 강요하는 역할을 맡았다.내용은 소요를 진압하고 불령선인을 잡는데 협조해 달라는 것과 시위참여를 자제시키라는 일종의 강제규약이었다.

특히 그해 4월 기존의 보안법보다 5배나 강화된 조선총독부 ‘제령 제7호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을 시행해 이들을 옥죄었다.우현서루를 설립해 대구에서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던 소남 이일우도 이때 일제의 강요로 자제단에 가입됐다.

그는 자제단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아 제령 7호를 위반해 주요 사찰 대상이던 조카 이상정의 행방에 관해 일경으로부터 심문을 받기도 했다. 1919년 4월 대구부청에서 조사한 대구지역 총 호수는 4천28가구였는데, 이 중 3천787가구가 가맹부에 가입했다. 10가구 중 9가구가 가입한 셈이다.

지역 내 대부분의 주민들이 자제단에 포섭되고 겉으로는 협조한 것처럼 보였으나 부민들은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표시했다. 이때 당시 혜성단의 활약도 한몫했다.일제의 강요에 의해 자제단에 가입되고 운영됐지만 식민통치에 영합해 민족을 배신하고 자신의 이익과 영달을 도모한 부역자도 있었다.

대구 최고의 친일관료인 박중양이 대표적이다. 그는 자제단 단장으로 뽑혀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서상돈의 아들 서병조, 적극적인 자제단 활동으로 강원도지사, 경북도지사가 된 신석린, 대구부호 이병학, 정재학, 정해붕 등은 만세운동 시위를 진정시킨 공로를 이어받아 1920년 이후 조선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 참의로 발탁됐다.

지오그라피 저자 박진관 기자 / 사진 = 문해청 기자

◆청라언덕 유감

-대구에서는 푸른 담쟁이넝쿨이 우거진 동산의료원 선교사 사택 주변이 청라언덕이라고 주장하고, 마산에서는 노비산 언덕이 청라언덕이라고 주장한다. 창원시 마산합포구의 내 고향 남쪽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내 놀던 옛 동산’에는 마산문학관이 있다.

문학관 입구에는 노산 이은상(1903~82)의 ‘옛 동산에 올라’ 시비가 있고, 그 옆에는 마산 출신 시인들의 시비가 줄지어 있다. 문학관 언덕에는 문창교회가 있고, 이은상의 부친 이승규 장로가 건립한 창신학교가 있다.

마산문학관이 있는 언덕은 노비산이다. 마산만(합포만)이 내려다보이는 노비산은 이은상이 어린 시절 뛰놀던 놀이터였다. 노비산은 원래 용마산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전설에 따르면 용마를 끌고 가던 노비의 형상을 한 산이어서 노비산으로 이름 붙였다고 한다.

이은상이 아호를 ‘노산(鷺山)’이라 한 것도 어릴 때 뛰놀던 옛 동산, 즉 노비산에서 비롯되었다. 노비산 자락에 봄이 오면 쑥이 돋아나 마치 푸른 비단을 깔아놓은 듯 아름답고, 동네 처녀들은 흰저고리 검정치마를 입고 쑥을 캐러 왔다. 흰저고리를 입고 쑥을 캐는 처녀들의 모습은 백합꽃이 핀 것처럼 아름다웠다.

1922년 시인 이은상은 노비산 청라언덕을 바라보며 사우(思友, 동무생각) 1·2·3·4편을 쓴다.‘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예부터 대구나 마산에는 청라언덕이라 부르던 지명이 없었기에 대구와 마산의 주장을 근본적으로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청라(靑蘿)에서 라(蘿)가 쑥이냐 담쟁이냐를 먼저 확인해 봐야 한다. 라(蘿)를 옥편에 찾아보면 ‘1.쑥, 2.무, 3.이끼, 4.풀가사리 해조, 5.울타리, 6.소나무 겨우살이, 7.담쟁이 넝쿨’로 되어 있다.

옥편의 뜻이 이러하다면 청라언덕이란 이은상이 어릴 적 뛰놀던 노비산 언덕이라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대구의 주장은 이러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가곡인 ‘동무생각’ 작곡자가 대구 출신의 박태준인데, 1922년 당시 이은상과 박태준이 창신학교에서 함께 근무했고, 두 사람은 서로 막역하게 지냈으므로 박태준의 아련한 첫사랑 이야기를 듣고 이은상이 시를 썼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박태준이 작곡을 먼저하고, 그 곡에 맞춰 이은상이 작사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작곡 후 작사하는 경우는 드물다)박태준은 1910년대 계성학교 재학시절 교회에서 만난 신명학교 여학생을 짝사랑했다고 한다. 가사에 백합이 있으므로 박태준이 사랑한 여학생은 경북여고의 교화가 백합이기에 경북여고생이라 억지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두 사람이 막역한 사이였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은상은 사촌 여동생 김봉렬을 박태준에게 소개시켜 결혼을 하니, 이은상과 박태준은 처남매부가 된다는 이야기를 덧붙인다. 작사자·작곡가가 모두 죽고 나서 청라언덕에 대한 시비가 시작되었으니 어느 곳이 진짜 청라언덕인지 알 수 없다.

담쟁이넝쿨이 자라는 대구의 동산의료원 선교사 사택인지, 쑥이 자라던 마산의 노비산 언덕인지 진실을 가릴 수 없게 된 것이다. 시시비비를 꼭 가려야 한다면 2절 ‘더운 백사장에 밀려들오는/ 저녁 조수 위에 흰 새 뛸 적에… 흰 새 같은 내 동무야….’가 있으니 마산이 더욱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현재 창원으로 통합된 마산은 청라언덕의 지명이 도용되고 있다고 개탄한다. 대구는 근대화 골목길을 조성하면서 스토리텔링을 적절하게 해 ‘근대로의 여행길’을 만들고, 창작 오페라를 기획·공연하며 청라언덕을 대구를 상징하는 문화관광브랜드로 개발하고 있다. <김영현 전 능인고 교장 / 칼럼니스트>

시민과 함께하는 대구역사 탐방단 / 사진 = 문해청 기자

◆경상감영공원

대구는 1601년(선조 34) 경상감영(慶尙監營)이 옮겨오면서 명실상부한 경상도의 중심도시로 도약했다. 경상감영은 조선시대 경상도를 관할하던 곳으로, 조선 건국 초기에는 경주에 있었다.

이후 상주, 칠곡(성주 속현 팔거현), 달성, 안동 등에 설치되었다가 1601년 대구 중구 포정동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1896년(고종 33) 지방 행정을 13도제로 개편한 이후에도 경북도의 중심지 역할을 이어갔다.

1910년 경북도 청사로 개칭하고 1966년 경북도청이 포정동에서 산격동으로 옮겨간 이후에는 경상감영공원이 들어서 지금까지 400여년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약 1만6천500㎡의 공원 안에는 선화당과 징청각이 남아 있고, 백성을 위해 뜻을 펼친 관찰사를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선정비가 있다.

또 보물 842호인 측우기와 하마비(下馬碑)를 비롯해 옛 건물의 멋을 살린 정문, 분수, 돌담, 산책로, 통일을 기원하는 ‘통일의 종’ 등을 볼 수 있다. 경상감영이 옮겨오면서 대구는 경상도의 중심은 물론 한강 이남에서 최고의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로 발전했다.

특히 정치·경제·행정·사법·교육·문화·군사의 중심지로 급부상하는 전환점이 됐다.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은 대구시와 공동으로 스토리텔링 시리즈 ‘경상감영 1601~’을 연재한다. 시리즈를 통해 경상감영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경상감영 400여년의 역사를 오롯이 품고 있는 대구의 문화적 경쟁력을 되짚어 본다.

경상도 중심의 행정체제 위세 떨쳐경상도. 1896년 경상남도와 북도가 분리되기 전 두 지역을 합하여 부르던 이름이다. 조선 초기까지 이 지역에는 경주·상주·안동·진주 등 큰 고을이 있었다. 그 가운데 경주와 상주의 머리글자를 따서 이름이 붙여졌다.

이 지역 명칭에 대한 우여곡절이 많았다. 신라 말인 757년(경덕왕 16)에 상주(尙州)·양주(良州)·강주(康州)에 3도독부가 설치되어 인근 군현을 관할했다. 995년 고려의 조정이 전국을 10도로 나눌 때 상주 관할을 영남도(嶺南道), 경주·금주(金州, 김해) 관할을 영동도(嶺東道), 진주·합주(陜州) 관할을 산남도(山南道)라 했다.

1106년(예종 1) 이 3개도를 합하여 경상진주도(慶尙晉州道)라 했다. 1171년(명종 1)에는 경상주도(慶尙州道)와 진합주도(晉陜州道)로 분리하였다가 1186년 다시 합하여 경상주도라 하였다. 1204년(신종 7)에는 상진안동도, 그 후에는 경상진안도·명주도 등의 이름이 사용되었다.

1314년(충숙왕 1) 마침내 경상도로 개칭해 1896년까지 그 이름을 유지하였다. 경상도는 8도 가운데 군현의 수와 인구 등의 측면에서 가장 큰 규모의 도였다. 일본과 접촉하는 창구와 통로가 되었으므로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조선 전기에 66개 군현으로 구성되었던 경상도는 이후 17세기까지 진주로부터 남해현(南海縣)이, 김해로부터 웅천현(熊川縣)이, 경주로부터 자인현 (慈仁縣)이, 성주의 속현이었던 팔거현(八縣)이 칠곡(漆谷)도호부로, 영해로부터 영양현(英陽縣)이 독립·신설되어 조선 후기에는 71개 군현을 관할하였다.

이들 71개 군현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동쪽이 좌도(左道), 서쪽이 우도(右道)로 나뉘었다. 좌도에는 경주·안동·대구·풍기·용궁·인동 등 40개 군현이 있었고, 우도에는 상주·진주·성주·선산·문경·함창 등 31개 군현이 포함됐다.

좌도는 대체로 과거 진한 지역으로 신라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반면에 우도는 변한 지역으로 가야의 전통이 뿌리를 내린 지역적인 특성이 있었다. 경상감영은 처음에는 한 곳에 고정된 관청이 아니라 유영과 주영 등의 형태로 존재했다. 이런 형태로 조선 건국 초기까지 경주에 감영이 있었다가 세종조에 상주로 옮겨 설치됐다.

이후 경상도를 좌·우도로 분도 혹은 합도하는 문제들과 얽혀, 한때는 성주 속현 팔거현(칠곡, 1593)과 달성(1596) 등에 감영을 두기도 했다. 임진왜란으로 이들 감영 형태가 소진되어 다시 안동으로 이전하였다(1599). 임진왜란 이후인 1601년(선조 34) 대구로 옮겨온 이후 1894년까지 이어졌다.

1896년 13도제를 실시함에 따라 경상도를 남북으로 분리, 경상남도와 경상북도로 나누었다.대구에 감영을 두게 된 것은 지리적으로 경상도의 중앙에 위치하여 경상도 전체를 다스리는 입지조건이 가장 유리했기 때문이다. 또한 물산의 집산이 풍부하여 재정적인 축적이 용이했던 점도 작용됐을 것으로 보인다.

왕권 대행의 절대 권력 가진 관찰사감영의 수장은 관찰사다. 관찰사는 종2품의 문관직이다. 감사(監司)·도백(道伯)·방백(方伯) 등 여러 별칭이 있다. 관찰사는 지방관에 대한 규찰과 지방장관으로서 왕권을 대행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그만큼 위세가 강력했다.수령이나 첨사(僉使)·만호(萬戶)·찰방(察訪) 등 외관의 근무 상태에 대한 관찰사의 규찰은 이들의 근무성적 고과에 기준이 되었다.

지방관의 탐학을 적발하여 탄핵하는 권한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관찰사는 지방 수령과는 서로 견제하고 조심하는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관찰사는 도내의 행정 및 군사 업무를 통제 지휘할 권한도 갖고 있었다. 도내 수령에 대한 지휘권은 물론이고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까지 통제권을 행사했다.

관찰사는 중요한 정사에 대해서는 중앙의 명령에 따라 행하였지만, 관할하고 있는 도에 대해서 도의 장관으로서 경찰권·사법권·징세권 등을 행사하여 지방행정상 절대적 권력을 가졌다. 관찰사의 관청은 감영(監營)이라고 하며, 1446년(세종 28) 경력이 폐지된 뒤로는 도사(都事) 외에 검율(檢律)·심약(審藥) 등이 직속관원이었다.

한때 관찰사가 감영이 설치된 지역의 수령을 겸한 적이 있는데, 그 경우 판관(判官)을 두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중군(中軍)이 추가되었다. 그 밖에 일반 행정은 감영에 속한 영리(營吏)들이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의 6방에 소속되어 담당하였다.처음에는 관찰사가 감영에 머무는 기간이 짧았다.

지방관 규찰 업무에 가장 큰 비중을 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방장관의 기능에 비중을 두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감영에서 근무하게 됐다. 자연스럽게 감영 기구도 강화되었다. 경상도에 파견된 관찰사는 대구 감영에 머물며 지역의 정치·경제·군사·사회·문화에 관한 행정을 펼쳤다. 그러나 관찰사의 임기는 그리 길지가 않았다.

2년이면 꽤 길게 한 셈이었고, 대개는 1년 혹은 1년 미만이었다.‘경상도선생안(慶尙道先生案)’에 따르면 고려 우왕 14년에서 임진왜란(1592년) 전까지 경상감사 223명의 임기가 5개월 이하가 34명, 6~11개월이 61명, 1년이 103명, 1년 이상이 20명, 2년이 5명이었다.

대구로 감영이 옮겨온 1601년(선조 34)부터 1894년 갑오개혁 전까지 약 300여년 간 재임감사 238명을 조사(장인진)한 바에 따르면 1~6개월이 27명, 7~10개월이 44명, 11~12개월이 20명, 13~17개월이 65명, 18~24개월이 55명, 25~39개월이 26명, 그 이상이 1명이었다.

경상감사가 대구부사(大丘府使)를 겸할 때는 2년, 그렇지 않을 때는 1년이라는 임기 규정이 있었지만 제대로 시행되지 못한 것이다.대부분의 관찰사가 임기를 채우지 못한 것은 부정부패가 큰 이유였다. 특히 재판과 관련된 부정이 끊이지 않았다. 당시 관찰사는 재판권을 행사하는 절대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사실상 도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재판은 관찰사의 손에 달려 있었다.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옥살이를 하거나 재판에 져서 재산을 날리는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이 때문에 재판에서 이기게 해 달라는 뇌물이 횡행하기 마련이었다.

왕권이 안정된 조선 초기나 영·정조 시대에는 임기를 채운 관찰사가 많았지만, 당쟁이 심하고 기강이 문란했던 시기에는 도중하차하는 경우가 속출했다. 조선 후기 행정이 문란할 때 ‘군수 한 번 하면 3대가 호강하고, 관찰사 한 번 하면 8대가 영화를 누린다’는 말까지 나돈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며 임기를 채운 관찰사도 여럿이었다.경상감영 이전 후 근대적 행정도시로…17세기 후반부터 경상도 관찰사가 감영 소재지인 대구부사를 겸임하면서, 과거 각 지역을 순력하던 체제(行營體制)가 감영에 머무는 체제(留營體制)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대구부 관청과 관속과는 별도로 감영 소속의 관아시설과 관원 등이 구성되었다.

관찰사가 근무했던 곳은 포정당(布政堂, 곧 선화당 宣化堂)이다. 이를 중심으로 관찰사의 처소로 쓰였던 징청각, 관풍루와 같은 감영의 대표적인 건물이 갖추어졌다. 이와 함께 도사·중군·검률·심약·영리·장교 등 관리들의 집무실과 아전이나 노비들의 거처, 그리고 각종 창고가 설치됐다.

감영 소속의 관아들의 규모는 아주 컸다. 17세기 이래 지방의 도시화가 감영이 있는 행정 중심지를 중심으로 커지면서 상공업 발달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대구부는 경상도의 중심에 위치한 데다 감영을 갖춤으로써 공물과 진상품들이 집중됐다. 그리하여 도내 71개 읍의 체계가 정립되고, 각 읍으로부터 인적·물적 자원이 유입됐다. 동시에 화폐경제와 상공업의 발달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이로써 대구가 근대적인 행정 도시로 발전했다. 대구는 경상감영이란 도정 총괄 기구로 인해 근대 도시적 규모를 갖게 되고, 행정·경제·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했다.경상감영, 他 도에 비해 활발한 도서간행관찰사는 국왕의 지시와 명령에 따라 한 도를 통치하는 왕권의 대행자로 행정·사법·군사 등 해당 도의 통치행정상의 일체의 권한과 책임을 지고 있었다.

특히 조선왕조의 주요시책 중 하나인 농업 정책에 공을 들이고 다양한 정책을 폈다. 권농업무를 독려하고, 수령들의 농사정책을 일일이 확인하다시피 했다. 농사업무 태만 수령은 국왕에게 보고하는 등 죄를 묻기도 했다.

수해와 한해를 방비하는 것도 관찰사의 주요 업무였다.또한 관찰사라는 직함답게 도정의 감사 직무와 감찰기능이 중시됐다. 관찰사는 수령들의 비위를 규찰하여 국왕에게 보고했다. 죄상이 중하면 먼저 벌하고 이를 보고하기도 했다.

관찰사의 주요임무가 각 지역을 도는 순력에 있음은, 곧 각 고을의 수령이 얼마나 백성을 위한 일을 충실히 하고 있는지를 감찰하는 임무수행의 일환이었다. 재해를 맞아 백성을 구휼하고 구황하는 일도 큰일이었다.

또한 지역의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하기 위해 각종 과거시험을 실시했고, 세수와 세정을 수납은 특히 중요한 업무였다. 향교를 중심으로 한 교육·문화시책도 중시됐는데, 특히 출판문화 및 도서관적인 기능을 제고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특히 경상감영이 발간한 간행물이 눈길을 끈다. 경상감영에서는 다른 도에 비해 도서를 많이 간행했다. 이 지역이 유학의 뿌리가 깊은 데다 이를 기반으로 한 문화적인 역량이 크게 발휘됐기 때문이다. ‘대전통편’ 등 중앙관서의 명에 따라 제작한 통치관련 서적를 비롯해 ‘사서삼경’ 등의 유교경전, 그 밖에 의례, 역사, 의학 관련 서적 등 다양한 출간이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는 한글로 제작된 ‘시경언해(詩經諺解)’는 주목할 만하다. ‘시경언해’는 두 질인데, 이들 언해본에는 ‘무자신간 영영장판(戊子新刊 嶺營藏板)’이란 간행기록이 인쇄돼 있다. ‘영영(嶺營)’은 경상감영의 다른 표현이다.

이들 자료는 한글의 변천과정 등을 엿볼 수 있어 국어학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도서 간행은 유학 장려와 지방문화 창달을 위한 사업이었다. 경상감영에서는 무려 200여종의 책자를 발간했다. 이는 관찰사의 학문적 노력과 다른 도에 비해 경상감영의 문화적 우수성을 확인할 수 있는 일로 평가받고 있다.

대구가 학문적 토대를 갖추는 계기이기도 했다. 또 경상감영에는 인재육성을 위한 낙육재를 설치해 운영하기도 했다. 낙육재는 경종 원년인 1721년, 지역 인재육성을 위해 설치된 경상감영 소속의 교육기관이었다.

특히 수많은 도서를 소장해 도서관의 기능을 하기도 했다. 낙육재에서는 유능한 인재를 선발해 독서와 학술연구를 수행하는 역할을 했다.

1906년 낙육재가 철폐되면서 도서가 많이 유실됐으며, 일부가 대구향교(1907~19)와 대구부립도서관(1919~45)을 거쳐 현재 대구시립중앙도서관으로 이관돼 관리되고 있다. 대구시립중앙도서관의 고문헌실 명칭을 낙육재로 사용하고 있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경상감영은 조선시대 경상도를 관할하던 감영(監營)이다. 지금의 도청과 같은 역할이다. 이제는 도심의 공원으로 더 유명한 이곳에서 지난 세월의 영화와 위엄을 찾는 것은 부질없다. 꽃이 지듯 세월은 변했고, 딱히 변한 것은 세월만이 아니다. 조선은 전국을 8도(道) 체제로 일원화하고, 각 도마다 관찰사를 파견했다.

관찰사는 감사(監司)라고도 불리며, 해당 관할지의 행정 및 사법권을 부여받았을 뿐 아니라, 병마절도사나 수군절도사도 겸직함으로써 해당 지역의 군사 지휘권까지 가졌다. 도내 모든 수령(목민관)과 진관(鎭官)의 장수들은 관찰사의 지휘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관찰사는 중앙에서 별도로 임명해서 파견하기도 했지만, 예산 절감 등의 이유로 관할 지역을 대표하는 지역의 수령이 겸직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기에, 관찰사를 겸한 수령의 관저가 곧 감영이 되는 셈이었다.

명실상부한 경상도의 중심도시대구는 1601년 경상감영이 옮겨오면서 명실상부한 경상도의 중심도시로 도약했다. 경상감영은 조선 건국 초기에는 경주에 있었다. 이후 상주, 칠곡, 달성, 안동 등에 설치되었다가 1601년 대구 중구 포정동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경상감영이 옮겨오면서 대구가 경상도의 중심지로경상감영이 옮겨오면서 대구는 경상도는 물론 한강 이남에서 최고의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로 발전했다. 특히 정치·경제·행정·사법·교육·문화·군사의 중심지로 급부상하는 전환점이 됐다.

1910년 경북도 청사로 개칭하고, 1966년 경북도청이 포정동에서 산격동으로 옮겨간 이후에는 감영이 있던 자리에 공원이 들어섰다. 대구의 중심에 위치해 ‘중앙공원’이라 불리다가 1997년 ‘경상감영공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아직도 남아있는 경상감영공원 내 문화유산약 1만6천500㎡의 공원 안에는 경상감영 관찰사가 집무를 보던 선화당과 관찰사 처소로 쓰이던 징청각이 남아 있고, 관찰사와 대구판관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총 29기의 선정비가 있다. 또 보물 842호인 측우기와 하마비를 비롯해 옛 건물의 멋을 살린 정문, 분수, 돌담, 산책로, 통일을 기원하는 통일의 종 등을 볼 수 있다.

대구 역사와 함께한 400년 경상도는 1896년 경상남도와 북도가 분리되기 전 두 지역을 합하여 부르던 이름이다. 조선초기까지 이 지역에는 경주, 상주, 안동, 진주 등 큰 고을이 있었다.

그 가운데 경주와 상주의 머리글자를 따서 경상도란 이름이 붙여졌다.(경상도 사람들도 잘 몰랐던 사실)조선 건국 초기까지는 경주에 감영이 있다가 세종조에 상주로 옮겨 설치됐다. 이후 경상도를 좌·우도로 분도 혹은 합도하는 문제와 얽혀 한때는 성주, 속현, 팔거현과 달성 등에 감영을 두기도 했다.

경상도의 분도와 합도가 되풀이되면서 이곳저곳을 떠돌던 경상감영은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선조 29년(1596) 처음으로 대구부에 세워졌다. 우·좌로 나뉜 경상도를 다시 합치는 과정에서 경상도 중심부에 위치해 있어 당시 경상도를 점령하다시피 한 왜군이 전라도로 진격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대구가 주목받은 것이다.

그러나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으로 왜군의 손에 달성에 있던 감영이 불타버리면서, 감영은 다시 내륙이자 대도호부(大都護府)가 설치되어 있던 안동으로 옮겨졌다.

왜란이 끝난 선조 34년(1601), 안동대도호부가 교통이 불편한 내륙에 있어 위치상 감영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감영은 다시 대구부로 옮겨졌고, 이후 1894년까지 이어졌다. 대구에 새롭게 지어진 경상감영이 바로 현재 자리에 있는 그것이다.

한강 이남 최고의 전통·역사 대구부는 경상도의 중심에 위치한 데다 감영을 갖춤으로써 공물과 진상품들이 집중됐다. 35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약령시도 이 감영 앞마당에서 열린 영시(營市)에서 시작됐다. 조정에 필요한 약재를 효율적으로 수집하기 위해 효종 9년(1658)에 관찰사의 명으로 처음 설치된 것이다.

대구는 경상 좌우도의 감영 소재지일 뿐만 아니라 교통 요충지였다. 특히 낙동강과 금호강에 접해 있어 지역 내의 약재 등 각종 상품을 수송하기 편리했다. 객사 앞 1천여평에서 봄·가을 두 차례 정기적으로 열리던 약령시는 대구읍성 철거 이후 감영 내 객사와 주요 건물이 잇따라 파괴되면서 1907년 남문 밖, 지금의 약전골목으로 이전했다.

‘오가는 사람들의 어깨와 수레가 맞닿아 지나기 힘들 정도’였던 약령시의 영화 역시 옛 이야기가 됐다. (약령시의 우여곡절) 이렇듯 대구는 경상감영이란 도정 총괄 기구로 인해 근대 도시적 규모를 갖추게 되고,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중심도시로 부상했다. 대구 역사에서 400여년의 경상감영이 가지는 중요한 의미다.

청라언덕에서 / 사진 = 문해청 기자

◆동학과 대구

요시카와 하루코 전 참의원(4선)은 일본의 대표적인 진보정치인이다. 그녀는 24년간 참의원을 하면서 전후 일본의 전쟁범죄와 여성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다. 특히 의회에서 강제위안부피해자를 위한 법안제정과 통과를 위해 노력해왔다.

그녀는 현재 ‘위안부문제와 젠더 평등세미나’ 모임을 이끌고 있다. 2014년 11월 요시카와 전 의원이 3명의 회원과 대구를 찾았다. 일본의 양심이라고 불리는 ‘나카츠카 아키라’ 전 나라여자대 명예교수가 인솔한 ‘동학농민군 역사를 찾아가는 기행단’과 함께였다. 일본인 기행단이 동학발자취를 찾은 건 올해로 9회째다.

대구를 찾은 건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다. 그 전엔 호남과 충청에 있는 동학관련 현장만을 답사해왔다. 40명의 기행단은 이날 경상감영공원과 종로초등학교 내 ‘수운 최제우 나무’‘수운 순도지’(동아쇼핑 서편 지하주차장입구) 등지를 방문했다.

기실 순도지(처형장)는 종교적 차원을 떠나 ‘동학의 성지(聖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수가 처형당한 예루살렘의 골고다 언덕과 석가가 열반한 쿠시나가르가 성지로 알려져 세계적인 관광지가 돼 무수한 탐방객을 유치하는 것과는 굳이 견주지 않더라도 수운이 처형당한 곳에 기념관은커녕 작은 비석이나 표식도 없었다.

일본인 기행단은 백화점 주차장 입구를 들락거리는 차량을 피해가면서 흔적도 없는 처형지를 둘러보고 안내자의 설명을 열심히 메모했다. 보석을 가졌음에도 그 보석의 값어치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보석은 단지 돌에 불과할 뿐이다.

동학은 수운의 생명존중과 평화사상에 힘입어 전국에서 새롭게 조명 받고 있다. 대구가 동학을 등한시한 사이 다른 지역은 이미 관광과 연계시키고 있다. 전북 고창, 정읍, 전주, 남원에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전봉준 생가터, 무명동학농민위령탑, 동학혁명 모의탑, 기념공원 등 33곳에 동학유적지가 있다.

서울·경기에는 해월 최시형 처형터 표지석을 비롯해 7곳, 강원도엔 원주의 해월 피체지 비석을 비롯해 6곳에 동학유허지가 있다. 이 밖에 충청엔 27곳이 있으며, 경북에는 경주를 포함해 포항, 상주, 예천, 선산, 김천 등 16곳에 유적지가 있다.

수운이 도를 깨친 경주의 용담정과 구미산 일대는 이미 국립공원이다. 경주에 있는 수운의 생가터도 올해 복원됐다. ‘제1회 동학농민혁명문화재’를 연 상주시는 경북도와 함께 상주시 은척면 소재 동학관련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시키려 하고 있다.

하지만 대구는 어떤가. 대구에는 달성공원에 있는 수운의 동상 하나가 전부다. 그것도 동상보다 더 큰 수십 그루의 일본산 가이즈카향나무에 포위돼 가려져 있다. 달성공원에 동상이 있어야 할 아무런 연고도 없다. 동물원을 옮기기에 앞서 수운의 동상을 먼저 옮기는 것도 고려해 볼 일이다.

기행단은 이날 저녁 대구국채보상운동기념관에서 열린 ‘역사를 직시하는 한·일 시민교류회’에 참석했다. 대구에선 약 60명의 시민이 참석해 친교를 나눴다. 하지만 이 자리에 대구시나 중구청의 공무원은 한 명도 보이질 않았다.

심지어 일요일이라 처음엔 국채보상운동기념관 사용도 허가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일본인기행단의 5박6일 탐방지역 가운데 하나였던 광주에서의 한·일 시민교류회에선 전직 국회의원과 관계공무원 등이 나와 이들을 환영하고 행사도 지원했다는 전언을 들었다.

요시카와 전 의원은 이 자리에서 강제위안부역사관건립에 써달라며 성금을 전달했다. 그녀는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여성인권침해, 인간의 존엄성훼손사례가 일본군위안부”라며 “의원직에서 물러난 뒤 이 일에 전념하기 위해 시민단체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내년에도 일본인 동학기행단이 대구를 찾는다고 한다. 그때도 지금과 같다면 대구의 정신개벽은 백년하청이다. 사족: 2018년 대구현대백화점 앞에 수운 최제우 순도비가 건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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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군자들이 노는 정자로, 조병갑이 기생들을 거느리고 놀았던 곳이다. 당연히 전북 고부에 있다. 그런데 ‘조병갑이 군자?’ 쓴웃음이 일지만 어쨌든 ‘있다’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

군자정 앞에는 선정비들도 즐비하다. 동학농민군이 부수였기 때문에 지금 남은 선정비들은 반 토막뿐이다. 하지만 반 토막인 게 더 역사적이다. 민중의 분노가 생생하게 울려오는 까닭이다. 이들 말고도 전북 정읍에는 동학 답사지가 많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 동학군이 진압군을 제압했던 황토재 고개의 갑오동학혁명기념탑, 전봉준이 살았던 집, 우물, 제향을 위해 조성해놓은 단소 등 정말 많다. 전봉준 등 20명이 동학혁명을 계획할 때 사발통문을 작성했던 집도 남아 있다.

그 후손들이 관청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세운 동학혁명모의탑도 있다.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으로 세운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도 예술적이다. 전봉준이 고부 관아 공격을 앞두고 사람들 앞에서 연설했던 말목장터의 유허비, 그 감나무가 죽어 새로 현장에 식목한 2세 나무도 있다.

본래 감나무는 박제로 만들어 동학농민혁명기념관 1층에 고이 보관하고 있다. 만석보 자리에 유허비가 세워져 있는 것이야 당연하다.동학은 단순히 종교 문제가 아니다. 외세와 권력 부패에 항거한 우리 민족의 역사이다.

정읍이 성심껏 전봉준을 기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다. 충북 청원도 1992년 손병희기념관을 건립했다. 울산도 수운이 수도 생활을 한 여시바윗골을 기념물 12호로 지정하고 비석을 세우는 등 역사화 및 관광화 사업에 공을 들였다. 벌써 1997년의 일이다.

그런데 최제우가 죽은 대구에는 아무것도 없다. 표식 하나 없다. 엉뚱한 달성공원에 동상 하나가 있을 뿐이다. 수운 처형 장면을 지켜보았을 법하다는 이유로 ‘최제우 나무’라는 이름을 얻은 종로초등학교의 회화나무도 교문 초입부터 일본 향나무들이 즐비하니 만약 사람이라면 곧 고사할 처지이다.

석가가 열반한 쿠시나가르나 예수가 처형당한 골고다 언덕이 세계적 성지로 알려져 무수한 탐방객을 부르고 있는 것과는 견주지 않더라도 정읍, 청원, 울산, 고창 등지에 비교해도 너무 차이가 난다. 역사의식을 떠나 관광목적으로 보더라도 이렇게 방치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수운은 ‘높이 날고 멀리 뛰라’는 유언을 남겼다. 대구가 높이 날고 멀리 뛰려면 역사의식이 살아있어야 한다. 그래야 앞을 볼 수 있다. 선조들의 삶을 모르면서 어떻게 미래 사회를 논할 것인가.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은 늦었지만, 130주년은 정읍의 몫이 아니라 대구의 몫으로 만들자. 그러기 위해선 최제우 유적부터 시급히 숨을 쉬게 해야 한다. 동학의 근본정신도 죽어가는 것들을 살리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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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서지 못하고야 강산의 주인 구실 어찌 하며 스스로 믿지 못하고야 남의 신의 바랄손가. 급급한 세상 사람 선각자를 몰랐어라. 갑자년 3월10일(양력 4월15일) 대구장대에서 순도하신 불멸의 그 얼이여. 한울과 더불어 길이 살아 창생을 제도하니 이 겨레의 자랑이자 나의 영광이 아닌가. 밝음은 바로 그대 마음에 비치도다.’(달성공원 내 최제우 동상 비문 중)

-대구에서 순도한 최제우수운 최제우(1824~64)는 동학을 창시한 후 경주최씨 집성촌인 현곡면 일대부터 포교했다. 그는 먼저 자신의 여종 2명 중 하나는 며느리로 삼고, 하나는 딸로 삼았다. 가히 혁명적이었다.

포교한 지 3년 만에 동학의 교인수는 3천명을 넘어섰고, 접소는 14개소에 이르렀다. 하지만 보수적인 경상도 일대 서원과 향교에선 만인평등을 외치는 그를 곱게 볼 리 만무했다. 문중에서는 그를 가문을 망치는 원수로 여길 정도였다.

조정에서는 ‘서양의 사술을 전부 답습해 특별히 명목만 바꿔 어리석은 백성을 현혹시킨다. 조기에 처결(處決)하지 않는다면 중국의 황건적이나 백련교 같은 도적떼가 될 것’이라며 관군을 보내 1863년 12월10일(음) 경주 용담정에서 그를 체포한다.

당시 선전관 정운구는 포졸 50여명을 대동해 수운을 포함, 제자 23명도 함께 포박해 서울로 압송하려 했다. 경주~영천~대구를 거쳐 조령을 넘어갈 예정이었지만, 동학교도 수천 명이 조령에 집결해있다는 소식을 듣고 상주~화령을 넘어 보은, 청산, 청주를 거쳐 과천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즈음 철종의 갑작스러운 승하로 과천에서 약 일주일간 머물다 수운은 다시 경상감영으로 이송된다. 이송 중간에 제자와 신도 수백 명이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했다. 이들이 관군에 돈을 바치며 ‘잘 봐 달라’고 애원했다는 기록도 있다.

1864년 1월5일(음) 경상감영 원형옥에 다시 압송된 수운은 100일가량 옥살이를 한다. 옥살이 도중 해월 최시형이 옥졸로 변장해 옥사를 찾아간다. 수운은 해월에게 “몸은 죽지만 영의 힘으로 대도를 지켜 천명을 따르겠으니 높이 날고 멀리 뛰라”고 했다. 해월은 이후 38년간 잠적하며 교조신원운동을 벌인다.

수운의 심문을 맡은 관리는 당시 경상도 관찰사였던 서헌순이다. 그는 사헌부 대사헌,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등 요직을 역임했다. 그는 정사를 다스리는 데 청렴결백하며, 옳고 그름을 잘 판단했다고 한다. 일례로 경상감사를 역임할 때 부인이 사택에서 가지고 온 솥이 경상도 것임을 알고 그 솥을 경상감영으로 돌려보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수운을 심문할 때 배석한 관리는 상주목사 조영화, 지례현감 정기화 등이었다 수운은 20여차례나 혹독한 심문과 고문을 받았다. 이들은 허황된 사술을 퍼뜨려 민심을 혼란시키는데 초점을 맞춰 주로 몽둥이로 볼기와 넓적다리를 치며 문초를 했다. 혹독한 매질로 수운의 정강이가 부러지기도 했다.

조정은 서학을 전파하고 재물을 사취한다는 명목으로 수운에게 죄를 덮어씌울 요량이었다. 특히 검무와 검결을 모반의 뜻이 담긴 것으로 해석했다. 서헌순은 ‘수운이 제자들에게 글자를 써주고 돈을 받은 적은 있으나 토색질한 것은 없으며, 동학이 나라를 외적으로부터 막기 위한 학문이라 한다.’ 면서 문초한 대로 조정에 보고했다.

하지만 조정에선 ‘경상도는 추로지향이어서 음악 소리와 글 읽는 소리가 그치지 않던 고장이었으나, 동학이란 요사스러운 무리가 나타나서 많은 도당을 집결시켰다’며 동학을 서학과 마찬가지로 혹세무민의 사교로 내몬다.

결국 수운은 좌도난정의 죄목으로 참형을 언도받고 나머지 12명은 유배 등 엄형을 받는다. 형조판서의 훈령에 따라 수운은 3월10일(양력 4월15일) 관덕당에서 처형됐다.‘갑자년 삼월 초열흘, 대구장대에는 사람이 백차일 치듯이 모였다. 대구감영 사람들, 사방으로 몰려들어온 동학하는 사람들, 동학 선생이 죽는 것을 볼 양으로 아침 일찍부터 모여들었다.’

추연창 이육사 애국시인 대구기념사업회 자문위원 / 사진 = 문해청 기자

이 글은 1923년 천도교가 운영한 개벽지 3월호 춘원 이광수가 쓴 ‘거룩한 이의 죽음’이란 단편소설에 나오는 내용이다. 망나니가 칼춤을 추며 수운의 목을 내리쳤으나 목에 검의 흔적조차 나지 않자 감사와 형졸이 당황했다.

이에 수운이 ‘맑은 물 한 그릇을 내놓으라.’고 하면서 마지막 묵도를 한 다음 형졸에게 ‘안심하고 베라’하고 조용히 목을 내놓았다. 망나니가 수운의 목을 베는 순간 맑은 날씨가 갑자기 변해 광풍이 일고 폭우가 내렸다고 전해온다.

수운의 머리는 읍성 남문 밖 장대에 사흘간 효수됐다. 이후 아들 세정과 제자들에게 시신이 넘겨진다. 시신을 수습한 일행은 경산 자인에서 사흘간 머물렀다. 시신에 따뜻한 기운이 남아 행여 회생할까 하는 기대감을 가졌다고 한다. 운구일행은 영천~경주 용담에 이르러 용담 서쪽 언덕에 수운의 시신을 안장했다. 그는 1907년 순종황제에 의해 사면됐다.

최제우가 갇혔던 옥사는 경상감영 내 원형옥이다. 임재표 대구지방교정청장이 펴낸 ‘영남지역 전통 옥터 조사 및 답사기록’에 따르면 감영의 옥은 좌옥(左獄)과 우옥(右獄) 2개가 있었고 죄의 경중에 따라 활용을 달리한 것으로 돼 있다.

임 청장에 따르면 좌옥은 중죄인과 사상범이 수용된 곳으로 북장대 남쪽(현 서문로교회 일대)이며, 우옥은 경죄인과 잡범, 재판 중인 죄인이 수용된 곳으로 대구읍성 북문인 공북문 남쪽(현 대안성당)에 위치한다고 주장한다.

대안성당 앞 옛 형구돌 앞에는 경상감영의 옥터였음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추 위원장과 맨 먼저 찾은 곳은 종로초등학교 앞에 있는 수운 최제우 나무다. 이 나무는 수령 400년의 회화나무로 경상감영 내 좌옥터로 추정되는 서문로교회와 가까운 곳(150m)에 위치한다.

서헌순이 효수형 명령을 내리자 회화나무 잎사귀에서 수액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고, 옥졸들도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와 2012년 대구시가 ‘최제우 나무’로 명명했다. 임 청장은 충남 서산 해미읍성 원형옥과 상주시 옛 원형옥터 주변에도 회화나무가 있다고 했다.

추 위원장은 중죄인이 갇혔던 좌옥 별실의 위치가 종로초등 야외 화장실 근처라고 했다. 관아를 출발한 압송행렬은 현 국채보상로를 따라 지금의 대구중부경찰서네거리로 가서 다시 종로를 거쳐 대구읍성 남문 밖 관덕당으로 향한다.

관덕당은 약령시 남쪽 염매시장 부근이다. 현재 동아쇼핑 북서편 주차장 입구와 문화아파트 한국우주소년단 대구지부 일대로, 옛 번지는 중구 계산동 245-1, 지금은 달구벌대로 2081-10~12다. 이곳에는 관덕당이라 쓰인 현판이 걸린, 군관과 별무사를 선발하는 도시소(都試所)가 있었다.

관덕당 앞 달구벌대로는 아미산 언덕바지 땅이었다. 지금은 대구도심 한복판에 위치하지만 당시에는 성 밖이라 집도 없었고 사람의 왕래도 드문 곳이었다. 관덕당은 광복 후까지 남아있었으나 1960년대 말에 헐렸다.

그후 1991년 현 남산2동 938-19에 천주교관덕정순교기념관이 세워진다.추 위원장은 “관덕당 형장 일대 땅에 묘심사(妙心寺)란 절이 세워졌다. 회산 박기돈이 후에 이 땅을 매입한 뒤 김울산 여사에게 넘겼다.

이후 이 땅은 천도교에서 분리된 상제교 교주 김연국에게 팔렸다”고 했다. 김연국은 순도지 주변에 최제우 순도비를 세웠다. 그의 아들 덕경과 도경이 상제교 간판까지 달았으며 광복 후에는 역시 천도교에서 분리된 시천교대구지부 사무실로 사용했다.

염매시장 내 마산상회 주인인 황선평씨(80)는 “돌로 만든 사람 키 높이의 최제우 순도비가 6·25전쟁 때까지만 해도 현 마산상회 안쪽에 있었지만 1960년대 이후 담벼락이 헐리고 상가가 조성되면서 사라졌다”고 했다.

관덕정이라고도 불린 관덕당 처형장은 꽤 넓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보통 관덕당 앞뜰에서는 중죄인, 잡범에 대한 형 집행은 아미산 기슭에서도 집행됐다. 일성록(日省錄)에 따르면 수운에 대한 형 집행은 관덕당 앞뜰에서 진행됐다고 나온다.

‘군민을 많이 모아 놓고 효수해 백성에게 경고케 하라’는 명령까지 내려져 인산인해를 이뤘을 것으로 짐작된다.관덕당은 정자와 같은 건축양식으로 단청까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천주교 대구 관덕정 순교성지 홈페이지에는 중죄인에 대한 형 집행이 현재 관덕정 자리에서 이뤄졌다고 나와 있다.

최제우 순도 이전과 이후에도 아미산 기슭 관덕당말랭이에서 여러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했다.추 위원장은 수운 선생의 순도지에 표지석이라도 다시 세우자는 일념으로 지난해 초부터 이랜드와 현대백화점 관계자 등을 만나 표지석 건립을 백방으로 타진했으나 뾰족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지금은 현대백화점 앞 보도 지하철 2호선 출입구 화단 주변에 표지석이라도 세울 요량이다.. 그는 “역사조형물은 그 역사적 현장에 있는 것이 옳다”며 “달성공원 안에 있는 수운의 동상도 제자리를 찾길 바란다”고 했다.

또한 “대구시와 중구청이 근대골목으로 히트를 쳤지만 근대골목투어의 시발점을 선교사주택이 있는 동산에서부터 시작해선 곤란하다. 신분차별철폐와 만민평등, 반봉건제를 주장했던 동학이 대구에서 완성된 만큼 최제우 순도비와 순도기념관이 건립돼 대구가 동학의 성지인 점을 알릴 필요가 있다”고 힘주어 주장했다.

문해청 기자 jajudol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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