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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에 대항한 마산시위.. 부패권력을 몰아낸 학생들의 순수한 분노

기사승인 2019.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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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단체 활빈단(대표 홍정식)은 '3·15 마산의거' 59주년일인 15일 논평을 통해 "부정선거에 저항한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3·15 마산의거는 민주화운동의 불씨가 되었다"며 "3·15 마산의거 정신을 이어 받아 4·3국회의원 보선에서 깨끗한 공명선거를 이루자"고 촉구했다. 이에따라 활빈단은 15일 후보등록 마감후 21일부터 창원성산,통영·고성에서 본격적으로 실시되는 4·3국회의원 보선에서 "납세자·유권자의 참정권을 발휘해 민생경제회복에 앞장서 국태민안을 실천할 참 인물를 뽑자"며 "바가지(바른 후보 가려내 지역 참일꾼)찾기운동을 전개하겠다"고 밝혔다.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에 대항한 마산시위

▲ 1961년 마산 시민들이 3.15 의거 1주년 기념식에 참여하고 있다.

투표소로 가는 아침 길목엔 백색 완장을 찬 자유당 사람들과 녹색 제복을 입은 반공청년당원들이 시민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으로서 당당하게 주권을 행사하러 가야 할 시민들이 공포에 떤 채 투표소로 향하는 현실이었다. 게다가 3인조로 묶어 투표를 하라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전 투표를 감행해 유권자의 4할에 해당하는 표를 이미 투표함에 넣어놓았다는 것이었다. 유권자들은 민주당사에 몰려와 “빼앗긴 내 표를 달라”며 아우성이었다. 오전 10시 30분 경, 우리 민주당 마산시당은 선거포기를 선언하고 부통령선거대책위위원장 민영학의 집에서 데모를 준비했다.자유당에 대한 반발심은 범국민적인 정서였다.

실업률이 35%에 치닫고 물가도 걷잡을 수 없이 올라 생활고에 시달리던 국민들이 이승만 정권에 반항했던 것이다. 국가를 되살리는 데는 관심 없고 오직 정권연장에만 혈안이 됐던 이승만 정권에 실망한 국민들은 우리 민주당으로 마음을 바꿔왔다.

4년 전 정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후보였던 신익희 씨가 선거 유세기간 중 사망하는 바람에 이승만 대통령이 다시 집권하게 됐다.

그러나 부통령엔 민주당 장면 씨가 당선됐던 것을 봐도 범국민적인 정권교체 의지를 알 수 있었다.

2년 전 민의원 총선거에서 마산 시민들은 자유당에 대한 반감을 표명하기 위해 민주당 허윤수 의원에게 표를 줬다.

그러나 허 의원은 민주당을 배신하고 자유당에 입당했고, 배신감에 휩싸인 마산 시민들은 자유당에 격분했다.오후 1시 경부터 도의원 정남규 씨와 동아대 안종성 학생이 시민들에게 선거포기에 대해 설명하고, 정권에 저항할 것을 선포했다.

얼마 후 민주당 마산시당 앞에서부터 불종거리까지 시민 1200여 명과 학생 300여 명이 모였고, 우리는 지프차를 앞세워 가두시위를 하려 했다.무장경찰과 몽둥이를 손에 든 반공청년단원들은 군중들을 가차 없이 때려댔다.

여린 학생의 머리를, 힘없는 노인의 가슴을,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의 주먹을. 민중들의 마음에도 피가 흘렀다.그런 못된 꼴을 당하고도 시민들은 다시금 일어났다. 나 역시 민중들의 열기에 벅차올랐다. 수

백 명의 시민들이 남성동파출소를 포위해 돌을 던지며 소리쳤다. 사전 계획이나 지휘자 따윈 없었다. 그간 쌓였던 분노가 폭발한 것이었다.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고, 위협사격을 가했다. 시민들의 공격에 소방차가 전봇대를 들이받아 마산 일대가 정전이 됐는데 이때를 틈타 경찰들이 시민들을 향해 발포했다. 순식간에 사상자가 생겼다.

마산 전체를 누비던 시민들이 참혹히 죽어갔다. 나를 비롯한 다른 당원들은 이 사태를 듣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반공청년당원과 경찰들은 민주당 간부들과 시민들을 끌고 가 잔인하게 고문하며 배후조종자를 추궁했다. 정부는 간첩에 의해 일어난 데모라고 조작하기에 바빴다. 민주당 중앙본부조차 경찰의 폭력을 비판하긴 커녕 “국민은 법질서를 지키라”고 훈계나 하고 있는 실정이다.

경찰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나와 민주당의 현실이 나를 더 무기력하게 만들었다.시위는 점차 더 거세질 것이다. 이번 일은 국민을 우습게 본 정부의 업보다. 민주당원인 우리도 못한 일을 국민이 해냈다.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4·19 혁명의 중심에서 타오른 학생들의 함성

부패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 혁명은 시작부터 끝까지 학생들의 힘으로 이뤄낸 혁명이었다. 3.15 선거를 앞두고 있던 자유당 정권은 야당세가 강하던 대구 지역에서 민주당이 지지세력을 모으지 못하도록 민주당 유세당일인 2월 28일(일요일), 학교 일선에 학생들을 등교시키도록 지시했다. 이에 반발한 대구 각 지역의 고등학생 수백여 명은 가두시위에 나서는 등 자유당의 횡포에 저항했다. 경북고등학교의 선언문에는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라는 내용이 담겼다.

3.15 부정선거에 항거했던 마산의거의 주역 역시 중고등학생들이었다. 자유당 정권은 야당 참관인들을 퇴장시킨 채 공개적인 부정투표를 자행했고, 민주당 간부 30여 명은 마산 시내에서 의거를 감행했다. 수천 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그 뒤를 따랐고 오후 7시 경에는 만여 명이 모여 “부정선거를 즉시 정지하라!”라고 외치며 시청으로 행진했다. 경찰은 의거행렬에 총격을 가했고, 최루탄까지 발사했다. 그 결과 8명이 사망하고, 80여 명의 중상자가 발생했다. 이때 행방불명된 김주열의 시체가 4월 11일 중앙동 해안에서 발견되며 마산은 들끓어 올랐고, 제2차 마산의거에서는 “살인범을 잡아내라!”, “선거 다시 하라! 등의 구호가 울려 퍼졌다.

경무대로 행진하고 있는 시위행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마산의거의 배후로 공산당을 지목하고 부정선거와 시민들의 사상에 대해 어떠한 사과도 하지 않은 이승만의 행태는 결국 대학생들이 혁명의 주체로 등장하는 계기가 됐다. 서울대 학생들은 문리대 학생들의 주도 아래 4월 21일을 시위일자로 정하고, 15일부터 의견을 모아 선언문과 격문, 구호 등을 작성하는 등 준비모임을 가졌다. 그러나 고려대 학생들이 18일 오후 1시에 시위를 감행했고, 이에 맞춰 전체 시위 날짜도 19일로 앞당겨졌다. 19일 아침부터 자유당 정권에 분노해 쏟아져 나온 인파가 거리에 가득 한 상황에서 서울대 학생들이 대오를 갖춰 국회의사당까지 평화행진을 한다는 계획은 무의미했다. 문리대를 비롯해 공대와 미대 등 각 단과대의 학생들은 조직적으로 또는 개별적으로 시위에 나섰다. 자유를 갈망하는 목소리가 드높았고 분노로 들끓었던 4월 19일의 서울 거리는 결국 수백 명의 피로 뒤덮였고, 그 피는 자유당 정권을 역사의 뒤안길로 밀어냈다.

“모든 허위를 버리자!”, 청년들의 고뇌와 열정

4·19 청년 열사들의 흔적은 57년의 세월이 지나 옅어졌지만, 그들은 여전히 누군가의 기억에 남아 맑은 숨을 쉬고 있었다. 희생된 6명의 열사 중 ‘4·19혁명희생자 유족회’를 통해 故박동훈, 故손중근, 故안승준 열사의 유족 및 친지와 연락이 닿았다. 남겨진 이들의 가슴에서 걸어 나온 세 명의 열사는 불의에 분노하고, 미래를 고민하던 청년들이었다.

박동훈 열사의 동생 박동수 씨는 스무 살 나이에 세상을 등진 형님을 강직하고 속 깊은 ‘어른’으로 기억했다. 교사의 박봉으로 힘겹게 7남매를 키우던 집안에서 혼자 힘으로 법대에 진학한 박동훈 열사는 가족 전체의 자랑이었다.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불의에 민감했던 열사는 경복고 3학년 재학시절 학생들을 불성실하게 지도하던 담임을 교체해달라고 청원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경복고 교감으로 재직하던 열사의 아버지는 교장실에 불려가 “(박동훈 열사가) 빨갱이니까 집에 데려가라”라는 말을 들었다. 그렇게 강단 있던 박동훈 열사는 1960년 4월에 입학한 후, 보름 남짓 대학생으로 살다가 영원히 잠들었다.

서울시청 앞으로 군중이 모이고 있다. ⓒ4·19혁명기념도서관

박동수 씨는 4월 19일 자정이 넘어 들린 어머니의 울음소리로 형의 죽음을 알았다. 열사의 아버지가 오후 4시경 서북시립병원 응급실에서 연락을 받을 때까지, 가족 누구도 열사가 18일 고대생 시위에 동참했고 19일에도 광장으로 향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당시 전염병 전문병원이던 서북시립병원은 적당한 처치를 하지 못했고, 수도의과병원(현 고려대병원)으로 옮겨 응급처치를 했다. 그러나 수도의과병원에서는 수술 능력이 없다며 집도를 거부했다. 결국 8시가 넘어 국립의료원에서 수술을 받았지만, 이미 피를 많이 흘린 박동훈 열사는 숨을 거뒀다.

열사의 죽음은 가족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였다. 애주가이던 열사의 아버지는 4·19 혁명이 일어나기 2년 전, 7남매 걱정에 금주를 결심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이 남긴 공허함을 술로 달래려 했는지, 4·19 혁명 1주기가 되던 날 망우리 공원묘지에서 통곡을 하고 돌아온 저녁부터 다시 술을 마셨다. 4·19 당시 15살이던 박동수 씨는 때때로 밥상에서 형의 밥그릇 하나가 없는 걸 볼 때 허전함을 느꼈다. 박 씨는 그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에, 유신통치와 80년대 군사정권을 겪으며 ‘형은 바보야. 왜 죽었어. 뭐가 달라지냔 말이지’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했다.

자유당 정권이 쏜 총탄은 막둥이를 천금같이 아끼던 형의 가슴에도 상흔을 남겼다. 손중근 열사는 어머니가 마흔이 넘어 낳은, 5형제 중 막내였다. 열사보다 다섯 살 위인 형 손중서 씨는 동생이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공부하기를 좋아해 밥상에서도 책을 놓지 않았다고 말했다. 손 씨는 1957년 온 가족이 라디오 앞에 모여 서울대 합격자 발표를 들을 때, ‘손중근’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모두가 침묵했다고 기억했다. 대전에서 농사를 짓던 가난한 집안에서 등록금과 수업료를 마련할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결국 부모님은 논 세 마지기를 팔아 아들을 대학에 보냈다.

사범대 국어교육과에 진학한 손중근 열사는 불의에 물러서지 않는 문학청년이었다. 열사의 형수이자 손중서 씨의 배우자인 김자순 씨는 3.15 부정선거 당시 손중근 열사를 회고했다. 김 씨는 “우리 시동생이 한 표 찍겠다고 동사무소를 가니까 명부에 이름이 없어. 그래서 ‘내가 대전 사람이라 투표하러 왔는데 왜 없냐’ 항의했는데 투표를 못했지. 투표 못한 동네 사람들 있는지 다 조사하고 다녔어. 그리고 서울로 올라간 거야”라고 기억했다. 손 열사가 남긴 1958년 2월 26일자 일기에는 “모든 허위를 버리자! 백지로 돌아가자! 나를 불태우자. 백지. 그 위에 주춧돌부터 쌓아야 한다”라고 적혀 있다.

4월 19일, 공군 대위였던 손중서 씨는 대방동 공군회관에서 교육을 받던 중 손중근 열사의 친구인 신철수 씨에게 연락을 받았다. 손 씨는 “경복궁에서 경무대로 가는데 경찰이 앞에서 막고 총을 쏘더래. 등허리에 맞은 총알이 가슴에 구멍을 뚫고 나갔어. 그 자리에서 ‘철수야, 살려줘’, 그러고 죽었대. 서로 떠밀고 쓰러지고 해서 시체도 못 찾을 뻔했는데 철수가 등에 업고 병원에 갔지”라고 전해들은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김자순 씨는 “성격은 명랑했지. 아버지는 일 못하게 자기가 소 끌고 나가서 풀 먹이고, 풀베고. 아주 참 효자였어. 이 양반은 봉안소 가면 아직도 울어, 가슴으로 울어”라고 말했다.

손중근 열사의 친구들이 열사가 생전에 썼던 일기, 편지, 시, 소설 등을 모아 펴낸 유고집

안승준 열사와 4·19 혁명의 현장에 함께 있었던 허국광 씨는 그날을 고통스럽게 기억했다. 허 씨는 안승준 열사와 서울중, 서울고 동창인 가장 친한 친구였고, 고려대 법대로 진학한 이후에도 자주 어울렸다. 두 친구는 고등고시를 보기 위해 평택에 있는 운수암에서 같이 공부하기도 했다. 시험을 접수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때가 1960년 4월이었다. 허국광 씨는 지금은 좀 무뎌졌지만 4·19 혁명 이후 절에 돌아와 짐을 정리하던 때처럼 매 순간순간이 가슴 아팠다고 말했다. 결국 허 씨는 도저히 공부를 할 수 없었고, 시험을 포기했다.

허국광 씨는 안승준 열사를 “내성적이지만 마음이 깨끗하고 곧은 사람”이었다고 기억했다. 허 씨는 안 열사가 평소 신문을 많이 읽었고, 특히 3.15 부정선거와 김주열 군의 사망사건에 분노했다고 말했다. 두 친구는 시험을 준비하던 시기임에도 4월 18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있었던 고대생 시위에 동참했고, 19일에는 서대문에 살던 안승준 열사가 아침 8시부터 마포종점에 있던 허국광 씨의 집에 찾아와 데모를 가자고 제안했다. 허 씨의 출발이 늦어지자 안 열사는 먼저 출발했고, 둘은 나중에 광화문에서 합류했다. 그러나 총탄과 비명이 난무하는 아비규환 속에서 두 친구는 헤어졌고, 허국광 씨가 안 열사를 다시 만난 곳은 서울대병원 영안실이었다. 안 열사는 머리와 가슴에 관통상을 입은 채였다.

1960년과 2017년, 민주주의의 길

남겨진 자들은 4·19 혁명이 실패한 혁명이라는 일부의 평가를 비판하며 4·19 혁명은 학생의 힘으로 정권을 무너뜨린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박동수 씨는 “당시 정보가 차단된 폐쇄사회에서 위정자가 민중을 억압할 때, 학생들은 양식이 있었다. 전혀 조직되지 않은 상황에서 순수한 분노가 터져 나왔다”라고 평가했다. 허국광 씨 역시 “(학생들이)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투철하게 실천했는데 뭐가 실패냐. 정치에 욕심이 있었다면 (이승만이 물러난 후에도) 학생들이 주도했겠지만 순수하다보니 그러지 않았다”라고 주장했다.

문리과대학이 4.19 정신을 간직하고자 1961년 4월 19일 건립한 4.19 학생혁명기념탑

4·19 혁명과 희생자 유족들을 대하는 그 동안의 정부의 태도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김자순 씨는 “정부에서 4·19 혁명 기념식에 초청받은 지가 5년 됐다. 그동안 희생자의 직계 비속은 안 되고 존속만 유족으로 인정됐다”라고 서러움을 토로했다. 또 김 씨는 “4·19 혁명을 의거라고 할 때도 참 속상하더라. 김영삼 대통령이 4·19를 혁명이라고 해준 것만도 고맙다”라고 말했다. 4.19가 ‘정의를 위해 도모한 일’에 그치지 않고 자유당 정권의 악습과 잘못된 사회구조를 뒤집은 역사적 사건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허국광 씨 역시 “(군사정권에서는) 4·19를 추모하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라고 비판했다. 헌법전문에 4·19 정신이 건국이념으로 명시되기까지, 의거가 아닌 혁명으로 불리기까지, 유족들이 마땅한 대우를 받기까지 험난한 과정이 있었던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을 증명하듯 시민의 힘으로 다시 부패권력을 몰아낸 2017년, 민주주의의 씨앗을 처음 뿌린 4·19 혁명의 정신과 군사정권 아래에서 죽어간 열사들의 넋을 어떻게 기리고 이어갈 것인가 고민해야할 시점이다.

4.19 정신을 간직하고자 1961년 4월 19일 건립한 4.19 학생혁명기념탑

“보라! 현실의 뒷골목에서 용기 없는 자학을 되씹는 자까지 우리의 대열을 따른다. 나가자! 자유의 비밀은 용기일 뿐이다. 우리의 대열은 이성과 양심과 평화, 그리고 자유에의 열렬한 사랑의 대열이다. 모든 법은 우리를 보장한다.” (문리대 학생회‘4월 혁명 제1선언문’ 중(中))

유병수 기자 ybj6998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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