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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사람의 문학] 창간 25주년 기념 세미나 개최

기사승인 2019.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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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는 유신군부독재 박정희 18년, 전두환 7년, 노태우 5년 총 30년 철권정권의 출생지역 고담의 도시다. 그런 이유로 1994년 봄 창간호 제1권 제1호 [사람의 문학]을 창간 25주년은 더욱 의미가 깊다

[뉴스프리존,대구=문해청 기자] 대구지역 계간문예지 [사람의 문학] 대표 (정대호 시인, ‘이육사애국시인 대구기념사업회’ 상임대표)는 1994년 봄 창간호 계간문예지 제1권 제1호 [사람의 문학] 발간 25주년을 맞아 27일 수성아트피아 알토홀에서 25주년 기념세미나를 개최했다.

1994년 봄 창간호 계간문예지 제1권 제1호 [사람의 문학]은 “1990년대 한국문학과 현실인식”을 주제로 <비평> 1990년대 현실 변화와 문학비평의 방향 – 이주형 <시>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 – 정대호 <희곡> 긴장의 시대와 연극, 그리고 그 지형도 – 김재석

<시> 이태수 시인, 김윤현 시인, 김종인 시인, 배창환 시인, 이중기 시인, 김상현 시인, 변준석 시인, 육봉수 시인, 노태맹 시인, 윤석홍 시인, 문해청 시인, 김현옥 시인

<소설> 교수열전(1) - 민현기, <소설> 감나무야 – 박치대 / 김수영의 김춘수에 대한 의심 – 박원식 / 사적 체험의 가벼움과 실험성 부재 – 신재기 / 재현 된 과거 삶의 가치 – 김일영 / 문화마당. 청년 학생의 글. / 문단소식 등을 1994년 봄호에 실었다.

문화토크 좌로부터 박관서 정대호 구모룡 정지창 / 사진 = 문해청 기자

1994년 봄 창간호 계간문예지 제1권 제1호 [사람의 문학]을 창간을 준비했던 지역문단의 문인은 과거 전두환, 노태우 군부독재정권시기 1984년 이후 ‘분단시대동인’으로 활동했던 시인, 참 언론 사수와 탄압에 맞섰던 해직기자, 참교육 사수에 앞장섰던 전교조 선생님, 민주노조운동에 참여했던 노동자 등이 민족작가회의를 만들었다.

이 당시 대구지역시민사회운동과 변혁적 전선운동에 참여한 동지로서 실천적 리얼리즘을 신념으로 실천했던 현장작가도 많았다. 그러나 [사람의 문학]이 25주년 되는 지금은 문우로 동지로서 사별한 분도 더러 있다.

지난 날 자신의 안일에 의연한 이타심으로 경북일보 노동조합에 연류 되어 탄압을 받았던 민족작가회의대구지회 사무국장 김용락 시인은 [사람의 문학] 주간을 맡았고 (도서출판 사람)을 통해 헌신적 인간사랑, 삶의 문학운동, 지역문화 분권운동, 민족예술총연합(약칭 민예총)활동에 열정과 정열을 불태웠다.

또한 1994년 봄 창간호 [사람의 문학]에 필자(기자)의 시(詩)가 실린 것과 과거 노조위원장출마 등으로 그 해 4월 해고되었고 상신브레이크노동조합 간부로 총파업 중 필자(기자)가 7월 긴급구속 되었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한 영화필름 같다.

이때 민족작가회의대구지회 사무국장 김용락 시인은 지역 선후배 문인에게 민주노조운동으로 구속 된 노동자(필자)에게 응원하고 지지할 것을 호소하여 대구교도소에 영치금을 전달하는 정의로운 의리와 노동의 가치를 지켰던 기억이 난다.

1994년 봄 창간호 제1권 제1호 [사람의 문학]을 통한 과거의 기억은 맑은 영혼이 신비로운 생명을 잉태한 산모의 삶처럼 비록 고통과 고난의 시련처럼 단순하지 않고 구구절절 다사다난한 사연이 많다.

김윤현 시인

대구지역 계간문예지 [사람의 문학] 창간 25주년 기념 세미나 <식순> 첫 순서로 기념시를 낭송한 김윤현 시인을 소개한다. 참교육운동에 참여한 김윤현 시인은 1984년 <분단시대>로 작품 활동했다. 시집은 <발에 차이는 돌도 경전이다> <들꽃을 엿듣다> <지동설>외 다수가 있다.

다음은 김윤현 시인의 [사람의 문학] 창간 25주년 기념시 [그대여, 맨몸으로 오라] 시낭송 전문이다.

[그대여, 맨몸으로 오라] // 김윤현 // 남녘의 그대여, 맨몸으로 오라 / 북녘의 그대여, 발가숭이로 오라 / 가진 것 다 허물고 발가숭이 맨몸으로 오라 / 그리하여 우리 다시 만나자 //

내 것, 네 것 다 보따리처럼 내려놓고 / 만나서 그려보자, 우리 영원히 살 곳 한반도에서 / 자식들이 서로 얼싸안고 축구라도 한판하며 함께 땀 흘릴 / 손주들이 고사리 손 서로 잡고 소풍이라도 갈 / 그림을 그려보자 / 어른들은 평양에서 점심을 랭면으로 먹고 / 서울에서는 저녁으로 설렁탕 건네며 //

목청껏 아리랑을 불러 볼 그림을 그려보자 / 그렇지, 숨겨놓은 쇠붙이부터 내려놓고 / 권력도 지위도 명예도 헌옷처럼 풀어 헤치고 / 맨몸으로 만나자 / 만날 때 그릴 / 그림의 색깔을 미리 정하지 말고 / 밑그림도 미리 그려 오지 말자 / 지난날의 어두웠던 그림자를 제쳐두고 / 우리 따듯한 손을 잡고 백지에 같이 그려보자 //

우리의 평화를 / 우리의 희망을 / 우리의 미래를 / 퍼즐처럼 맞추면서 그림을 그려보자 / 누천 년 유유히 흘렀던 대동강처럼 맑고 / 단군 이래로 부단히 흐르고 있는 한강처럼 영원할 / 학처럼 단정하고 무명저고리처럼 때 묻지 않을 / 우리, 우리의 꿈을 그려보자 //

휴전에서 종전으로 이어질 / 종전에서 평화로 빛날 그림을 / 멀지 않아 낡아질 화폭에다 그리지 말고 / 우리 남북, 우리 북남 하나의 반도 크나 큰 반도 한반도가 다시 세계 평화의 시발이 될 평화의 꽃그림을 우리의 가슴 가슴마다에 그려보자 / 그리하여 다시는 사그라들지 않을 평화, 그 먼동을 틔우자 //

우리 힘차게 틔워보자 / 그리고 나서 남녘의 그대여, 북녘의 그대여 / 다시 맨몸으로 만나자 / 만나서 따스한 봄날을 마음껏 누려 보자, 그대 우리 //

발행인 정대호 시인 / 사진 = 문해청 기자

다음은 정대호 시인의 인사말 [창간 25주년을 돌아보며] 전문이다.

창간 25주년을 돌아보며 세월이 참 빠르다. 1993년 가을이었다. 『분단시대』동인이었던 정만진 선생의 제의에 의해 대구․경북의 분단시대 동인들이 중심이 되어 이 지역의 순수문예지를 하나 하자고 하여『사람의문학』을 함께 시작한 것이 어느새 25년이 넘었다.

그때 서른다섯의 청년은 어느새 환갑을 지난 나이가 되었다. 그때 창간사를 쓴 것이 어제 같은데 사람의 나이로 치면 혈기 왕성한 청년의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문예지의 나이로 치면 신선함을 잃어버린 늙은 잡지가 되었다.

첫 시작을 할 때 우려의 목소리가 많았다. 그러나 그때 대구에서 나오는 시 전문지인『시와 반시』는 신선한 자극제가 되었다. 대구․경북은 오랫동안 김춘수, 신동집 시인의 영향으로 순수문학의 본거지로 굳어 있었다. 거기에 『시와 반시』의 창간은 그러한 경향을 더욱 강하게 하는 측면이 있었다.

이 잡지의 창간사를 보면 그 이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표현기법을 중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잡지의 내용도 그 쪽으로 많이 기울어 있었다. 이것은 이 지역의 문학판을 더욱 왜곡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지금까지 25년의 세월을 견뎌오면서 여러 번의 어려움을 겪었다.

그때마다 『시와 반시』의 존재는 『사람의 문학』이 계속 나와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보이지는 않지만 서로를 의식하면서 한 호식 내었다. 그러다가 보니 어느덧 지금의 세월에 이른 것이다.

우리 잡지는 대구․경북에 뿌리를 둔 지역문예지다. 처음 창간할 때에는 우리 지역의 필자들만으로 잡지를 꾸리려고 했다. 당시 우리 지역에 있는 대학들에 재직하고 있는 인문학의 교수들과 대학원을 나온 인재들, 그리고 문인들의 수를 고려하면 충분히 필자들을 꾸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몇 년 동안 책을 내면서 원고를 구하는데 한계를 느꼈다. 그 첫 번째 이유가 대학교수들이 순수학술지가 아닌 잡지에 쓴 글들은 연구실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연구실적 채우기를 중시하는 교수들이 글을 쓰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필진을 가동하는데 한계를 느꼈다.

그래서 몇 년 만에 필진의 지역제한을 하지 않기로 했다. 1998년 아이엠에프를 맞으면서 자금 수급에 문제가 발생했다. 잡지의 출간동력을 다시 추스르기 위해 과감한 구조개편을 단행했다. 박병규에게 잡지의 편집을 부탁하고 출판사 운영을 맡겼다. 창간호부터 발행인으로 되어있던 제 아내 윤희옥 대신 제가 발행인이 되었다.

그러다가 2004년 말 제가 일신학원에서 구조조정 대상이 되어서 실직의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2005년부터 5년간 김용락 시인이 발행인을 했다. 우리 잡지는 처음부터 우리나라의 문학판을 선도하여 세간의 이목을 끌려고 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잡지를 통해 세속의 이익을 챙기기 위한 돈벌이의 목적으로 상업성을 추구한 것도 아니다. 우리들은 이 지역의 문학하는 사람들이 살아왔던 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 살아갈 이야기들을 하는 것들을 여러 가지 장르의 형태로 글을 써서 발표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 이 잡지를 만들었다.

어릴 적 우리 할머니는 할머니가 거처하시는 안방에 겨울밤이면 동네 안노인들을 불러 모아 밤늦게까지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하셨다. 할머니의 많은 손자들 가운데 시골에는 내 혼자 있었기 때문에 나는 할머니의 요위에서 할머니의 품에 안겨 함께 잠을 잤다.

나는 그 안방에서 밤늦도록 그 이야기들을 듣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겨울밤이면 동네 안노인들이 서산에 해가 지기 전에 저녁밥을 해 먹고 우리 집 안방으로 모여들었다. 동네에 딸네 집에 놀러온 안사돈들이 있으면 할머니는 당신의 손녀를 시켜서 긴 겨울밤에 무료하니 놀러오라고 불렀다.

초롱이나 호야를 들고 할머니들이 모여들었다. 해질 무렵부터 밤늦도록 우리 집 안방은 할머니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었다. 첫 시집살이의 어려움부터 아들, 딸들을 키울 때의 이야기, 그 중에 간혹 먼저 간 가식들로 인한 아품, 시부모들의 사랑을 받은 이야기 등, 이것도 무료하면 목소리 좋은 할머니들 내방가사 읽기,

감동적인 내용의 사돈지 읽기, 한글 제문 읽기, 고전소설 읽기 등, 그러면 그것을 듣는 사람들은 제미 있는 곳에 가서는 감동도 하고 맞장구도 치고 때로는 비난의 욕을 하기도 한다.

나이가 든 노인들이라 과거의 아픔도 슬픔도 괴로움도 기쁨도 감정이 걸러진 잔잔한 이야기로 이제는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담담히 나누는 것이었다. 그 안방이 바로 요즘으로 보면 문화의 향수 공간이었다.

우리 할머니는 여기서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다녀보지 않고도 이웃동네에 일어났던 일들을 아시었고 나아가 누구 집 자식들이 몇이고 어디 가서 무엇을 하고 사는지를 다 알았다. 밤이 깊으면 백모님이 간식을 준비해 주셨다.

우리 『사람의 문학』은 바로 이 지역에서 어릴 적 할머니의 그 안방과 같은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으로 제 역할을 다한다고 할 수 있다.

1994년 봄 창간호 제1권 제1호 사람의 문학 / 사진 = 문해청 기자

우리 잡지는 종합문예지이다. 시와 소설을 중심으로 다양한 장르의 모든 글을 수용한다. 그 내용이 수필적이든 사실의 기록이든 지난 기록의 발견이든 굳이 배척하지 않는다. 이 지역에서 이런 글들을 좀 실어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 있으면 굳이 글의 형식이 어떤 것이든 가리지 않는다.

문자로 기록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면 그런 글들을 싣고 싶다. 우리 『사람의 문학』은 문학 판의 화제가 되어 남의 눈총을 받는 잡지가 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우리 『사람의 문학』은 대구․경북 판에 이런 잡지가 꼭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눈을 두리번거리고 찾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이 보고 반길 수 있는 잡지였으면 좋겠다.

바로 문화의 안방이나 사랑방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 잡지는 한두 명의 명망가를 위한 잡지가 아니다. 그런 사람들을 만들어내고 싶지도 않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의 이야기나 궁금했던 숨겨진 이야기들이 누구나의 목소리로 말할 수 있는 것이면 좋겠다.

시간의 긴 안목으로 보면 바로 이것이 지역의 구체적 이야기들이다. 구체적 일들의 기록들이다. 이러한 것들이 축적되면 문화의 생동감이 살아난다. 이것이 오히려 우리문학의 중심적 과제들을 발굴해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근대사를 보면 비도덕적 정권들이 권력을 유지해 온 것들이 대다수였다. 일제 강점의 41년, 해방 후 강대국들의 점령 하에 남북분단, 꼭두각시 정부의 수립, 그로인한 비도덕적 정부와 양심적인 인사들의 갈등. 이런 구조가 20세기의 벽두부터 지금까지 거의 이어지고 있었다.

꼭두각시 권력이 머리 위의 지배구조에 아첨하기 위해서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우려야 하고 그의 이익을 챙겨주기 위해서는 국민들을 탄압하는 독재를 해야 했다. 이는 필연적으로 민과 관이 갈등을 빚는 구조가 된다.

이 과정에 역사는 지배구조의 입맛에 맞게 선택되어 유구한 민족사의 편에서 보면 심각하게 왜곡되는 과정을 겪어왔다. 우리의 문학 판은 이러한 현실에서 사실을 제대로 이야기하면 저항이라고 하고 이것을 문자로 남기면 진보적 문학이라고 말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제는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좀 더 정화되었으면 좋겠다. 이제 우리들의 이야기를 터놓고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보안법이니 반공이니 적이니 이런 말들을 하지 않고 우리들이 살아오면서 안고 고민했던 이야기들을 터놓고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것은 누구를 비난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누구를 억압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우리들의 더 나은 미래를 열어가는 바탕이 되는 이야기였으면 좋겠다. 나의 경험이 축적되고 너의 경험이 축적되어 따뜻한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다면 좋겠다. 우리 『사람의 문학』은 바로 이러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문화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날 『사람의 문학』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잡지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의 덕분이다. 음으로 양으로 적은 액수이지만 후원을 해 주신 모든 분들과 원고를 기꺼이 써 주신 분들이 계셨기에 25년이란 긴 시간을 견뎌 온 것이다.

그리고 같이 잡지를 만든 편집위원들을 비롯한 편집진들의 온갖 노고가 오늘의 우리 잡지를 만든 것이다. 끝으로, 넉넉하지 않는 수입에도, 긴 시간 동안 잡지를 만든다고 간섭 한 번 하지 않은 아내가 고맙다.

어릴 적부터 어머님은 늘 내게 말씀하셨다. 남자가 집 쌀독에 쌀이 떨어져도 밖에 나가 궁상을 떨지 말아야 한다고. 어머니의 이 말씀은 살아오면서 늘 내 귀에 들렸다.

이번호에는 지역문학의 현황이라는 내용으로 창간 25주년 기념 특집으로 잡았다. 우리 잡지가 지역잡지이기 때문이다. 구모룡 평론가를 비롯하여 기꺼이 원고를 써주신 분들께 감사한다.

시월문학회 회원인 이정연 시인이 강창덕 선생님의 시월항쟁에 대한 회고 좌담을 정리해 준 것과 서분숙 기록문학작가가 대구지하철 사고 유족의 회고를 정리해 준 것도 고맙다. 모두 귀중한 자료의 정리다.

[사람의 문학] 편집위원을 소개한다.(존칭생략) 역대는 정만진, 김종인, 신재기, 류인서, 권오현, 김사람, 김인기, 김윤곤, 박선주, 최창윤, 김봉석이다. 현재는 김용락, 김윤현, 김은령, 류덕제, 박경조, 배창환, 신기훈, 이해리, 윤일현이다.

다음은 이하석 시인의 [사람의 문학] 축하 인사말이다. [사람의 문학]이 100호를 채우지 못한 것은 결오가 생긴 것 같다. 결오라는 것은 그동안의 ‘고통’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 지역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공간이다. 닫혀있지 않고 열려있는 그런 공간이다.

사람의 문학이 자연스럽게 모이고 자연스럽게 욕망을 꿈꾸는 그런 소통의 자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 어려움 앞에서 여려 난감한 일이 많이 있었을 텐데 그런 의미에서 박수를 쳐주고 싶다. 강창덕 고문님의 10월 항쟁이라던가 지하철 화재 등을 안고 정대호 시인과 김용락 시인이 정말 어려웠다.

아마 그 때 가장 어려운 시기가 아닌가 한다. 앞으로 100호를 맞는 시기까지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다음은 박방희 시인이 [사람의 문학] 25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참으로 어려운 여정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어쩌면 영광스러운 훈장 같은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사람의 문학]이 진정한 인간의 문학으로 발전하고 대구의 위대한 정신과 문학을 일깨워가는 사람의 문학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진심으로 축하한다.

다음은 윤일현 시인의 축사이다. 저의 정체성이 [사람의 문학]과 일치하는 면이 많다. 제가 포항제절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시를 쓰면서 “낙동강이라는 시집을 냈는데 그 때 대구에서 하루에 200권씩 팔렸다.

저는 생업에 열중하고 사는 것이 바쁘다 보니 1998년 12월 현대문학에서 ”낙동강“시를 다시 발표하고 [사람의 문학]과 [현대문학]을 교대로 사용하게 되었다.

네 번째 시집을 낼 때 서울 유명한 출판사에서 시집을 내려고 했는데 지역 출판사에서 시집을 내주겠다고 하여 고민하다 지역출판사에서 시집을 내었다. 지금까지 [사람의 문학]을 지켜오느라 수고 많았다. 진심으로 축하한다

다음은 [재]대구문화재단 대표 박영석 시인의 축사이다. 먼저 [사람의 문학] 정대호 발행인은 말도 많지 않고 침묵하면서 오랜 시간 동안 잘 지켜왔구나 정말 미안한 마음이 든다. 샛강이나 냇가가 강이 되기는 어렵다 [사람의 문학] 25주년 동안 잘 지켜온 사람의 문학은 ‘강’이 되었다.

저의 친구가 대구는 시인이 우글거리는 도시이다. 라고 말했다. 대구는 자존심 넘치는 문인의 도시이고 대단한 도시다. [사람의 문학] 25주년 동안 이어온 관계자분들 정말 수고 많았다고 축하 인사를 했다.

김용락 시인 / 사진 = 문해청 기자

다음은 [그 시절 이야기] 순서이다. 공공비영리법인 한국국제교류문화재단진흥원 원장 김용락 시인은 [사람과 문학]이 만들어진 것은 처음 정대호 시인이 700만원을 냈다. 그리고 삼삼오오 모여서 조금씩 돈 모아 [사람의 문학]을 내게 되었다.

윤일현 시인이 수고가 많았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가장 많은 문인들을 배출했다. [사람의 문학] 출신인 김산 시인은 교과서에 실을 정도였고 유명한 시인을 배출하게 되었다. 이하석 시인이나 정지창 시인과 같은 훌륭한 선배 시인께서 많은 도움을 주셨다.

전국문학 잡지 가운데 [사람의 문학]이 우수 잡지로 선출되어서 많은 지원도 받게 되었다.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고 윤희오 여사님의 도움이 굉장히 컸다. [사람의 문학] 25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고 담담한 소회를 밝혔다.

다음은 [기조발제]를 통하여 구모룡 시인이 의견을 개진했다. [사람의 문학]이 ‘지역문화’하면 서울과 배척해 있는 것이 아닌가? 지역문화가 꾸준히 퇴보화 되어가는 것이 아닌가? 1980년대에는 지역문화가 활발하게 움직였다.

열악한 시대에 지역문화의 르네상스가 되었다. 그 때에 계간지가 부활하게 된다. 대구문학이 세계문학이 되려면 서울문학을 욕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고 우리문학을 제대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다음은 [문화토크] 패널로 참여한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정지창 시인이 축사를 했다. [사람의 문학]은 기존의 문단에 의식하지 않고 참신한 작가들을 포용하고 대구문화지역의 다양성을 기여했다.

[사람의 문학]의 출간은 지역적인 특성과 [사람의 문학]과의 관계는 공덕이 모이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2013년에 정년퇴직을 하게 되었다. 원고에 제한이 없고 필자로써 진심으로 고맙다.

다음은 [문화토크] 패널로 참여한 광주전남작가회의 전 지회장 박관서 시인의 [사람의 문학]에 대한 격려와 덕담이다. 저에게는 목포, 광주, 서울이라는 공간이 겹친다. 지역에서 문화행사 가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6년 전 광주전남작가회의 지회장을 맡을 때 ‘우리가 이 고장에서 겪었던 일들은 반드시 문학으로 정리해야 하고 이 일을 위한 문학적 주체가 존재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봤다.

남도문학의 정체성은 서구문학의 도입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옳은가? 정체성은 의리와 호국정신이다. 문학적 주체는 민족이고 민중이다. 문학은 울음이나 반점처럼 각 나라의 언어로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특성이 있어야 한다고 [사람의 문학] 앞날의 희망을 강단지게 제시했다.

이해리 시인과 고경하 시인 / 사진 = 문해청 기자

다음은 [사람의 문학] 편집위원이며 ‘이육사애국시인 대구기념사업회’ 집행위원장 이해리 시인과 시(詩)를 소개한다. 이해리 시인은1999년『사람의 문학』으로 등단했고 2003년 평사리문학대상 수상했다.

이해리 시인은 10년 이상 S문화센터에서 <이해리 시인의 시(詩)읽기> 문학 강의하는 강사선생님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은『철새는 그리움의 힘으로 날아간다』 『감잎에 쓰다』외 2권이 있다.

[낮달] // 이해리 // 희미하다 해서 / 엷어질 수 없는 사람아 / 곧 사라질 걸 안다 해서 / 지워질 수 없는 사람아 / 빛을 잃었기에 더 아련하게 / 그리운 사람아 / 어쩌다 돌아와 / 흰 이슬 가을바람 서성이는 / 내 방문 앞 추녀 끝에 / 창백한 얼굴로 떴다가 / 나도 안보고 가려 하는가 /

다음은 한국작가회의 대구경북지회(지회장 박승민) 산하 10월문학회 회원 이정연 시인의 10월 항쟁에 대한 강창덕 선생의 회고이다.

10월문학회 회원들은 제6회 10월문학제를 준비하기 위해 2018년 8월 9일 강창덕 선생님께 10월 항쟁에 대한 증언을 들었다.

강창덕 선생은 1927년 11월 30일 생으로 구한말 내각에 있다 합방 후 귀향한 아버지로부터 일제 침략행위와 만행에 대해 듣고, 백정인 친구 아버지가 형평사 운동에 참여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렸을 때부터 민족의식과 평등사상을 품고 자라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난한 가정 형편 때문에 소학교만 겨우 졸업을 하시고 머슴처럼 막일을 하며 해방을 맞을 때까지 조선건국동맹에 참여를 하셨다. 만주 독립군 활동과 3·1운동 이야기를 친구들한테 하고 다니다가 열일곱 살 때 처음 주재소 땅굴에 10일간 구류를 살기도 하셨다.

독학으로 공부를 해 1944년 11월 경북도청공무원 모집시험에 합격하고, 1945년 11월에 경산에서 대구에 있던 경북도청 농업경제과로 전근 발령을 받으셨다. 가정형편 때문에 중단했던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1946년 9월에 대구상업고등학교 야간부에 편입을 했다.

한 달 만에 10월항쟁이 일어난 것이다. 당시 열아홉(19세) 청년의 눈에 비친 10월항쟁의 모습이다.

1. 들별 강창덕 선생님이 기억하는 10월항쟁 나는 말할 거리가 넉넉하지는 않은데……. 10월 항쟁 발발 당시 대구역전의 모습은 지금과 많이 달랐어요.

강창덕 선생님은 대구역 옆에 있는 칠성동 들어가는 굴다리 길이 그때는 없었어요. 지금 롯데백화점 건물 있는 자리에 역사가 있었고 그 앞에 마당이 상당히 넓었어요. 대구역의 왼쪽 말하자면 서쪽에 대구공회당이 있었고, 오른쪽에 상공장려관 건물이 있었어요.

두 건물 다 빨간 벽돌로 지어졌어요. 상공장려관은 대구 상공인들을 위해 지은 건물이고 대구역사는 보잘 것 없었지만 그 옆에 대구공회당은 당시 대구에서 상당히 큰 건물이었어요. 중앙로는 폭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어요. 제 어릴 때는 ‘12칸 도로’라 했어요.

한 칸이 여섯 자이니 60자쯤 되는 모양인지 잘 모르겠어요. 서쪽에 10월항쟁 발생지 전평사무실 있던 곳은 지금 많이 확장됐지요. 예전에는 그렇게 안 넓었어요. 도로 오른편은 확장하느라 변화가 많이 생겼고 왼편은 10월항쟁 당시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어요.

나는 대구역전에서 중앙통 들어가는 바로 입구에서 10월 1일 사태를 조금 멀리서 봤어요. 우리 집은 영천 가는 방면에 있는 하양인데, 6년제인 대구상업중학교 야간부 2학년에 입학이 돼가지고 입학하자 얼마 안 돼서 10월 항쟁이 발발했어요.

어무이하고 여동생 남동생들은 하양에 있었고 나는 일제시대부터 있던 대구상업학교 먼지투성이 기숙사 방 한 칸에 기거하고 있었어요. 하양에 어무이를 보고 들어온 게 그날 밤 9시쯤 됐을 거라요.

강창덕 선생님을 소개하는 사회자 신기훈 시인 / 사진 = 문해청 기자

대구역전 광장으로 지나가지고 중앙통으로 나오니까 무장경찰관 한 사람이 있더라고요. 마침 하양소학교 선배 서모 씨였어요. “와 여 나와 있노?” 물으니 그날 밤에 이상한 사태가 발생할 거라고 상부의 명령을 받고 잠복근무 중이라고 하는 기라요. 공회당 쪽에도 또 경찰이 있어요.

총을 가진 경찰 서너 명이 벽에 기대 있어요. 전평 사무실에 출입을 잘 하지는 않았지만 어디쯤에 있는지는 알았는데 전평 앞을 보니 노동자들이 100여 명 있고 마음에 불길한 느낌이 들었어요. 전국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한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것 때문에 모여 있구나 싶었지만,

뭔가 불상사가 있지 않을까 예상을 하면서 집에 들어갔어요. 그 후에 얘기를 들어 보니 그날 밤에 노동자 2명이 총에 맞아 세상을 떴다 하대요. 그럼 경찰은 왜 발포를 했느냐? 뭐 경찰한테 대항한 게 있겠어요? 경찰이 노동자들을 포위하고 있으니 반감으로 누가 돌을 던졌는데 경찰이 발포를 해 버렸다 카대요.

그 쪼맨한 일을 가지고. 그것이 대구 노동자들이 10월항쟁에 참여하게 된 가장 원초적인 사태로 보고 있어요. 10월 2일날에 내가 직접 경험한 일이 있어요. 나는 대구상업학교 야간부 학생으로 낮에는 경북도청 농업경제과 내에 곡물 검사계 말직인 부검사원으로 근무하고 있었어요.

아침에 학생복 입고 출근을 해서 직장에서는 신사복으로 갈아입고 근무를 했어요. 내가 근무하는 농업경제과 건물이 경상감영공원 입구 쪽 2층 건물이었어요. 경상감영 자리에 있던 경북도청 부속건물인데 사무실 할 자리가 없어서 거기 농업경제과가 들어가 있었어요.

11시 가까이 됐는데, 데모하는 행진 같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 창문을 열고 내려다보니까 데모대가 지나가고 있었어요. 건너편에는 헌병대 건물이 있었고 도로는 지금과 폭이 같은데 사람들이 빡빡하게 들어차서 지나가며 “경찰은 무장해제하라, 무장해제하라”는 구호를 외쳐요.

보니까 네 사람이 메고 가는 들것이 있었는데 죽은 두 사람의 시신을 메고 대구경찰서 지금의 중부경찰서 앞쪽으로 가고 있어요. 일반시민들도 많이 따라가고 학생들의 모습도 보였는데 들것을 메고 구호를 가장 힘차게 외치는 분들이 대구의학전문학교, 지금의 경대 의대 학생들이었어요.

사람들이 계속 뒤따르더라고요. ‘어젯밤에 불길한 생각이 들었는데 저 시체가 어젯밤 경찰 총에 맞아 죽은 건가 보다’ 싶으면서 나도 따라가려고 근무복을 학생복으로 갈아입고 뛰어갔지요.

대구경찰서 정문 앞에 시신을 멘 사람들이 있고 군중이 언제 모였는지 경찰서 앞 사거리가 이쪽저쪽 다 100미터 이상씩 꽉꽉 들어차 있었어요. 그때가 11시 반쯤이었어요. 억울한 죽음을 당했구나 싶어 모자를 벗고 명복을 빌고 그 곁에 있었어요.

군중들은 계속 ‘경찰은 무장해제하라, 무장해제하라’ 그래요. 경찰 간부 신 모 경위란 사람이 나왔어요. (신 경위는 그 후에 ‘신 도사’라고 불린 이의 아버지인데, 신 도사는 경대 철학과 출신으로 해인사 가서 수도를 하고 도를 통했다며 대구에서 불교 비슷한 종교를 만들었어요.

어떤 환자라도 손만 대면 낫는다 카니 부산서 경주서 곳곳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어요. 신 도사는 나중에 대통령 선거에도 두 번이나 출마했어요.) 신 경위가 데모하는 사람들의 뜻을 다 안다 카면서 경찰 간부 모자를 땅에 막 던지는 그런 광경을 봤어요. 경찰 간부인데 별사람이 다 있구나 싶더라고요.

얘기를 들으니까 대구의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이 경찰서에 찾아가서 무장해제를 하라고 욕을 했다는 기라요. 그때는 미군정기라 경찰서에도 미군 고문관이 있었는데 민간인 서장하고 미군 고문관으로부터 무장해제하겠다는 언약을 받고 나왔다더라고요. 사람들이 목이 터져라 무장해제하라고 절규를 했어요.

서문로 쪽에 모인 사람들을 살펴보니 제일 열렬하게 데모하는 200여 명 정도의 조직된 군중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대구지방전매청 여공들이었어요. 그 여공들이 어깨인지 머리인지에 띠를 감고 연좌데모를 하더라고요.

일반 시민들은 여기 저기 구경삼아 나온 사람도 있고 진짜 데모 하러 나온 사람도 있고 사람들이 꽉 차 있었어요. 좀 있으니까 미군 장갑차가 나타나더라고요. 자세히 보니 완전 무장을 했어요.

장갑차 위에 미군은 철모를 쓰고 검은 안경을 끼고 높게 단 기관총을 붙잡고 있었어요. 기관총 앞 옆에는 기관포 실탄을 청어 엮어 놓은 것맨치로 해서 번쩍번쩍 하면서 슬슬 다가와요. 그러니 군중들이 피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그대로 앉아 있었다가는 장갑차에 깔릴 판이니까. 3대 정도 됐지 싶은데 장갑차가 오니 연좌데모를 하던 사람들도 다 피했지요. 미군이 기관포를 이리저리 흔들며 겁을 주고 해산하라고 그랬어요.

모두 다 불안하고 공포스러우니까 이리 흩어지고 저리 흩어졌어요. 시신도 도로 의학전문학교 부속 경북도립병원 시체실로 갔어요.

나도 근무처로 되돌아왔지요. 또 옷을 갈아입고 사무를 보는데 마음이 흥분돼 사무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여섯 시 돼가지고 학생복으로 갈아입고 학교로 갔어요. 도청 앞으로 가다보니 상당히 좋은 기와집 몇 채가 있었어요. 그 집 대문 앞에 물건들이 수북이 쟁여져 있어요.

일반 서민들은 도저히 구할 수도 없는 광목, 쌀, 설탕 같은 물자들이 길바닥에 나와 있더라고요.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그 집 주인이 악질 친일파라고 하는 기라요. 내가 보는 데서도 그 물건을 주워가는 사람도 있고 말리는 사람도 있어요. 워낙 식량난이 극심해 놓으니 쌀을 퍼가기도 하고 그랬어요.

가다 보니 봉산동 가까이쯤인데 또 어느 집 대문 밖에 온갖 것을 다 내놨어요. 가재도구는 별로 없고 곡식, 설탕, 옷감 이런 거라요. 한 사람이 두들겨 맞아가지고 앉아 있는데 얼굴에 피를 흘리면서 “살려주이소, 살려주이소.” 그러고 있어요.

왜 이러냐? 고 물으니 아주 악질이라고, 우리는 보지도 못할 물건을 저래 쌓아두고 호의호식하는 게 미워 죽겠다고 해요. 그런 두 장면을 보고 학교에 갔어요. 야간수업을 마치고 기숙사에 있으니 밤중에 총소리가 자꾸 나요. 총소리가 와 나노 싶어서 살짝 살짝 나가봤어요.

뒤로 나가면 대구상업학교 운동장인데 남쪽 편 울타리로 내다보면 길이 동서로 있어요. 그 앞에 일제시대 일본사람이 운영했던 가다꼬라 생사공장이 있어요. 누에한테 실 뽑는 생사공장 담이 100미터가 넘는데 양끝을 보니까 경찰관들이라요.

뭐 때문에 총을 쏘는지, 공포인지 실탄인지는 모르겠지만 대구시내에 소요사태가 있으니 진압 할라고 한밤중이지만 저래 발포를 하는구나 짐작하고 들어와서 자려고 누웠지요. 내 마음에 앞으로 사태가 우예 될라노? 불쾌하고 불안했어요.

다음 날인지 그 다음 날인지 한 이틀 정도는 대구가 경찰이 없는 공백상태였는데 다시 경찰이 많이 보여요. 그때는 도청 안에 경북경찰부가 있는데 경찰이 들랑거리는 걸 알아보니 충청도 쪽에서 응원 온 경찰이 대구 시내에 깔려서 데모를 진압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경기도 경찰도 치안을 회복한다고 무경찰 상태였던 대구에 온 거라요. 그때 흘러나온 얘기 중에는 10월 1일 밤에 피살된 노동자의 시신을 대구의학전문학교 법의학 교수가 진단을 했대요.

그 교수 이름이 김만달인데 경찰이 와서 노동자라 하지 말고 행려병사자라 발표해 주면 좋겠다고 했는데 김만달 교수가 부당한 요구이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실대로 증언을 했대요.

그 뒤에 학교에서 쫓겨났어요. 부인도 의사였는데 동문로 시청가는 골목 그 어디서 병원을 차리고 있었어요.

대구문학관 관장 이하석 시인 / 사진 = 문해청 기자

2. 10월항쟁 그 뒷이야기에 대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강창덕 선생님은 내 고향이 경산군 하양면인데 나중에 가서 얘기를 들어보니 하양경찰서 주재소에 근무하던 경찰들은 전부 도망가 버리고 당시 합법적으로 활동하던 조선민주청년동맹(민청)이 치안을 맡았다고 해요.

민청 위원장은 정문조라는 사람이었는데 일본 어느 대학 유학까지 하고 온 부잣집 아들이라요. 그 사람이 말하자면 지서장이 돼서 사흘 지서장을 했대요. 민청이 치안을 담당하다가 충청도 경찰들이 와서 쫓아냈어요. 그 다음부터는 막 잡아가는 기라요.

그때 그 사람들 말이 ‘10·1폭동’이라 캤지요. 10·1폭동 사건에 가담한 사람들은 여러 사람이 잡혀갔어요. 알고 보니 경북 도내 각 농촌에 전부 항쟁이 벌어졌어요. “대구 경찰들이 무장해제하고 시민이 승리했다”,

“세상이 바뀌었다”는 소리가 들리니 농민들이 들불처럼 나와서 항쟁을 하는데 표적은 경찰과 악질 면서기였어요. 농민들은 대구시민들하고 항쟁의 내용이 좀 달랐어요. 대구는 미군정이 식량정책을 실패해서 굶어죽을 정도였어요.

부녀자들이 시청에 가서 식량을 내놓으라고 아우성이었지요. 또 전염병 호열자 때문에 대구로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것이 차단됐어요. 대구시민들은 미군정의 식량 정책에 대한 불만이 하늘을 찔러서 10월 1일날 그 많은 사람들이 항쟁에 참여를 한 거예요.

농촌 지역은 경찰서를 습격해 서장의 생명을 뺏고 경찰서를 불태웠어요. 농민들의 불만은 식량공출 문제라요. 일제시대 조선 농민들의 피땀을 긁어가는 식량공출을 해방이 됐는데도 여전히 경찰과 면직원들이 나와 가지고 해대니 불만이 아주 컸단 말이에요. 그런 차에 대구에서 난리가 났다 카니 농민들도 항쟁을 한 거예요.

경찰서나 악질 지주들 집에 가서 불을 싸지르고 생명도 빼앗는 난리가 난 기라요. 이 부근에서 대표적인 데가 영천이고 북쪽으로는 왜관이 상당히 극심했지요.

후유증이 와요.

충청도 경기도 경찰들이 와서 으스대고 서북청년단이 와서 경찰 행세를 하니 10월항쟁에 가담한 사람들이 어떤 고초를 겪을지 모른다 싶어 피해야겠다고 산에 들어갔어요. 산에 들어가서 간신히 피신을 하고 있다가 나중에 무장을 해서 무력항쟁을 했는데 야산대라 카다가 나중에는 빨치산이 됐어요.

또 일부는 국군의 모체인 국방경비대에 입대를 해가지고 군복을 입고 고향집에 마음 놓고 왔다갔다 했어요. 경찰도 군인한테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산에 들어간 사람들은 야산대 활동을 하다가 먹고 살라고 산골 부락에 가서 밥도 해달라 카고 식량도 얻어가고 했어요.

산골 사는 사람들을 부역행위 했다고 잡아다 족치고 고통을 많이 받았어요. 야산대 사람들도 경찰의 토벌로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고 경찰도 희생자가 생겼어요.

그러다가 1948년에 대한민국이란 게 생기고 국회에서 국가보안법을 만들어 가지고 10월항쟁에 가담한 사람을 잡아갔어요. 대한민국이 되기 전에는 미군정의 포고령 위반이라 카다가 정부수립 후에는 국가보안법 위반이라고 처벌을 했어요.

한강 이남의 대부분 지역으로 항쟁이 퍼져나갔어요. 3.1운동 이후 가장 큰 민중 항쟁이 대구 10월항쟁을 기점으로 전국적으로 일어났다는 역사적 평가가 있어요. 그 여파로 제주 4.3 사건까지도 대구 10월항쟁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도 있지요.

산에 들어간 사람들은 군경의 토벌로 희생을 많이 당했고, 국방경비대에 들어간 사람도 박정희 사건 때문에 억울한 희생자가 많이 나왔어요. 박정희가 만주군 장교 하다가 와가지고 국방경비대 들어가 있었는데 그때는 남로당 천지라 할 정도로 정치 세력이 남로당에 많았어요.

박정희는 군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기회주의자이니까 남로당에 들어가 있었어요. 10월항쟁 때문에 피신한다고 국방경비대 들어와 있던 청년들을 박정희가 남로당에 입당시켰지요. 많은 청년들이 억울한 생명을 잃었고 박정희는 그걸 자백했다고 생명을 건졌지요.

선산에서는 10월항쟁 때 박정희의 형님인 박상희란 사람이 지도자 역할을 하다가 충청도 경찰의 총을 맞고 논바닥에서 죽은 일도 있어요.나는 이듬해 1947년 12월 하순에 대구공회당 웅변대회에 대구상업학교 대표로 나갔어요.

웅변대회장은 이철승이 대표로 있는 우익 학생단체인 전학련(전국학생연맹)이 때려 부수면서 수라장이 됐어요. 웅변의 주요 내용은 분단반대였는데 남조선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고 미국 유엔을 비방했다고 미군정 포고령 위반으로 대구교도소에 갔어요.

그때가 10월항쟁이 있은 지 1년이 됐을 땐데 미결수가 많더라고요. 내가 있던 방의 감방장 어른도 왜관서 10월 항쟁에 참가했던 분이었고 농촌에서 10월 항쟁에 가담했던 청년들이 많았어요. 나도 거기 함께 있다가 벌금형 받고 학교 퇴학을 당하고 나왔어요.

나중에 그 분들이 어떻게 됐는지 잘 모르겠지만 6.25 발발 후 가창골, 경산코발트 광산으로 가서 생명을 잃었을 것 아닌가…….해방되자마자 면마다 농민조합이 다 만들어졌어요. 농민조합에 가입한 사람들은 남로당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기라요.

그저 토지개혁 해가지고 토지를 준다 하니 농민들은 거기 적극 찬성해서 농민조합에 가담하고 부녀동맹, 청년동맹 같은 데 가담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가 보도연맹을 만들어서 그 사람들을 집어넣었다가 6.25때 학살한 거라요.

그 학살된 사람들 중에 10월항쟁에 가담한 사람도 상당수 있다고 알면 안 되겠나 그래 생각하면 될 기라요. 내가 아는 거는 여기까집니다. 고 밝혔다.

좌로부터 둘째 [문예미학사] 대표 김태용 / 사진 = 문해청 기자

강창덕 선생님은 일제시대 때 2번, 미군정기에 대구공회당 웅변대회사건으로 1번, 이승만 정권 때 자유당 무력통일을 반대하다가 1번, 장면 정권 때 2대 악법 반대 데모를 하다가 1번, 박정희 정권 때 2번, 다 합해 7번의 감옥살이를 했다.

살아오시며 가장 혹독한 시간은 박정희 정권 때 인혁당(인민혁명당)재건위 사건으로 감옥에 있었던 시간이었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이 모진 고문으로 조작된 사법살인 사건이라는 것은 이제 모두가 다 알고 있다.

국제법상 사법살인사건으로 대법원 선고 20시간 만에 사형당한 이들을 생각하면 살아있는 것이 죄스럽기도 하셨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밝혔다.

그러나 강창덕 선생님에게 가장 미운 이는 첫째가 우리의 백년 원수인 미국이고 둘째는 미국놈 앞잽이인 이승만이고 셋째는 친일 민족반역자이자 군사독재자인 박정희라고 하신다. 개인적인 원한보다 언제나 민족을 먼저 생각했다.

박근혜 정부는 인혁당 피해자들이 국가로부터 받은 배상금을 부당이득이라고 다시 환수해 가려 했다. 배상금으로 판결난 것도 전부를 다 지급한 것이 아니고 3분의 2 정도만 지급해 놓고는 대법원에서 없는 법을 새로 만들어 배상금 계산을 다시 하고,

가집행 받은 배상금 중 60퍼센트를 국가에 반납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것을 이행하지 않는다고 국정원은 반납소송을 걸어와 재판에서 졌다. 연 20퍼센터의 이자가 붙어 빚은 15억이 되었다. 평생을 분단 극복을 위해 살아온 아흔두 살의 민주화 운동가를 국가는 이제 15억의 빚을 진 채무자로 만들었다.

살아온 지난날이 후회되지 않으시냐 여쭈니 ‘마음이 편해요’ 하신다. 한 번도 누군가와 개인적으로 싸워본 적이 없으시다. 온화한 미소를 띤 얼굴로 도레미 정도의 옥타브 안에서 말씀했다.

실제로 강창덕 선생님의 말씀을 곁에서 듣고 있노라면 이분은 평생 솔 이상의 소리를 누군가에게 내 보신 적이 없을 것만 같다. 그러나 부정의한 국가와 공권력 앞에서는 화를 참을 수가 없으셨다.

가장 부드러운 것이 절대 꺾이지 않는다는 걸 배운다. 모진 겨울을 지나고도 지지 않고 웃으며 다시 나타나는 봄바람처럼. 이정연 시인. 『사람의문학』 등단. 10월문학회 회원

다음은 서분숙 [르포작가]의 대구지하철참사 유가족 증언 인터뷰 내용이다. 서분숙 작가는 대구 출생으로 제15회 전태일 문학상 수상했다. 이후 세월호 참사의 단원고 약전 󰡔짧은, 그리고 영원한󰡕, 밀양구술프로젝트 󰡔밀양을 살다󰡕 동화 : 󰡔할머니의 강󰡕 저술했다.

서분숙 작가는 죽음 앞에서 제대로 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대구지하철참사 유가족 증언 및 인터뷰를 대구지하철 희생자대책위 황명애(대내 사무국장), 전재영(대외 사무국장)이 함께했다.

대구 지하철 중앙로역으로 내려가는 길은 무겁다. 2003년 2월, 중앙로 역 화재 당시에 이곳을 찾아온 기억 때문일까. 그때 중앙로 역은 이승과 저승 그 어디쯤 경계에 있는 장소 같았다. 세상을 떠난 사람, 너무나 갑자기 떠나 버려서 죽었다고는 도무지 믿기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의 흔적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검게 타버린 검은 벽은 살아남은 자들의 글씨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랑해', '보고 싶어', '천국 가세요'....... . 인간이 품을 수 있는 가장 절박한 감정만이 가득 차 있던 검은 벽. 그리고 이승과 저승, 그 어디쯤에 있는지 알 수 없던 사람들, 화마 속으로 사라져 버린 채 생사를 아직 확인하지 못한 사람들을 찾는 사진이 지하철 역 곳곳에 붙어 있었다.

일 년도 아닌 한 달도 아닌 불과 며칠 전까지 한집에서 밥 먹고 웃던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눈빛은 퀭했다. 그리운 이들을 찾기 위해 실종자들의 사진을 내걸고 담요 한 장만 몸에 두른 채 화재의 현장에서 노숙을 하던 사람들의 눈빛이 선명하던 중앙로 역,

나는 그 날의 이 장소를 잊을 수 없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빼앗아 가버린 곳, 삶과 죽음이 이렇게 한꺼번에 단절될 수 있다는 것을 순식간에 깨닫게 해 준 곳, 터질 듯이 가슴이 아파도 아픔을 묻고 살 수밖에는 할 일이 없다는 걸 수차 확인 시켜 준 곳. 떠나버린 자에게나 살아남은 자들에게나 대구 지하철 중앙로 역은 분노와 허망함을 동시에 알려준 장소일 것이다.

새카맣게 타버려서 치워져 버린 건 1079호, 1080호 전동차만이 아니었다. 죽음에 대한 기억, 죽임이 일어난 원인, 죽음의 흔적은 중앙로 역에서부터 서서히 지워졌다.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는 점점 잠식되어 갔다. 어느 누구도 말하지 않았고 어느 곳에서도 이 참사를 봉합했다.

나는 점점 지하로 내려가는 일이 힘들어졌으며 대구 중앙로역을 마주하는 일이 숨막히기 시작했다. 나만의 일이었을까. 나에게 일어난 현상들은 대구시민들의 집단 트라우마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가라앉은 상처에서 여전히 피가 흐르는 동안 2014년 세월호가 침몰했다. 그 다음 해에는 기어이 대구에 무인선이 개통되고 몇 번의 사고가 일어나는 동안 사람들은 참사의 트라우마를 앓고 또 앓는다.

이 한가운데에는 유족들이 있다. 내가 대구 지하철 참사로 세상을 떠난 이들의 유족들을 처음 만난 건 2015년 5월이다. 세월호가 침몰된 지 일년이 지났을 때였다. 세월호 참사와 대구 지하철 참사는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대구문인협회 회장 박방희 시인 / 사진 = 문해청 기자

대구 지하철 참사의 유족들은 당시의 세월호 유족들이 마치 2003년 참사 직후의 자신들의 모습 같아 안타까웠고 먼저 참사를 겪은 유족으로서 되풀이되는 참사를 막지 못한 것이 무엇보다 마음 아팠다.

여기에 실린 글은 2015년 이후 2019년에 이르기까지 대구 지하철 참사 유족들과 이루어진 몇 차례의 인터뷰를 정리한 기록이다. 앞으로도 유족들을 만나 인터뷰를 계속 이어갈 예정이다. 인터뷰에 관한 기록은 이 지면을 통해 계속 보고할 것이다.

이어질 인터뷰 기록을 통해 삶의 모습만큼 우리 속에 존재하는 죽음의 모습에도 시선이 기울어지길 바란다. 대구 지하철 참사로 희생된 이들의 유족들이 한결같이 지키고 싶었던 것은 죽음에 대한 존엄, 죽음에 대한 예의, 그리고 참사로 인한 죽음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는 세상에 대한 희망이다.

서분숙 시인은 세월호 이후 대구 지하철 참사를 다시 보게 되었다. 세월호와 대구 지하철 유족들은 공통적으로 안전에 대한 대책 마련을 요구하고 있다. 스스로의 문제도 힘 드실 텐데 넓은 의미의 안전을 요구할 수 있는 마음은 어떻게 나오게 되는 겁니까.

황명애씨는 그게 하루 아침에 되지는 않는다. 그 사고에 대한 상당한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어떤 대형 참사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고 하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라도, 작가님이나 저에게나 다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요.

몇 해 전에 후쿠치야마 탈선사고 추모식 참석을 위해 일본에 가서 세월호 유족을 만났는데 만나서 첫마디가 ‘미안합니다’, 그분들은 저에게 ‘미안합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미안합니다’ 했어요.

왜냐하면 그래도 우리가 먼저 사고가 일어났는데 제대로 수습을 해가지고 안전대책을 좀 보완이 되도록 힘을 썼더라면, 저희들도 힘을 쓴다고는 썼어요.

그러나 저희들 힘은 미약하고 공권력은 강하니까 밀려서 되지 않은 거지만, 그랬더라면 저렇게 큰 대형 참사는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 때문에 ‘미안합니다’ 라고 하는 거죠.

세월호 유족 분들이 미안하다고 하는 것은 몰랐다고 하는 거죠. 이런 대형 참사가 예전에 일어났을 때는 그들만의 일이지 우리들의 일이기도 하다는 걸 몰랐다는 거죠. 그래서 그런 어려움을 겪었는데 몰랐다는데 대한 ‘미안합니다’ 그런 의미였어요.

저희들이 너무 모르고 있다가 이런 큰일을 당하니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가운데 자식의 명예도 있고 우리가 몰라서 지키지 못한데 대한 이런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누구라도 안전에 대해서는 노력해야 하는 일인데 우리가 먼저 겪어봤으니까 더 잘 알지 않겠습니까.

모르는 분들을 알게 하는 것도 우리 몫이구나, 그것이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안전이란 것을, 처음엔 그것이 잘 안 받아 들여졌습니다.

솔직히 한동안은 안 받아 들여졌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깨우침을 가지면서 이제 누구 몫이 아니고 우리 전체가 해야 할 몫이다.... .

서분숙 시인은 그렇게 받아들인 계기가 있었나요? 황명애 : 시간이었어요, 그건. 시간이 지나면서 자꾸 생각하게 되는 거죠.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이 이 사고의 원인이며, 왜 일어났는가, 이런 것 등등.

저는 앞으로 우리 사회가 다변화되면서 이런 사고가 더 많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 사고의 주범이 내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미칠 것 같아요. 사회적으로 불만이 생기는데,

나도 그 사고의 주범이 될 수 있다고 생각이 들면서 그러면 이런 사고가 더 많이 일어날 수도 있겠구나, 그러면 그 대처를 세워야 하는 사람이 나는 아니고 네가 해야 한다,

이건 아니잖아요. 너도 나도 해야 되는 거죠. 우리는 더 절실한 과제가 내 부모, 내 자식, 내 형제의 죽음이 그나마 헛되지 않게 하는 것, 교육적 승화를 시키는 거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서분숙 시인은 개인적인 고통으로 힘들텐데 적극적으로 싸울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나요? 전재영 : 처음엔 사고가 나면 공허하고, 대부분 다 그랬어요. 처음엔 사고가 일어나면 내 가족이 죽었는데 안전 뭐, 그런 게 무슨 필요가 있나, 다 죽고 없는데, 원망을 하죠.

그렇게 하다가 좀 있으면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왜 내 가족이 죽었을까, 그렇게 생각을 하다보면 어떤 면으로 보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그런 사고였단 말이 예요. 우리도 마찬가지고, 세월호도 마찬가지고, 막을 수 있는 사고였는데도 대형 사고가 일어났단 말이예요,

그러면 왜 이렇게 되었느냐, 원인분석에 들어가는 거죠. 자기 나름대로 해보는 거죠. 메스컴에 떠드는 것은 전문가들이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생각을 해보는 거죠. 그러다 보면 아, 이건 나 혼자 조심해서 될 일이 아니구나, 옆에 사람에게도 알려줘야 하는 거고,

특히 대형 건물이라든지, 교통이라든지 이런 걸 관리하는 정부나 지자체가 관리를 잘 해야 하는구나, 그래야지 나를 비롯해서 내 가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거구나, 그런 식으로 자꾸 생각이 반복되는 거죠. 세월호 유족들이 광화문에서 왜 그렇게 했느냐, 맞아요. 이건 에너지가 있어야 해요.

우리도 처음엔 그랬어요. 지하철 중앙로역에서 4개월 동안, 거기 컴컴한 연기가 거슬려 가지고, 새카맣게, 거기 보통 사람 같으면 일주일도 못 있을 거예요. 거기 사개월간 있었던 게 그런 거죠. 내 가족이 죽었는데, 도대체 왜 죽었는가는 알아야겠다,

그거죠. 언뜻 보기에 우리 같은 경우는 매스컴에 나와 있는 게 김대한이란 사람이 불을 질렀다, 그러면 그 사람이 죄가 제일 크다, 그 다음엔 운전하는 기관사가 불이 났는데도 끌고 들어왔다, 그 사람들 구출하지도 못하고 다 태워 죽였다, 거기까지만 생각을 하더라고요.

우리도 처음엔 그것만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자세히 상황을 알고 보니까 어떤 면에서는 이 사람들도 피해자다 이거죠. 김대한이란 사람은 정신 장애가 있어요.

그 사람도 그 사람 나름의 고통이, 그 사람이 잘했단 말은 아니에요. 혹시 오해할 수도 있는데 그 사람은 그 사람 나름의 불편함이 있었고 주위에 호소도 많이 했더라고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경제적으로 궁핍하다 보니 자기 자신을 원망하고 사회를 원망하게 되었겠죠. 그러다 보니 불을 내었단 말이에요. 기관사 같은 경우도 대부분 보면 마스터 키를 뽑는 게 그게 습관화가 되어 있더라고요.

그러니까 나갈 때 그걸 뽑고 나가야지 그 기관사가 계속 근무를 할 수 있지 (평상시에) 놔두고 갔으면 그 사람이 큰 징계를 당하거나 해고를 당할 상황이죠.

그게 습관화가 되어 있다 보니까, 그 사람도 잘못은 했지만 한편으로 보면 피해자이다, 그런 생각까지 자꾸 들게 되는 거죠. 그 생각을 자꾸 하다보면 자꾸 그런 생각이 들게 되는 거예요.

결국 이게 시스템적인 어떤 문제가 있지 않느냐, 그럼 왜 이런 지하철을 만들어 운행을 하게 되었느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게 된 거죠. 그 당시에 대구 지하철과 똑 같은 지하철을 만들었는데 우리나라는 아주 불에 잘 타는 불쏘시개 같은 지하철을 만들었는데 , 우리나라가 홍콩이나 인도까지 지하철을 수출했는데 거기 수출하는 건 불연 내장제를 했단 말이예요.

대구 사고 나고 얼마 안 되어 가지고 홍콩도 똑같은 사고가 났는데 거기도 휘발유를 뿌려서 사고가 났단 말이에요. 그런데 거기엔 한 사람도 사고가 안 났어요. 단지 거기는 도망가면서 가벼운 타박상이랄까, 그런 부상만 입었을 뿐이에요. 그걸 아주 잘 표현한 말이 있는데,

그때 홍콩에 견학을 다녀오신 분이 이런 말을 했어요. 대구 지하철은 5분만에 다 불태워 죽여 버렸는데 홍콩 지하철은 5분만에 다 피난까지 이루어졌다고, 똑같은 우리가 만든 지하철을 가지고 거기는 다 살았는데 우리는 이렇게 되었다고. 그래서 그때 우리가 홍콩까지 견학을 갔다 왔는데,

홍콩의 그 지하철도 우리가 만들어 수출한 거거든, 만약에 우리나라가 기술적 문제가 있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또 모르겠지만 우리나라가 홍콩에 수출한 지하철은 멀쩡하고 정작 우리나라 지하철은 불쏘시개 지하철을 만들어 가지고 운행했단 말입니다.

애당초 불연 내장제로 되어 있는 걸 가지고 운행했더라면 김대한이 불을 내더라도 사고가 안났을 거란 말이에요. 그런 생각까지 자꾸 도달을 하는 거에요. 우리가 내 가족이 죽었으니까 그냥 누구 말마따나 돈 타먹고 집에 가서 울고 있으면 되느냐 그런 생각을 할 때 그건 아니다 그거죠.

그러니까 이렇게 활동을 하고, 세월호 같은 경우는 광화문엘 가서 이야길 하는 거고, 우리는 처음 사고 나고 사 개월 동안은 황국장님이 가족들 관리하면서, 밥 먹으러 갈 때는 어떻게 하고 그렇게, 그때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지하철 중앙로 역에 있었는데,

황국장님은 밖에서 그렇게 하고 저는 사무실에 있었고 그런 행동들을 해왔던 거죠. 그리고 안전테마파크에 서른두 분 모신 것도, 어떤 면에서 보면 개인적으로 선산들이 다 있단 말이예요. 그 분들이 내 가족을 못 모실 정도로 돈이 없고 그렇진 않아요.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든 안전에 대해 자각을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해줘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테마 파크가 아니라 추모공원이라 하는데, 굳이 거기에 그렇게 하게 되는 거예요. 내 사랑하는 가족이 가능하면 좀 깨끗한 곳으로, 좋게 하고 싶죠.

하지만 우리는 유가족분들께 설명하기를 가능하면 거기를 더 명예롭게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우리 가족들이 죽어서라도 더 명예롭게, 우리 선산에 내가 꾸미는 것보다도 더 명예롭게 만들자, 우리, 그렇게...... .

황명애씨는 그리고 그것은 이런 면도 있어요. 원칙은 지켜져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사대 과제 중에 보면 ‘안전한 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추모 사업’이라고 해놓았거든요. 추모 사업 안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안전재단 설립도 거기에 속하고,

추모 전시관, 그리고 추모탑, 추모묘역, 이런 게 다 추모 사업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제 말들이 많이 변형되어 있지만 그 목적으로 저희들은 했고, 대구시는 저희들을 속였고 그런 겁니다.

그러면 그 시민안전테마파크라는 추모공원 안에는 그 교육을 할 수 있는 교육장과 전시를 할 수 있는 전시관과 그리고 추모 묘역과 추모탑이 한 곳에 있을 적에 안전을 지킬 수 있는 교육 상승이 일어난다고 저희들은 그렇게 생각을 했었고 그렇게 하기로 대구시와 약속을 했었던 거죠.

그래서 저희들은 그걸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 생각하면 희생이예요. 왜냐하면 내 아이를, 내가 열 달 간 품어서 낳은 그 애의 꿈을 키우기 위해 부모들은 무단히 노력을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키우던 자식을 한 순간에 잃어 버렸는데, 그 죽음 앞에서 그래도 부모는 사후 세계에라도 제대로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그것을 배제하고 원칙을 지키기 위해 안전을 지키기 위한 교육장을 만들기 위해 기꺼이 제 아이를 거기다가 꺼내 놓을 수밖에 없었단 말이예요. 그런 마음으로 교육의 장을 만들어서 내 아이가 헛되지 않게 해야겠다, 정말로 이름도 하나 없이, 그 아무 표지석 하나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가 있는 것이 우리가 정말로 안전을 지키기 위한 일환이다 그렇게 생각해서 했는데 비난을 많이 당했죠. 한마디 저희 변명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몰매를 다 맞았습니다.

결국 대법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건 공원법에 대한 무죄 판결이고 과제는 아직까지 남아있다 그런 상황이죠. 안전이란 걸 왜 유족이 이렇게 강조 하냐면 제 친구가 안전 지킴이란 걸 발족해 가지고 카톡방에 이래 사진이 올라와 있더라고요. 이런 걸 볼 때 우리는 참 식상해요.

내 친구는 평생을 지역 여성으로써 사회활동을 하는 친구인데, 제가 참 못된 댓글을 달았어요.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안전 지킴이 명분, 내보이기 용으로 하지 말고 진짜 열심히 하라고 댓글을 달았는데, 정말로 이번 사고 이후에 대구에 보면 안전지킴이 교육재단, 이런 게 만들어져 있더라고요.

좌측 첫째 김용락 시인 좌측 셋째 정지창 시인 / 사진 = 문해청 기자

대구시에서 시비로 지원을 해요. 안하는 거 보다는 나아요. 그렇지만 정말로 진정한 안전은 외면되면서 사진 찍기에만 급급한 그런 모습을 볼 때 식상하고 속상하고 그렇습니다. 대구의 안전이란 게 수습하기만 급급한 그런 거구나, 진정한 수습은 이제 하지 않고 저런 것들로 수습을 하는구나, 안보면 좋겠는데 자꾸 눈에 띄는데...... .

서분숙 시인은 참사 이후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이견도 있었을 거고 갈등도 있었을 것입니다. 지하철 참사 희생자 유족분들은 이 시간들을 어떻게 지나 오셨나요? 황명애씨는 그건 어찌할 수 없는 문제인 것 같아요.

어찌할 수 없는 문제인데, 저희들처럼, 저희들 희생자 대책위에 있는 사람들은 뜻을 가지고 원뜻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처음에 이제 희생자 대책 위원회 구성되면서 우리는 이제 이 사대 과제를 가지고 하겠다 하면서 거기에 뜻을 가지고 왔었단 말이예요.

거기에 뜻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주욱 지금까지 지내온 사람들이고 그 나머지, 중간에 떨어져 나간 분들은 다른 뜻을 가진 분들, 저런 게 왜 필요하나, 왜 우리가 해야 하는데, 우리는 희생자인데, 돈 그거 도(다오), 우리 몫이다, 상가에 부조금 들어왔으면 상주 몫이 당연히 맞잖아요.

그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데, 부상자들도 우리 몫이다, 더 도(다오), 아파 죽겠는데, 협의, 재판, 다 필요 없다, 더 도, 더 도, 계속 그런 식이고 그러다 보니 이렇게 나뉘어져 있는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분들도 많이 수용되어지고 그러면서 이제 저 같은 경우는 초기부터 유족 관리, 관리라고 해야 하나, 합의, 포용, 뭐 이런데 다 관여했던 사람이라 유족들 누가 숟가락 몽둥이가 몇 개인지 다 알 정도로 초기부터 그렇게 해왔으니까 그런 일들이 꾸준히 그 마음으로, 때로는 너무 속상해요.

제가 자원봉사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때로는 나한테 화풀이하고 이럴 때는 저도 화가 난단 말입니다. 정말 대성통곡하고 싶을 때는 나도 분노가 인단 말입니다. 나도 유족인데, 나도 아픈데, 잘 해보자는데 나한테 이렇게 할 때는 속상할 때가 많죠. 그렇지만 원뜻이 있으니까 그걸 꾸준히 가다보면 시간이 지나니까,

나뉘어져 있던, 여기저기 사람이 다 있다 하더라도, 유족이라면 생각이 다 똑같아요. 정말로 예전엔 원망만 하던 사람이 어느 날 전화도 오고 요즘 뭐 어떻게 지내십니까 묻고, 저희들 아픈 이야기이지만 한분 두분 이제 세상을 떠나십니다. 병명이 다 암이예요.

한 분도 다른 병으로 돌아가신 분이 없어요. 다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그게 너무 가슴 아프잖아요. 그래서 위로의 전화를 드리면 예전엔 원수 대하듯 하던 사람들이 돌아옵니다. 그래도 때가 되니까 먼저 전화 주고,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그걸 억지로 묶기가 잘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노력은 해봤는데, 그런 것들은 정책적으로 하는 것, 그런 것 외에는 뜻을 모으기가 어렵더라고요. 그런데 유족이라는 마음으로는 다 모아져요. 그 대전제 하에서는 다 무너집니다. 어떤 분들과 이야길 해도 그 전제하에서는 다 무너지고 동의를 해요.

서분숙 시인은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 듣고 싶습니다. 황명애 : 어쨌든 이제 생각을 달리하고 있다가 어쨌든 우리는 같은 유족이잖아요. 자식을 버린 유족 아이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같이 고민해 봐야 하는 거 아이가, 그러면 호응을 합니다.

뜻이 다르다 하더라도. 저희들도 대구시가 분열 안 시켰으면 분열 안되요. 아까 질문 중에 힘들텐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 하셨는데 대구시가 여기까지 오도록 만든 거예요. 대구시가 우리를 조용하게 집에 가도록 안 놔두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은 부단하게 우리를 분열시키려고 하는 게 우리한테는 에너지가 되는 거예요. 분열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부모인데, 아빠, 엄마인데, 내 자식이 억울하게 되었는데, 억울하게 지금도 당하고 있는데 어떻게 집에 가요. 못가잖아요.

좌측 첫재 배창환 시인 좌측 셋째 김창규 시인 / 사진 = 문해청 기자

대구시가 우리에게 에너지를 주는 겁니다. 저렇게 안했으면 우린 벌써 집에 갔어요. 수습을 해줬으면, 약속을 지켜 줬으면, 합의문대로 했으면 벌써 집에 갔어요. 내 아이 예쁘게 추모하고, 그 곳에 가서 울고 싶을 때 울고 얘기하고 싶을 때 얘기하고 그렇게 집에 남은 가족들하고 평온하게 지낼 수 있는,

진정한 분노를 삭히고, 자식만을 위해서 추모하는 시간이었을 텐데, 대구시가 그렇게 안 놔두잖아요. 희생자 대책위가 한시적 단체이지 않습니까. 영구적 단체가 아니잖아요. 벌써 해체되었어야 할 단체가 지금까지 온 게, 대구시가 그렇게 한 거에요.

뭐든지, 예를 들면 시민안전테마파크만 봐도 그 시설이 추모 공원이란 걸 우리가 합의를 했어요. 합의를 했으면 그대로 이행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행하지를 않고 뭐 중간에 안 된다,

시민의 반대가 있어서 안 된다니까, 추모 공원을 시민안전테마파크라 해서 완공시켜 놓고 2.18 기념 공원으로 변경해주겠다 해놓고선 안 해주잖아요. 유족들 다 데려다가 가장 전망이 좋고 햇볕이 잘 드는 공간이 여러분들의 유족 사무실입니다 해놓고는 안 해주잖아요. 법적으로 안 된다잖아요.

제가 볼 때는 법적으로 되요. 대구 시장이 승인하면 되요. 추모탑이라면 주민 반대가 있어서 안 되니까 안전 상징탑이라 해놓고 추모탑으로 하자 해 놓고선 안 해주잖아요. 그리고 추모 전시관, 영정 사진 놓고 뒤에 유골함 둬도 된다고 해놓고 뒤에는 그대로 비워놓고 안 해주잖아요. 안 지키니까 그렇게 되는 거에요.

전재영씨는 이렇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대구시는 감출려고 하는 거에요. 그런 사고가 일어났다는 걸 감추려고 하는 거죠. 대구시 직원이라든지 이런 사람들이 피해를 입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아주 간단하게 말한다면 저희들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는, 이런 대형 참사가 일어났다하면 시체 수습하고 돈 주고 끝났어요. 대부분 그런데 우리들부터는 안전을 외치고 추모 공원 필요하다 그런 이야길 했거든요.

대구시로 봐서는 빨리 감추어야 하는데 오히려 더 이렇게 바깥으로 내놓고 선전하게 된단 말이예요.

지금은 대구시도 그렇고 정부도 그렇고 바꿔야 하는 게 뭔가 하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사고가 났잖아요. 인재지만 사고가 나면 이렇게 보여줘 가지고 이러면 사고가 난다, 이렇게 승화를 시켜줘야 하는데, 대구 지하철도 그렇고 세월호도 그렇고 자꾸 감출려고 하는 거죠.

어떤 면으로는 그런 지하철을 만들어 운행한 그 자체가 잘못 된 거거든요. 그 관리하는 곳이 그때 당시로는 대구도시철도공사, 대구시였단 말이예요. 그 잘못이 아예 곪아 터졌으면 의사한테 보여 가지고 치료를 해줘야 하는데 오히려 감추기에 급급한 것, 계속 그렇게 해왔단 말이예요.

우리는 그걸 밝히려고 하는 거고, 죄가 있으면 우리 여기 이러이러한 죄가 있다 밝혀 줘야 하는데 그냥 포괄적으로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까지만 이야기 하지 세부적 이야기는 하지 않잖아요.

황명애씨는 역대 대형 참사를 보면 시신수습하고 손해배상하면 끝이었는데 대구 지하철 사고 후에는 사대 과제, 추모 공원 건립 이런 요구가 나오니까 대구시는 자기들이 판례가 되고 싶지 않은 거에요.

그러니까 무단히 노력해서 유족들을 분열시키고 그렇게 해오는데 저희들이 오히려 그런게 에너지가 되어서 ‘이대로 무너져서는 안 되겠다’그렇게 하는 거죠. 제가 늘 하는 말이 ‘저거는 평생 공무원 할 수 없는 거고 우리는 평생 부모잖아, 죽기 전까지는 할 수 있잖아, 그래서 오래 버티는 놈이 이긴다’

그런 이야길 할 정도로, 부모라는 거 하고 대구시가 수습을 안하고 유족을 와해시키고 은폐할려고 하는 것, 그런 것들이 이제 에너지가 되는 거죠. 그래서 이제 세월호도 우리들이 이런 것들을 했으므로 수습과정에서 안전이나 그런 것들을 다 드러낼 수 있지 않았을까,

약간은 그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건 어떻게 보면 좋은 현상이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대형 참사가 안 일어나야겠지만 일어난다면 당연히 지켜져야 할 더 강한 제도들을 만들어 내서 이제 안전이 지켜지지 않을까하는 희망, 사람은 희망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의 문학] 25주년 기념 정대호 시인 윤희옥 여사 / 사진 = 문해청 기자

서분숙 시인은 참사를 겪지 않은 사람들이 유족들 만날 때 마음에 부담이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유족들을 만날 때 어떤 마음으로 만나는 게 좋을까요?

황명애씨는 내가 친구들한테도 늘 하는 이야기가 어떻게 할려고 하지 마라,

그냥 덤덤하게 봐주고 뭘할려고 하면 그냥 힘내라 잘한다 호응해 주는거죠. 내가 가족을 잃지 않았는데 그 마음을 어떻게 알겠어요. 모르는 게 당연한 일이지, 감히 모르는 마음을 알려고 하지 말고 그 분들이 하는 일을 호응해 주는 것,

그게 가장 큰 힘인 것 같아요. 이번에 보니까 세월호 유족들이 자연 치유를 하는데 힘쓰는데 그분들을 도와주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뭔가를 해야 하쟎아요. 가만히 있으면 우울하고 돌아가 있으면 우울해요.

같이 모여 가지고 뭐라도 하면, 같은 아픔을 가진 분들끼리 뭐라도 하면 그게 자연 치유가 되거든요. 텃밭 가꾸기를 하셨더라고요. 내가 기사에서 봤는데 그런 거 참 잘하는 거잖아요. 그런 것들이 유족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

유족을 위해서 뭘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리고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수습과정에서 이렇게 해보면 어떻겠느냐 그런 것들이죠. 특별히 할 것이 있겠습니까. 호응해 주는 거죠. 제대로 알아야죠,

제대로 알지 못하고 비난하는 거 정말 나쁘잖아요. 잘 알지 못하고 비난하는 건, 세월호도 그렇고 저희들도 마찬가지지만, 무대응하잖아요. 무대응하는 건 대응할 가치도 없다는 거죠. 한편으로는 그 분들이 유족이 아니니까 우리 맘을 우찌 다 알겠노, 한편으로는 아량을 베푸는 거죠.

전재영씨는 조금 전 이 말이 참 중요한 말이에요. 잘못된 기사를 봤다면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아, 이건 내가 봐도 유족들이 참 잘못하는 거다 이렇게 판단할 수 있어요.

왜냐 하면 언론이 엄청나게 오버라든지, 의도적으로 안좋게 보도록 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럴 경우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아, 이거 유족 잘못이다,

이렇게 볼 수가 있거든요. 그러면 그럴 때에 그 기사만 보고 판단할 게 아니라 당사자한테 한번 물어 보라 이거죠. 내가 생각했을 때 이거 잘못된 거 같다,

이게 맞느냐, 다른 게 있느냐, 이렇게 물어 보면 우리가 이야길 해줘요. 그러면 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기사만 보고, 잘못 되었구나 생각하겠죠.

물론 그런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은 하죠. 그러나 우리가 전문적인 그런 말주변이라도 있으면, 그래도 우리도 많이 발전했어요. 저희들 같으면 설득할려고 노력하겠지만, 나이 많은 육, 칠십 된 유족들은 누구를 설득할려고 하겠어요. 그러고 말죠.

황명애씨는 기자분들이 잘못 알아 가지고 오보를 내는 게 아니라 일부러 오보를 내죠. 그건 오보가 아니죠. 대구시가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 기자분들은 대구시의 압력에 의했던지, 아니면 스스로 앞잡이가 되어 쓰든지,

그 둘 중 하나겠죠. 그런 기사들을 시리즈로 계속 씁니다. 그런데 기자분들이 정말 잘못 아셨다면 정정 보도를 내주셔야 하는데, 정말 잘못 알고 쓰시는 분들도 있긴 있겠죠.

서분숙 시인은 유족들이 서로 모여서 뜨게질도 하시고 밥도 같이 드시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치유에 도움이 되는가요.

황명애씨는 네. 뭔가에 집중하고 할 게 있으면 견뎌냅니다. 사람이 굉징히 힘든 일이 있어도 죽을동 살동 움직이면 감기도 한번 안 걸리고 몸살도 안 걸리잖아요.

사람이 그렇게 되어 있나 봐요.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고 혼자 계시고 이러면 이런 분들이 꼭 말썽을 일으키십니다.

세월호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제가 안 봐서 잘은 모르지만 잘 안 나오고 집에 혼자 계시고 이런 분들이 꼭 반대되는 이야길 하고 불만을 토로하고 그러실 겁니다.

그런데 그거라도 하시는 분들은 그래도 살아요. 그런데 그조차도 하지 않고 집에 가만히 계시는 분들은 정말 아픕니다. 그걸 전국장님하고 저하고 눈으로 봤잖아요, 그게 2010년이었나,

저희 유족분들을 한 절반 가까이 전국장님하고 저하고 둘이서 방문을 했어요.

일주일 가까이 걸려서 둘이서 방문을 했는데 정말로 집에만 계시고 안 나오시고 그런 분들은 펑펑 울어요. 고통이 심하고 그 고통을 어디 토로할 데가 없고, 가족도 위로가 안되요. 그게 왜냐하면 가족은 엄마 마음 틀리고 자식 마음 틀리고 다 틀리잖아요. 자식들은 사회생활을 하잖아요.

엄마는 집에 있쟎아요, 엄마 마음 자식마음 틀립니다. 그리고 형제니까 부모하고 틀리고, 그러니까 집에만 가만히 계시는 분들은 굉장히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잘 아울러 나가는 게 조금이라도 고통을 줄이는 방법이고 그런 걸 도와 줄 전문 기관이 있어야 하잖아요.

저희들은 그때 당시에 그런 것들을 도와 줄 전문 기관도 없었고 그러니까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내가 부모니까 감수해야 할 몫인 줄만 알고, 중앙로 그 지하역에 한 사개월을 앉아 있으니 정말 애기주먹만한 시커먼 가래가 목에서 나와요.

그런데도 주장할 줄도 모르고, 그냥 내가 감내할 수밖에 없었던 그때 당시는 그런 면에서 좀 무지했지만, 처음부터 정말로 전문기관에서 전문가로 이루어진,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치료가 이뤄져야 해요. 치료 중에 같이 어우러지는 치료로써 텃밭 가꾸는 것,

누가 아이디어를 내서 했는지 모르지만 그분들, 정말 잘하신 거예요. 같이 바구니 들고 가져다 놓고, 식물을 심어서 그게 싹 틔우고 커나가는 과정을 본다는 게 그게 굉장히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는 겁니다.

사람의 문학 창간 25주년 축하 / 사진 = 문해청 기자

서분숙 시인은 작은 행복이 그렇게 큰 슬픔을 위로 할 수 있나요? 황명애씨는 그 순간순간이 위로가 됩니다. 상실한 사람에게 동물을 키워 보라는 것도 그런게 치유가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그 순간으로 살아가야 하잖아요. 그게 잊혀지지 않고, 저는 이제 잊혀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이거든요.

조금이라도 내가 잊을까봐 염려하고, 시간이 지나가고 나이가 들면서 잊혀지는 것들이 생기면서 내 자식에 대한 기억마저도 잊어버릴까봐 나는 염려하고 걱정하며 사는 사람이예요.

그렇다 해서 슬픔을 늘 한결같이 똑같이 품고 살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유족들이 모여 있으면서 함께 있으면서 치유가 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죠. 제가 전문가가 아니라 확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치유가 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죠. 경험적으로는 분명히 치유가 되는 것이 맞다,

그리고 제가 늘 대구시는 저희 희생자 대책위원회 윤석기 위원장님께 늘 고마워해야 한다는 말을 해요. 왜냐하면 사고 이후에 희생자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뒀다면 희생자 백구십이명의 유족중 상당수는 칼을 들고 가든가 어떻게 들어가든,

대구시 시장을 공격하든, 지하철 공사 사장을 공격하든, 기관사를 공격하든, 그런 불상사가 분명히 생겼으리라고 예상하고 우리 유족들 중 상당수는 정신 분열증을 앓고 있게 되지 않았겠느냐 그런 생각을 해요. 그런데 그걸 정말로 초기부터 똘똘 뭉쳐 모여 있는 시간들을,

우리가 하루에 여덟 시간 정도는 모여 있는 시간이 되었죠. 같이 있으면서 같은 이야기 거리에 주목할 수 있는 시간들을 만들었단 말이예요. 정말로 본인으로서는 피나는 고통이었잖아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브리핑을 하고, 이런 것들을 한다는 게 정말 쉬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한 공간에서 한 과제를 가지고 같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들을 만들어 놨단 말이예요. 불쑥 일어나 사고 치려는 것을 말리고 위로하고, 먹지 않고 아프려고 하면 옆에서 위로해서 먹게 만들고,

이래서 이제 정말로 사고치지 않고 약간의 치유가 되는 그런 공간과 시간을 만들어 준 사람이 윤석기 위원장인데, 대구시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해야 하는데, 오히려 이 사고를 은폐하고 축소할려고 하니까 가장 적이 윤석기 위원장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거죠.

대구시는 자기들 마음과 뜻대로 안 되니까 역으로 생각하는 것이 저희들로서는 참 원망스럽고 안타깝습니다. 서분숙 : 참사 이후 전문기관과 전문가의 도움이 있었다면 아픔을 치유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을까요? 황명애 : 저는 전문 기관이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치료를 했더라면 저희들 삶이 지금보다는 더 나은 삶이 아니었을까,

왜냐하면 알콜로 인해 이미 돌아가신 분들도 계시지만, 그런 분들이 생기지 않고 피해 손보상액으로 받은 보상액을 관리하는 능력을 조금 교육을 해줬더라면 덜 없애고 덜 힘들게 살도록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게 분명히 치유와 교육이 필요한 부분인데 대구시는 하지 않았습니다.

서분숙 시인은 전국장님과 황국장님은 모두 스스로, 혹은 가족에 의지해서만 힘든 시간을 견뎌 오신 건가요? 황명애 : 저는 전국장님에게 의지해 살았고 전국장님은 저 때문에 살았죠. 저는 그때 당시부터 지금까지 하염없이 전국장님을 괴롭힙니다. 그래서 이렇게 살아가잖아요.

전재영씨는 우리가 재단을 만들었는데, 우리가 지금 그것 때문에 이렇게 싸우고 있지만 재단을 만들면 제일 먼저할려고 하는 게 뭐냐면, 물론 유족을 관리하고 이런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교육을 받잖아요,

이런 대형 사고가 일어났을 때 그러면 당사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런 메뉴얼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잘못한 사람들을 죄를 주기 위한 그런 것들이 아니고, 그런 것들도 포함은 될 수 있지만, 우선 사고가 일어났을 때 유족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시신 수습, 뭐 그런 것까지 포함해 가지고, 우리가 세월호 가족분들을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물론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만났지만 우리가 느끼기에는, 그분들은 우리한테 이런 말들은 안 했지만, 느꼈는게,

공연팀 여울 / 사진 = 문해청 기자

우리는 지하철 참사하고는 다르다, 그 사고는 과거에 일어난 사고이고 우리는 좀더 향상된 피해자들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지금도 그런 느낌은 있어요. 세월호는 대중들에게 관심을 받는 사건이고 지하철 참사는 과거에 일어난 대부분 잊혀져 가는 피해자들이다,

그런 감들을 가지고 있어요. 내가 만나본 많은 사람들은 그래요. 그러나 원망은 안하죠. 그분들이 어떻게 되어갈 것이다는 것을 우리는 짐작은 하는 거죠. 앞으로 점점 관심은 사라져갈 것이고 자기 혼자 집에 가서 혼자서 많은 고통을 겪을 것이다,

정부나 이런 데서는 계속 분열 정책을 펼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주변의 친지라든지 친척들이라든지 계속 비난을 하면 하나하나씩 떨어져 나갈 것이다, 그렇게 안되는게 맞는데, 우리는 그런 충고들을 하죠. 안받아 들이죠. 처음엔 그 분들이 실감을 못하는 거죠.

보통 사람들이 대형 사고의 피해자가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듯이, 또 외부 사람들은 피해자가 어떤 입장인지 모르듯이 세월호 유족분들도 사고가 처음 났을 때는 안 겪어 봤단 말이예요, 안 겪어봤기 때문에 과거에 대형 참사가 이런 게 있었다는 것만 알지 앞으로 어떻게 되어 갈지는, 우린 짐작은 하지만, 그 분들은 처음엔 잘 몰랐죠.

황명애씨는 그리고 그 분들도 시간이 지나면 어떤 면에서는 더 힘들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왜냐 하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몰려 있잖아요. 그리고 옆에서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고 있잖아요. 우리는 도와주는 사람이 없고 초기부터 그냥 우리가 버텨 왔잖아요.

우리는 초기부터 그냥 버텨온 사람들이라 내성이 쌓여 왔고 세월호 유족들은 갑자기 그런 관심이 끊어지면 더 힘들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을 해봤습니다. 근본적인 것들은 그러지 않기를 바라죠.

우리가 처음에 팽목항에 갔을 때도 너무나 순수하게 계시는데, 기가 막혀요. ‘언론이 다 공개된 장소에서 약속을 하셨는데 안 지키시겠습니까, 당연히 지켜지지요.’이러는데 내가 거기서 ‘합의서’이런 거라도 받아두라하니까 안 들을려고 했어요.

공무원들을 믿고 있는 저분들 가슴에 상처를 안 줘야 할텐데 (예전의) 전국장님처럼, 제 2의 전국장이 안나와야 할텐데 그러면서, 내가 모 기자님께 한번 여쭤 봤어요. ‘저 약속이 지켜질까요?’, ‘안 지켜지죠.’ 한마디로 그러는 거예요. 유족들은 정말 (예전의) 우리들처럼,

저는 살림 살던 주부고, 전국장님은 본인이 하는 일에 매진하고 오로지 내 자식, 부모, 와이프만 바라보고 예쁘게 살던 사람들이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언제 공무원하고 부딪힐 일이 있겠어요. 그러니까 말하는 대로 다 믿고, 우리도 처음엔 공무원들을 정직한 단체로 인식하고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저분들은 약속을 해놓고 안 지킨다고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인데 세월호 유족들은 별다르겠습니까. 돌아오면서 안타까워서 ‘이번에는 제발 대구시처럼 하지 말고 안산시는 그래도 저쪽이니까 우리보다는 안낫겠나, 보수적인 단체가 있는 곳보다는 안겠나, 그러니 잘 수습을 해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이야기하며 올라왔죠. 한마디도 그분들께 제대로 된 조언을 못해주고 올라왔어요. 갈 때는 그래도 조심스럽지만 수습과정에서 이런 건 힘드니 조심하라고 이야기 해주고 와야 되지 않겠나 싶어 갔는데 단 한마디도 못해주고 왔어요. 그런데 염려했던 것들이 막 나타나더라고요.

내가 그분들 뵐 때 왜 그러고 있었느냐고 물어봤어요. 그분들은 그분들 나름대로 고통이 있었어요. 왜냐하면 정부에 거세게 항의를 하면 수습을 안해 줄까 봐 그것 때문에 말도 못하고 엄마들은 정말로 숨죽이고 있었답니다.

그 얼마나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까, 당연한 권리를 주장을 못하는데 그게 얼마나 가슴 아픕니까.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는데 대해서 국민들이 비난을 하잖아요. 세금 가지고 그걸 인양할라고 한다고, 아홉명 수습하기 위해 그 많은 돈을 들여 인양할려고 하느냐고 국민들은 질타를 한단 말이예요.

옛날에 훈련 중에 헬기 떨어졌을 때 군에서 헬기가 얼마짜리라고 거기에만 주목을 해가지고 사람 생명은 이렇게 중시하지 않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무슨 국민성이 이래요, 내 생명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남의 생명은 하챦게 여기는 이런 국민성이 어디 있습니까.

서분숙 시인은 유족들 간에 갈등이 생기더라도 절대로 넘지 말아야 할선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황명애 : 저희들도 일부분은 후회하고, 그때 이러면 좋았을 텐데 이러는 부분이, 유족은 적이 아니지 않습니까.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유족이 아니고, 부모에게 자식이 다섯 있다면 모두 다 내 자식이지 않습니까.

그런 마음으로 아주 격한 상황까지는 가지 말아야, 나눠진다고 해도 유족이라는 끈은 놓지 말아야, 극적인 상황은 만들지 말아야, 나중에 어떻게든 유족은 하나로 뭉쳐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가족이 생각이 다 달라도 아픔이 있으면 모이듯이, 유족도 마찬가지입니다.

힘든 상황이 왔을 때도 격한 상황까지 안가도록 총 지혜를 발휘해야 안 좋겠나, 저희들도 그때 당시에 추모사업이 잘되려면 장례를 안 치른다든지 유족이 한군데 뭉쳐 있다든지 그런게 참 중요한 협상카드일 수 있는데 그게 깨질 적에 그 분들이 참 원망스러웠어요.

그래서 원망의 말을 툭툭 뱉기도 하고 그런 부분들에서 좀 조심해서 어쨌든 나중에 봐서 감정의 찌꺼기는 없이, 그냥 우리 뜻이 달라서 헤어졌지 이 정도로 남을 수 있어야 나중에 순수하게 만나는 게 쉽지 않습니까.

서분숙 시인은 참사를 겪지 않은 분들이 유족을 만날 때 뭘 어떻게 하려고 하지 말라는 말씀, 그냥 호응하라는 말씀이 마음에 남습니다. 황명애 : 옆에서 늘 보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제가 말하지 않아도 무슨 일을 겪었는지 메스컴을 보고 알려져 버렸어요.

좌측부터 김사열 교수 윤일현 시인 이하석 시인 박방희 시인 박영석 시인 / 사진 = 문해청 기자

그런데 그걸 보고 반응이 천차만별이라, 당신 티비에 나오대, 유명한 사람이었어, 이러는 사람, 아무 일 없는 듯이 따뜻한 차 한 잔 주면서 따뜻한 눈길을 주는 분이, 그 분은 분명히 티비를 봤어요. 그냥 묵시적으로 차 한 잔 건넬 수 있는 그런 마음, 그리고 내가 이야기 할 때 호응해 줄 수 있는,

잘못을 지적해 주는 것도 저는 원해요. 내가 뜻을 가지고 저런 건 잘못이 아닐까 반성을 해보고 이럴 때도 있거든요. 그러면 나는 충분히 설명을 합니다. ‘힘들었제’, ‘고생했제’ 이러는 사람들이 있지만 몇몇 사람들은 내 앞에서 세월호에 대한 비난도 엄청나게 합니다. 그렇지만 이제 거기에 맞대응을 안해요.

그러나 에둘러서는 대응을 해요. ‘사실 새롭게 알게 되었는데 이랬다 하더라, 그분들 유족들로써 힘든 게 이런 게 있는 것 같애’ 이런 식으로 에둘러 감정을 거슬리지 않고 다시 생각할 수 있도록 한 번쯤은 에둘러 설명을 해주는데, 심지어 전화통 붙잡고 한 시간씩 싸운 사람도 있고,

제대로 지식도 있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도 있는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 할 때는 저도 거세게 대응을 합니다. 너무 분해가지고, 그날, 그분하고 싸운 날, 왜 그 있쟎아요, 스물 두 가지 세월호 유족들이 요구한다는 거, 그거 가지고, 그래서 당신 여기에 대해 뭘 알고 있느냐고, 유족들이 뭘 주장하는지 당신이 알고 있느냐고, 이게 유족들의 주장이라고 당신이 분명히 알고 있느냐,

이런 걸 어디서 알고 여기다 올렸느냐 이런 걸 가지고 한 시간을 싸웠어요. 그런데 대해서는 저는 대응도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냥 유족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그냥 유족 같으면 저 혼자 아프고 말겠어요.

제가 전문지식이 있어서 사무국장을 하는 건 아니지만 유족이다 보니 본의 아니게 이런 일을 하다 보니 그냥 유족보다는 조금 더 아는 부분이 있지 않겠습니까. 부족해서 못하는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그런 사람들 보고 가만히 있다는 것도 정의롭지 않지 않습니까.

내 마음에 적어도 정의라는 개념이 있기에 이런 일을 하는데 그런 일을 보고도 무덤덤히 있다는 것도, 그것도 내 주변에 있는 사람, 나를 너무나 잘 아는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건 그냥 보고 넘길 수는 없습니다.

서분숙 시인은 떠나간 가족은 내 삶에서 어떻게 존재하나요? 황명애 : 저는 초기부터 떠나보내지 말자고 마음먹었고 우리 애들하고도 그냥 우리 가족의 일원으로 있다고 생각하고 살자고 했어요.

그래서 늘 대화를 합니다, 마음속으로.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생각이 나요, 내가 생각하겠다고 생각이 나는 게 아니라 문득문득 생각이 떠오릅니다. 아무 생각없이 여러 사람 놀러가 이야기하고 있는 와중에도 생각이 나요.

그러면 그런 때는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눈물이 나면 울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우리 애들이, 애들도 고통스러웠지 않았습니까. 처음엔 나만 아픈 줄 알았어요, 엄마니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보니까 나보다 더 아픈 게 애들이더라고요. 저거는 말도 못하고 아팠어요.

지금도 조금씩 조울증을 우리 애들도 앓고 있고 저도 거기서 벗어나지는 못했어요. 그러면서 이제 시간이 지나니까 자연스럽게 한 번씩 언니 이야기, 누나 이야기를 끄집어내기는 해요. 그런데 그전까지는 마음에 담아만 놓고 말을 못 끄집어 냅니다.

저도 울고 싶어도 집에서 못 울고 목욕탕에 가서 샤워기 틀어놓고 울고, 애들 앞에서 안울려고 그렇게 서로의 감정을 감추고 살았구요. 애들은 엄두가 안 나서 못 끄집어 낸거 같아요.

우리 애들은 고등학교, 초등학교 다닐 때 당해서 공부를 제대로 못했어요. 머리도 다 빠지고, 정말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어요. 그럴 정도로 심했는데 지금은 많이 좋아졌죠.

자연스럽게 이야기도 꺼내고, 내가 몇해전 처음으로 아이들에게 꽃 선물을 받았어요. 어버이날에. 그 전에는 그런 선물 없었어요. 제가 일하는 엄마이다 보니 언니가 엄마 역할을 다 했는데 그런 날이 되면 나를 비롯해서 언니 생각이 더 나는 거예요.

그런데 꽃 선물을 줘서 이제 조금은 상처가 아물어가나 보다 생각을 했죠. 너무 아프니까 속에 감추어 놓고 이제 그런 것들을 초기부터 치유가 있었더라면 지금보다는 좀더 낫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지요.

문예미학사 대표 김태용 / 사진 = 문해청 기자

마지막 축하공연으로 ‘여울팀’ 진금영과 정영주가 ‘봄’외 3곡으로 신명을 내며 [사람의 문학] 창간 25주년 기념 세미나 청중과 어우러졌고 아름다운 음율을 조화롭게 마무리했다.

이날 문예미학사 대표 김태용은 보수도시 대구에서 민주 진보적 문학운동을 하고, 이를 담아낼 그릇인 종합 계간문예지를 25년째 출판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휼륭한 일이다. 했다.

또한 처음의 마음처럼 변함없이 실현하는 것은 참세상을 향한 대단한 용기와 인간 사랑의 헌신적 자기희생이 필요하다. 하며 [사람의 문학] 관계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축하와 감사를 한다. 라고 동종업 출판사 대표로서 연대사의 담담한 소신을 밝혔다.

문해청 기자 jajudol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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