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겠죠? 미안합니다. 영화 '암살'에서 의열단 김원봉을 알다.

항일무장독립투쟁가 김원봉 장군의 유일한 혈육인 여동생 김학봉(90) 여사가 2월24일 오전 3시에 별세 하셨다.

장례식장은 경남 밀양시 부북면 춘화로 60 밀양 희윤요양병원 이다. 충절의 고향 밀양에서 태어난 약산(若山) 김원봉(1898~1958)은 어릴 때부터 반일 감정이 남다른 소년이었다. 나라를 잃은 슬픔에 방황하던 김원봉은 대한광복회의 암살 활동에 충격을 받고 중국으로 가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다. 약산은 난징 진링대학에 입학한 이듬해 터진 3·1운동의 비폭력에 실망했다. 그가 선택한 길은 암살·파괴활동이었다. 조국 독립을 위해 열혈 운동가들은 민중 속에 잠재한 폭력의 위력을 끌어내는 뇌관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너무 많이들 죽었어요. 잊혀지겠죠? 미안합니다."

“자네가 왜 미안하다 하는가...내가 더 미안하네” (김구)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후벼팔 수 있을까? 영화 '암살'을 보고 사흘 내내 그 대사를 잊지 못해 기어코 이렇게 글을 쓰게 된다. 그저 모르고 살아온 죄송한 마음으로 말이다.

잊혀진 비운의 독립운동가 김원봉, 그의 진정한 모습을 영화 ‘암살’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됐다. 지금까지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김원봉과는 너무도 달랐던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살아생전 당시 김원봉 장군/사진=국민TV 발췌>
영화 '암살'에서 김원봉(조승우)

김원봉을 검색해 보니,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북한의 정치인으로 나온다. 아뿔싸, 그래서 그가 이렇게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월북 정치인이라면 당연히 역사교과서에서 그를 소홀히 다뤘을 것이고...남북분단적 상황이 그를 이렇게 초라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1919년 3.1 비폭력 만세운동이 일제의 무차별 폭력으로 실패로 돌아가자, 철저한 비타협 폭력노선의 무정부주의 독립운동 단체가 1919년 11월 중국 길림성에서 조직된다. 이름하여 의열단(義烈團)이며, 그 단장이 바로 김원봉이다. 의열단은  ‘7가살’과 5곳의 파괴 대상을 정하고 요인암살, 중요기관 폭파로 일본을 공포에 떨게 했다.

7가살의 대상은 조손총독부 고관, 군부의 수뇌, 대만총도, 매국노, 친일파 거두, 왜적의 밀정, 악덕지방 유지 등이며 파괴 대상은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왜적의 중요 기관 등에서 보듯이 의열단은 민족의 독립을 위해 꼭 없어져야 할 인물과 기관 척살하기 위한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당시 이러한 항일 투쟁으로 김구 선생에게는 현상금 60만원이 붙은데 반해 약산 김원봉에게는 100만원(오늘날 환산 200~300억)이 붙어 그 위용을 가늠할 수 있다.

대표적인 의거가 1920년 9월 의열단원 박재혁에 의한 부산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그해 12월 의열단원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1921년 9월 의열단원 김상옥의 조선총독부 폭탄추척 의거, 1922년 3월 오성륜·김익상 등의 일본 육군대장 저격사건, 1923년 1월 의열단원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1924년 1월 김지섭의 도쿄 일본궁성 입구 이중교 폭탄 투척 의거, 1926년 12월 의열단원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 및 식산은행 폭탄투척 의거 등이 꼽힌다.

이후 김원봉은 1930년대 후반 조선민족혁명당을 이끌며 당시 중국 내 민족주의 운동의 한 축을 이루고, 김구(金九)의 한국국민당과 서로 경쟁한다. 또한 '조선의용대'라는 강력한 군사조직을 결성하기도 했다.

1941년 6월 조선민족혁명당은 임시정부 참가를 결의했고 '조선의용대'도 광복군 제1지대로 합편되었으며, 김원봉은 1942년 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하였다. 1944년 임시정부 제38차 회의에서는 국무의원 및 군무부장에 올랐다.

1945년 8·15해방 후 12월에 귀국, 여운형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민공화국'에서 중앙인민위원 및 군사부장을 맡았다. 1946년 2월 조선공산당이 좌익단결을 위해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했을 때, 5명의 의장 가운데 1인이 되었으며, 중앙위원직도 맡았다.   ​

하지만 1947년 3월 악질 친일경찰 출신 노덕술에게 남로당 파업 연류와 관련해 체포된 김원봉은 따귀를 맞는 등 엄청난 수모를 당한다. 당시 의열단 동지들의 회고에 따르면 풀려난 뒤 사흘을 연속해서 울었다고 한다.

이후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기 위해 김구, 김규식과 함께 1848년 4월 남북협상회의에 참석했고, 그는 북한에 남게 된다. 월북한 것이다. 그만큼 친일 경찰에 당한 수모가 컸던 탓일까? 이 때문에 남쪽에 남겨진 약산의 가족에게 상상하지 못할 시련이 닥쳤다.

김원봉은 1948년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었고 9월에는 국가검열상에 올랐다. 1952년 5월 북한 노동상을 맡았으며 1956년 조선노동당 제3차 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

하지만 북한에서도 그의 생은 오래가지 못했다. 북한은 김원봉이 장개석의 스파이라는 혐의로 1958년 10월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 부위원장직에서 해임하고, 그후 숙청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

이렇듯 김원봉은 남에서도 북에서도 버림받은 비운의 인물이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의열단장 김원봉은 대한민국 독립과 건국의 혁혁한 공로자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당시 풍미하던 일부 좌익적 색깔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결코 그의 독립에 대한 공로를 ‘빨갱이’만으로 치부되어서는 안된다. 특히 하루아침에 대한민국 경찰이 된 친일파 염석진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한국 전쟁이 일어난 후 보도연맹 사건으로 약산의 형제 4명, 사촌 5명이 총살당했다.

김 여사의 부친은 연금 상태에서 돌아가셨다. 남편은 우익들에 의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병을 얻어 돌아가셨다. 김 여사도 약산의 월북으로 인해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어 모진 심문을 받았다.

약산의 형제 중 생존자였던 김봉철씨는 보도연맹사건으로 처형된 형제와 사촌들의 시신을 수습하였다는 이유로 5.16 쿠데타 이후 군사혁명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 선고문에는 박정희가 직접 서명을 했다.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고 연좌제의 족쇄가 씌워지면서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김 여사의 아들들은 모두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이런 가운데 1980년 제5공화국 헌법에 연좌제 금지를 명문화 하면서 차남 김태영은 군 제대 후 유학 비자를 받아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그 후 의류업에 종사를 하는 가운데 공부를 하면서 경영학 박사를 획득했다. 현재는 미국에 거주하며 '의열단 약산 김원봉 장학회' 회장 및 '임시정부 건립위원회'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김학봉 여사의 빈소는 경남 밀양시 부북면 춘화로 60 밀양 희윤요양병원에 차려졌다.

장지 등의 자세한 장례절차는 김태영 박사가 귀국한 후 결정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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